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근의 어디로 가시나이까(37)


종교개혁 500주년에 찬물을 끼얹은

명성교회 세습사태에 직면하여


●한국교회의 세 가지 근심(三患)


오늘 명성교회와 김삼환, 김하나 목사 부자에 대한 말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그이들이 자기들의 입으로 어떤 비난이나 욕도 감당하겠다고 했으니 ‘그래, 그렇다면 내 욕을 한번 먹어봐라’ 하는 뜻으로 일부러 하려고 합니다.


과학적 검증을 거친 학술적 견해는 아니지만, 한국교회에는 세 가지 근심거리(삼환)가 있습니다. 첫째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목사된 것. 둘째 그 사람이 목회에 성공한 것. 셋째 ‘말 타면 종 부리고 싶다’는 속담처럼 졸부가 삼가 할 줄 모르고 교계의 원로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런 출발과 과정과 성공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를 성찰할 줄 모르는 일관된 비루함입니다.


제가 알기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 자격을 갖추고 성취를 이루고 스승의 반열에 거론되는 위인들에게 가난도 있고 고난도 있고 박해도 있고 슬픔도 있었지만 비루함이 있었다는 얘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비루함이란 고귀한 품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비루(鄙陋)와 고귀(高貴). 이것이 세속(世俗)의 혼란스런 홍진(紅塵)과 진리(眞理)의 분명한 밝음을 구별하는 척도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다른 게 아니라 세속적 욕망과 갈망에 대한 내재적이고 초월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지위와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염치를 드러낼 때 그가 갑자기 미쳐서 그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본색이 드러났다. 그가 본래 그런 위인이었음이 밝혀졌다고 말합니다. 세상에 대한 비루하고 고귀한 태도는 한순간 하나의 사건 속에 갑자기 돌출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전래 1백년 역사 동안 한국에 꽃핀 기독교 신앙에 있어 고귀함이란 무엇일까요? 가령 미국 식민지 시대의 청교도 사상가이자 목사 신학자 원주민 선교사였던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 1703~1758)를 논할 때 ‘그는 현대 미국의 사상과 감정을 완성했다’ 그런 표현을 합니다. 그의 신앙적 신학적 고귀함이란 기독교는 물론 미국 사회정신의 뼈대를 이루는 영감과 윤리의 기반을 닦은 고귀함이라는 헌사(獻詞)입니다.


한국 기독교 특히 교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보수주의 신앙계에 있어 소위 세계적으로 성공한 교회 지도자들은 있을망정 한국적 기독교 정신의 고귀한 정점을 이룬 인물이 누가 있을까요? 예컨대 1967년 해인사 방장으로 취임해 동안거 백일 동안 연속한 법문으로 ‘선(禪)과 교(敎)를 중도(中道)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설명’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정체성을 세웠다고 평가받는 성철(性徹, 1912~1993) 스님과 그의 󰡔백일문답󰡕(1992)에 비견될 한국 기독교의 정수를 집대성한 고전적 설교가 있습니까? 과문한 소견이지만 저는 목사들에게서 그런 사상사적인 설교를 읽어본 일이 없습니다. 사상을 우습게 여기는 설교는 많이 들어봤지요.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가르침이 있을 뿐입니다. 검든 희든 고양이가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목사는 목회에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 일단 규모가 커지면 신학이나 영성이나 카리스마는 저절로 생긴다는 가르침입니다. 저는 대형교회의 예배당에 많이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런 군중심리에서 발산되는 감정의 힘과 영적 고양의 분위기를 그 위험성만큼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 힘을 숭배하거나 함몰되지도 않지만 부정하거나 폄훼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런 정서(情緖)를 누가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관심을 가집니다. 요컨대 어떤 물건에 긴요한 효용성이 있다면 그 물건은 반드시 그것이 요청되는 곳에 소속돼야하는 것이죠. 조나단 에드워드의 말대로 그것은 하나의 정서이지 신앙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서가 신앙으로 오해될 때 신앙은 고귀함으로 진전될 수 없고 그 모든 역량은 유치한 자기 확인으로 돌아갑니다. 옛날 제가 청소년 시절 우리 양지면에서는 ‘네 꿈이 무엇이냐’ 물으면 ‘유치원 원장하고 결혼한 당구장 주인’이라 대답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명성교회 세습사태를 보면서 떠오르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세상을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아버지나 아들이나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참 그럴듯한 말을 많이 잘 합니다. 그러나 말마다 비루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찌질 합니다. 겉과 속이 양심적으로 투명하고 사심(私心)이 없고 격조가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 해주는 품격이 없고 말마다 떳떳치 못한 변명만을 늘어놓으니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비겁하고 비루하다 이 말입니다. 그들은 기독교계와 사회지성계 전체를 어리석은 바보쯤 여기는지 자기들의 알량한 말재간으로 교묘하게 요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만인지 어리석음인지, 이게 그들 목회의 비결인 셈이죠. 말하자면 때리지도 않았는데 맞은 척 언구럭을 떨면서 엄살 부리며 동정심 유발하기! 그러나 그건 욕망을 포기 못하는 자의 미성숙함에서 나오는 비루한 태도일 뿐입니다.


