김순영의 구약 지혜서 산책(10)


지혜의 문장을 들어야 하는 이유


문학성과 예술성을 삭제한 논리적 용어가 학술적 가치를 드높이고 학문적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가 있다. 지식을 다루는 학자들의 세계다. 그 세계의 문장들은 길고 감동 없기 일쑤다. 나도 어느새 문학적인 감수성과 예술성, 그리고 상상력을 살려내지 못하여 심미성을 극대화하지 못하는 독자가 되어 있다. 독자로서의 시간이 길어지면 저자가 되기도 하는데, 가끔 단 한 줄 문장도 마음을 동요시키지 못할까봐 두렵다. 그럼에도 이 틈바구니에서 신학적인 것에 문학성을 녹여 서로의 자양분이 된 글쓰기를 꿈꾼다. 운율과 리듬, 비례와 조화가 어우러진 구약 지혜서 문장의 숭고한 아름다움처럼.



구약 지혜서의 문장은 오랜 세월 갈고 닦여진 함축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지혜의 문장은 장황한 설명문이 아니라, 예술적인 시의 언어라서 더 매력적이다. 적은 낱말의 문장으로 많은 생각을 전한다. 글은 간결하지만, 생각의 굴곡을 만드는 문장의 예술성이 마음을 동요시킨다. 특히 구약의 《잠언》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저자들에 의해 오랜 세월 수집된 짧지만 격조 있는 문장들의 모음집이다. 잠언의 표제(1:1)는 저자로 보이는 솔로몬 이름이 등장하지만(10:1; 25:1), 솔로몬 이외의 다른 저자들의 글이 포함되었다. ‘지혜자들’(하카밈)이라 불리는 집단(22:17; 24:23), 그 밖에도 아굴(30:1), 르무엘 왕의 어머니 교훈(31:1)이 지혜 잠언의 원천으로 언급된다.


무엇보다 잠언은 구약의 다른 책들과 달리 책의 머리말처럼 글의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1:2-6). 압축의 극치를 보이면서 시사성이 높다.


지혜와 훈육을 알기 위함이요

명철한 말을 깨닫기 위함이요

훈육을 받기 위함이요

정의와 공의와 공평을 꽃피우기 위함이라

(1:2-3, 필자의 번역)


잠언의 목적은 지혜와 ‘훈육’을 알고 통찰력 있는 말씀을 깨닫는 데 있다(1:2). 한 마디로 앎과 깨달음을 위함이다. 《개역개정》이 ‘훈계’로 번역한 히브리말 단어 ‘무싸르’는 ‘훈육’으로 표현함이 더 좋겠다. 훈육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훈련의 과정이 두루 포함된 말이다. 권위자의 말잔치가 아니다. 구약의 성문서 전체에서 50회 사용된 이 단어는 잠언에서만 36회 사용될 정도니 책의 성격을 규정한 셈이다. 더군다나 ‘훈육’은 ‘훈련하다’, ‘단련하다’(야싸르)에서 파생된 말로서 몸과 생각의 훈련을 일컫는다. 한 마디로 ‘훈육’은 ‘삶의 훈련’이다. 삶의 훈련은 앎과 관계된 것이면서 명철한 말을 깨닫는 것과 통한다. 그러하니 사물의 이치나 도리를 분별하는 능력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삶의 과정 안에서 터득하게 된다.


그럼에도 잠언의 목적은 사물의 이치와 도리를 분별하고 체득하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잠언의 둘째 목적은 ‘정의’(쩨덱), ‘공의’(미쉬파트), ‘공평’(미샤림)을 꽃피우는 삶이어야 한다(1:3). 이것은 삶의 도리를 익혀 배양해야 할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목적이다. 그 목적이 ‘정의(rightness), 공의(justice), 공평(equity)’을 꽃피우는 삶이어서 개인적인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법적이며 사회 공동체적인 덕목을 실천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잠언의 목적과 함께 지혜의 가르침을 들어야할 일차적인 대상은 젊은이와 어수룩한 자들이다.


어수룩한 자들에게 노련함을 주고,

젊은이에게 지식과 신중함을 주기 위함이다

(1:4, 필자의 번역).


