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37)


오르막과 내리막


수피령은 정말 만만한 고개가 아니었다. 로드맵에도 수피령을 두고는 ‘직등코스’라 적혀 있었고, 전날 길을 걷던 중 우연히 만나 긴 이야기를 나눈 심마니도 마음을 단단히 먹고 넘어야 한다고 일러준 터였다.


‘수피령’이라니,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물 수’(水)에 ‘가죽 피’(皮)에 ‘재 령’(嶺), ‘水皮嶺’이라 쓰고 있었다. 어찌 그런 이름을 얻었을까 싶은데 함장로님은 ‘말이 씨가 되었나, 96년 대홍수 때 대성산 수피령은 온통 물을 뒤집어쓰는 대피해가 있었다.’고 수피령에 얽힌 일 한 가지를 소개했다.


이른 아침 숙소 앞에 있는 식당에서 국밥을 먹고 길을 나섰다. 막 퍼지기 시작하는 볕인데도 벌써 더위가 느껴질 정도였다. 단단히 마음을 먹으라 한 고개이니 여느 길보다도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도 일종의 오기였을까, 고개를 다 넘기 전까지는 쉬지 않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힘든 길일수록 중간에 쉬면 쉬고 난 다음이 어려웠다. 배낭은 더 무겁게 느껴졌고, 걸음은 나도 모르게 무거워지곤 했다.


수피령은 두 가지 점에서 어려웠다. 하나는 완만한 경사였고, 다른 하나는 급한 경사였다. 완만한 경사가 끝없이 이어졌다. 완만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완만한 경사는 언제인지도 모르게 내 안에 있는 힘을 다 소진시키게 했다. 차라리 힘이 들어도 급한 경사를 단 번에 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어느 순간 급경사가 나타났다. 그야말로 한 걸음을 옮기기가 쉽지 않은 경사였다. 한 번 주저앉거나 자빠지면 데굴데굴 굴러 처음 떠났던 자리로 물러설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새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숨은 증기기관차에서 내뿜는 김처럼 뜨겁고 소리도 거칠어졌다. 심장은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라 “뻥!” 하며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한 순간에 파열될 것만 같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몸의 한계였다.


마침내 나티난 수피령 정상. 고개 하나를 넘기가 이리도 어렵다니,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가 자명하게 여겨졌다.


몸의 한계를 느끼는 것을 좋아했었다. 신학을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서울 냉천동에 있는 감신대(監神大)에서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학년 대항 체육대회를 했다. 과(科)라고는 달랑 신과(神科) 하나, 한 학년 학생이라고는 50명, 당시의 감신대는 마치 수도원 같은 분위기였다.


한 학년이 50명인데다가 우리 학년은 유난스레 여학생이 많았다. 내 기억에는 16명이었지 싶다. 남학생들 중에서도 더러 군대를 가고 휴학을 하고 나면 그 수는 더 줄어들었다. 운동을 좋아하기도 했거니와 학생도 부족하다보니 나는 거의 모든 경기를 뛰어야 했다. 당시의 주종목은 배구와 농구였는데, 경기를 모두 마치는 오후가 되면 거반 녹초가 되었다.


체육대회의 마지막 종목은 단축 마라톤이었다. 이미 몸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지만 마라톤도 뛰었다. 그 때 느낀 것이 몸의 한계였다. 심장이 파열될 것 같은 한계를 마주하며 계속 달리는 것은 고통스러웠지만 뭔지 모를 희열 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1학년 때의 경험을 친구에게 이야기하여 2학년 때는 친구와 함께 뛰기도 했다. 수피령을 오르며 그 시절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학!, 학!, 학!”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탄식처럼 비명처럼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때마다 단내가 확 풍겼다. 그러던 중 마침내 더는 견딜 수 없다 싶은 순간이 왔다. 고개를 넘을 때까지는 쉬지 않기로 한 다짐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순간이었다.


나는 목사다, 마지막 한계에 왔다 싶을 때 내뱉는 소리와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학!” 소리를 “주여!”로 바꿨다. 자신이 매달릴 무거운 통나무를 자신의 어깨에 메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비척거리며 골고다 언덕을 오르던, 그러다가 여러 차례 쓰러졌던 예수님을 생각했다.


내가 등에 메고 있는 것은 고작 배낭 하나, 게다가 채찍을 내리치는 로마군병도 없지 않은가, 사람들의 조롱소리가 들리는 것 아니고. 그런 생각을 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옮겼다. 몸과 마음의 한계 속으로 누군가가 가만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화천과 철원은 수피령을 경계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 고개는 오르기가 힘들었지 내리막길은 저절로 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견딘 것 만큼을 누리는 것이었다.


마침내 나타난 정상, 고개에 올라서자마자 나는 고꾸라지듯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요새 눕기보다 쓰러지는 법을 배웠다.” 황동규 시의 한 구절일 것이다. 해발 780m 고개를 넘기가 이리도 어렵다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한계가 자명하게 여겨졌다. 배낭에 기대 누워 생각하니, 고개를 다 넘은 여유 때문이었을까, 옛 시절 보릿고개를 넘는 일은 수피령 고개 넘는 일과는 비교도 안 되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청정지역 철원입니다’


눈앞에서 반기고 있는 표지판 속 ‘철원’이라는 글자가 더없이 반가웠다. 화천과 철원은 그렇게 수피령을 경계로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 정상까지 오르기가 어려웠지 그 다음은 쉬웠다. 로드맵에 적혀 있는 것처럼 ‘30리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저절로 가지 싶은 걸음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람이었다. 저 아래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수피령을 오를 때는 없던 바람이었고, 고개를 오르느라 수고했다는 듯이 온 몸 다 젖은 땀을 내내 말려주었다.


살다보면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하고 내리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계속 오르기만 하는 오르막길도 없고, 언제까지나 내려가기만 하는 내리막길도 없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서로 어울리며 이어진다. 오른 자만이 내려갈 수가 있다. 내리막길을 가볍게 걷는 즐거움은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른 자만이 누릴 수가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아낸 만큼을 누리는 것이었다.


내리막길을 걷고 있자니 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등을 밀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르막길을 걸을 때에 비하면 저절로 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퍼뜩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정말로 누군가가 내 등을 밀어주었던 때는 힘겹게 오르막길을 오를 때였다는 생각이었다. 누군가가 등을 밀어주었기 때문에 벅찬 오르막길을 끝까지 오를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등을 밀어주는 때는 내리막길을 편하게 내려갈 때가 아니라,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를 때였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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