목사는 세 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첫째 설교 준비. 둘째 짐 쌀 준비. 셋째 죽을 준비. 이것들은 순서적입니다. 설교 때문에 짐을 싸고 죽을 준비가 됐느냐 입니다. 제가 그럴 준비를 갖췄다는 허영이 아니라, 도무지 왜 신학을 하고 목사를 하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겁니다. 명성교회에는 제가 알기로 김삼환, 김하나 부자 목사 말고도 목사가 수십은 더 넘을 것입니다. 목사가 수십이 넘으면 전도사는 또 얼마일까요? 그런데 누구하나 그 비루하고 비겁함을 질타하고 지적하는 설교를 하는 목사도 없고, 그 일로 짐 싸는 전도사도 없으니, 더구나 죽을 준비라는 건 얼마나 심한 과장이겠습니까. 이것이 사람들이 탄식하는 ‘한국교회에는 자정능력이 없다’는 말의 현실입니다.


만일 명성교회의 전체 목사들이 부자세습에 반대해 일괄사퇴를 선언한다면? 전도사들이 명성교회와 같은 세습교회에서는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그래도 그들이 욕망을 포기할리야 없겠지만, 사람들이 한국교회가 살아있고 자정능력이 있는 줄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김삼환 목사 부자만 탓할 일도 아닐뿐더러 바로 그런 이유로 김삼환, 김하나 부자야말로 한국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의 선진들 앞에 대역죄인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들이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서넛이 아니면, 그들이 곧 종이 임금된 것이 아니면,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이 아니면,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이 아니면,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 아니면, 성서는 더 이상 현실적 대상을 잃은 고문서(古文書)에 불과한 것입니다.


●궁상과 청승으로서의 신학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받아들이지만 어리석은 자에겐 하나님이 없습니다(잠 1:7). 입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들먹이겠지만 하나님이 없다는 말은 막무가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말씀한 ‘예언하는 자의 영이 예언 하는 자의 제재를 받는다’(고전 14:37)는 진리의 법칙을 무시한다는 말입니다. 법(法)이 없고 격(格)이 없다는 말이죠? 왜 그럴까요? 졸부(猝富)의 성공이란 본래 근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쯤은 거짓말이겠지만, 우리 모두는 처음부터 일이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측이 가능했죠. 과연 김삼환 목사 같이 한국교회의 세 가지 근심거리를 다 갖춘 위인이 세습의 욕망과 갈망을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우리가 알고 있듯이 비루한 사람은 절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라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그랬던 거지요. 한 가지 사례를 들어 검증을 해보겠습니다.