히브리 시의 간결한 아름다움이 오롯한 평행구문에서, ‘어수룩한 자들’(페타임)과 ‘젊은이’(나아르)는 동일시된다. ‘젊은이’는 아직 미숙하고 풋내 나는 청춘들로서 결혼하지 않은 젊은 사람들을 일컫는다. 고대인들 눈에 젊은이는 경험이 부족하여 어수룩하다. 때문에 잠언 곳곳에서 젊은이들은 어수룩한 사람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잠언을 읽어야할 독자는 단지 젊은이였나? 아니다.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포함된다.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1:5, 개역개정)


대체로 나이든 사람은 젊은이가 터득하지 못한 삶의 경험에서 삶의 기술을 발휘하곤 한다. 이것은 나이든 사람의 이점이지만, 경험적 지혜를 의지하여 배움의 열정은 시들해진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명철한 사람은 타인의 조언을 듣고 배움을 더해간다. 한 마디로,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 경험적 지혜에 머무르지 않고 ‘들음’을 중히 여겨 거기서 “지략”을 얻는다. “지략”(타흐불로트)은 어렵고 독특한 말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방향을 잡는 기술 또는 지혜로운 조언이다. 그러니까 지략은 미숙하고 서툰 솜씨가 아니라 복잡 미묘한 기술이다. 이 기술은 선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윤리적인 삶이나 지혜로움으로 잘 다듬어져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통찰이다. 그러하니 지혜로운 자는 들음의 중요성을 알기에 들음에서 신중함을 배우고 삶의 복잡 미묘한 기술까지 터득한다.



마지막으로 잠언의 목적은 “잠언과 비유,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개역개정)을 깨닫기 위함이다(1:6). 이 간결한 문장에서 잠언과 지혜자들의 말의 성격이 드러난다. 지혜자들이 생산한 짧은 문장은 오랜 세월동안 닦여진 농축된 언어다. 그 형태는 대체로 ‘풍자’와 ‘수수께끼’였던 셈인데, 구약에서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 매우 희귀한 단어가 “비유”(개역개정, 새번역)로 번역되었다. 좀 더 정확한 히브리적인 표현을 하자면, ‘풍자’다. 풍자는 어떤 사안을 두고 빗대어서 재치 있게 경계하거나 비판하는 말이다. “오묘한 말”(또는 “심오한 뜻”, 새번역) 역시 희귀한 말이다. 일종의 “수수께끼”인데, “당황스러운 질문”, “불가사의한 질문”을 뜻한다. 그러니까 잠언의 목적이 당황스럽고, 불가사의한 질문을 깨닫기 위함이니 실로 인생은 수수께끼 같은 난제로 가득하다는 말로 들린다.


이처럼 잠언의 머리말(1:2-6)은 경험이 부족한 젊은이와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 잠언의 가치와 목적을 밝혀 지혜의 가르침을 듣도록 초청하는 부름이다. 이 부름은 들음을 통한 젊은이의 품성 교육을 위함이다. 또한 도덕성과 통찰력을 얻는 훈련이요,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지혜자의 말과 글을 깨닫고 해석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그러하여 고대 지혜자들의 간결한 문장들을 엮은 잠언은 수수께끼 같고 불가사의한 삶을 어떤 방향에 맞추어 살 것인가 안내하는 가르침이다.


고대인들과 달리 현대인들의 배움은 인격을 다듬는 수련의 과정이 아니라 갖가지 자격증과 높은 시험점수를 획득하여 경제 논리에 만족시키는 시장의 원리에 충실하다. 얼마짜리 인간을 만드느냐에 혈안이 된 교육은 학벌과 돈을 숭배하는 사회와 통한다. 우리의 배움이 구약의 잠언처럼 삶의 난제를 풀어가는 통찰력과 덕성을 키우는 삶의 훈련이면 얼마나 좋을까. 창조자이며 구속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고대 지혜자의 잘 다듬어진 간결한 한 줄 문장이 읽는 이의 삶을 충만하고 아름답게 조율하듯, 우리의 배움이 구약 잠언의 목적과 통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옛적 말씀이 낡아보여도 그 맛은 나날이 새로우니.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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