세습 문제가 불거지고 아버지와 아들이 조변석개(朝變夕改)로 말을 바꾸더니 부자지간에 번차례로 공을 주거니 받거니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그리고는 그것도 안 통할 때쯤 아버지는 노회를 불법적으로 장악해 거의 깡패처럼 세습안을 상정하고 통과시킵니다. 아들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어르신들께서 그렇게 하셨다는데….’ 이런 식으로 딴전을 피우다가 돌연 아빠에게로 달려가서 담임목사 취임을 해버린 것입니다. 닭 쫓던 개 지붕 처다 보듯이 모두가 이 어처구니없는 부자의 행태에 ‘어이가 없네’하면서 혀를 차고 있다가 정신을 차려 비난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쯤 명성교회의 장로라는 사람이 이런 대단히 은혜로운 말을 했습니다. “이제 모든 것(세습)은 끝났으니 그만 좀 비난해 달라.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다.” 말하자면 이게 그들의 신학입니다. 어차피 세습은 완료됐으니 이제 그가 잘 맡아서 잘 해먹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교회가 이 일로 비난받고 욕을 먹으면 예수님이 슬퍼하신다. 그런데 슬퍼하는 정도가 아니라 ‘눈물을 흘리신다’고 했습니다. 묻겠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파티마의 성모상도 아닌데 어디에서 어떻게 눈물을 흘리신단 말일까요? 설마 저 우주공간 어디 달나라의 계수나무 뒤에서라도 인간 세상과 명성교회를 내려다보시며 울고 있다는 말인가요?


말하자면 이런 게 명성교회의 신학이고 설교인 셈입니다. 한마디로 궁상이고 청승입니다. 이런 궁상과 청승으로 지난 수십 년을 신학적으로 어리석은 사람들 앞에서 센티멘탈의 요술을 부려왔던 것입니다. 지나치다고 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의 비신학적인 요술의 말들은 김삼환 목사의 거의 모든 설교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제가 놀라운 것은 그런 설교와 그럼에도 그에게 아멘으로 쏟아지는 성도들의 존경과 찬사가 아닙니다. 누가 아니라 목사들과 신학자들의 꿀 먹은 벙어리 형상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동료에게서조차 하나의 실수라도 발견되면 아주 사람을 매장시킬듯이 물고 늘어지곤 하는 정통 감별사들조차 이런 비신학의 성공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꿀을 먹었기 때문일까요?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몰려드는 법’(마 24:28)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딱 말기적(末期的) 현상이 나타나는 곳에는 딱 거기에 적합하여 말기(末期)를 부추기고 말기(末期)에 협력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오만하고 무능한 대통령의 측근들이 그렇듯. 교회의 쇠퇴, 자정능력의 상실이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성공한 찌질이들의 어쩔 수 없는 비루함일 뿐. 말세의 현저함이란 다 이렇습니다. 이제 그 의미를 물어보지요.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자기자신(自己自身)이 된다는 것


모든 고등종교의 가르침이 동일하지만 기독교의 가르침 역시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요시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말은 본래 성경에 없습니다.)’라는 말은 역설적으로 이런 말입니다. 한 영혼이 천하의 근본이다. 왜 한 영혼이라고 했는가? 개인이 중요하지만 개인 중에도 그의 본질입니다. 개인이 천하의 근본인 것처럼 개인의 근본은 마음(영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개인의 중심을 보신다.(삼상 16:7). 하나님의 관심은 본질, 곧 영혼에 있으므로 나머지는 제멋대로 내버려두십니다. 그 내버려두심 때문에 뭣보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그 내버려진 마음, 개인 중에서도 마음, 마음 중에서도 동기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착각해선 안 되죠. 동기를 알아야한다는 건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건대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본질이란 하나님 자신 곧 무(無)이죠. 하나님이 무(無)라는 게 아니라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본질이란 무(無), 공허(空虛)란 말입니다. 그 공허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죠. 그러므로 인간은 도무지 하나님을 향한 왜 라는 의문의 정당성을 묻지 않고는 의미 없는 곳에 핀 의미 없는 곰팡이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왜의 정당성이 갖추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의(義)라는 것, 올바른 것을 행할 수 있는 자격과 자기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도대체 자기가 자기에게 미쳐서 생긴 집착이 신념화된 것을 의라고 할 수 있는가.(이게 ‘자기 의’죠.) 하물며 그렇게 해서 생긴 자기 의를 타인들에게 짐지울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런 어려운 말을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내버려 둔다는 것은 이처럼 무서운 말입니다.


신(神) 앞에 섬으로써 우리는 가장 먼저 우리들 자신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자신의 마음이 되었고 마음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 동기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갑니다.(계속 하나님 하나님 하려니, 이름을 잘 지어야지 이게 뭡니까. 옛날 고대에는 기휘(忌諱)라는 게 있었습니다. 임금의 이름이나 부모님의 성명에 들어가 있어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고 헷갈리게 하는 글자를 기피하고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 님’이라니 도무지 격식이 없는 이름이 아닙니까. 특히 자기 아들을 목사로 만들 요량이었다면 그런 정도는 생각했어야 마땅할 터인데, 무얼 바라겠습니까. 아마 김예수로 짓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존재를 멈추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하고 명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 일체의 행위를 멈춰야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가 의롭다(올바르다)고 여기는 선의의 행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종교적 행위도 일체 멈추어야합니다. 그게 율법과 제사종교와 구별되는 성육신(成肉身, 강생(降生), incarnatio) 기독교의 핵심이죠. 여기서 행위라는 건 존재 자체, 태도를 말합니다. 멈추는 태도. 이것이 십자가의 자기 죽음이고 부인입니다. 멈추면 멈추지 않는 것들이 보이고, 보임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 곧 ‘나(Ego)’라는 우상과 하나님을 분별해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기 자신을 ‘야훼( יהוה)’ 곧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4). 예수님은 이것을 받아서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 나는 ~이다.(I am~)’라는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셨지요. 이 말은 ‘하나님이 자기를 명백하게 나타낸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Ego)’라는 관념은 이와 같이 나를 속여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에 이르지 못하게도 하지만, 나를 부인해 하나님을 나타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멈췄습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와 자세로서 세상을 살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나를 전적으로 맡겼다고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모든 일을 하고 적극적으로 성실히 하되 하나님과 함께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내재적 통찰(通察)과 초월적 관조(觀照)의 진지하고 가벼운 태도를 말합니다. 분명히 내재적인데 초월적인 거죠. 거기엔 이익과 손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진리)이 드러나는 데로 초점이 옮겨진 겁니다. 명성교회 세습사태에서 나타난 것은 하나님의 뜻인가요? 보이는 건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닙니다(히 11:3). 그 이면(裏面)엔 반드시 그렇게 나타나게 한 하나님이거나 하나님 아닌 뜻(원리)이 있습니다. 지금 명성교회에서 나타난 것은 온통 이익과 손해에 대한 집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와 같은 이익과 손해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게 하려는 태도에서 나오는 진지한 내재적 통찰과 가벼운 초월의 한가로움을 ‘거룩한 무관심’이라고 부릅니다.


               일러스트/고은비


●거룩한 무관심


‘주님을 경배한다’는 말을 많이 자주합니다.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도 많이 씁니다. 이런 말들은 대표적으로 ‘거룩한 무관심’을 선언하는 표현들입니다. 운동선수가 ‘이 영광을 부모님께 돌린다’거나, 가수나 영화배우가 ‘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말할 때, 그 공로의 칭찬과 성취의 보상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하나님이나 부모님이나 동료들의 것으로 돌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진짜로 그러한 태도여야 할 텐데 이것이 하나의 관용어(慣用語)가 되면 그 말 자체가 그저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며 영광과 경배를 자기에게 되돌리는 기만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참 종교인의 기본적인 태도는 진실한 ‘거룩한 무관심’입니다. 그것은 손익을 따져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하나님께 경배와 영광을 돌려 그의 의(義, 意) 곧 진리의 품격이 드러나게 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무관심의 태도를 일상적으로 견지해야합니다. 그러려면 최우선적으로는 침묵할 줄 알아야겠죠. 변명도 원망도 쓸데없는 해명도 ‘날 좀 알아주쇼’하는 인정의 갈망도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면서, 하나님이 다 하신다면서 왜 가만있질 못하는 걸까요? 왜 남에게 떠벌이고 소송을 거는 겁니까? 왜 동네방네 찾아다니면서 ‘내 얘기를 들어주쇼’라고 남들의 인정을 구걸합니까? 이게 다 피곤하고 번거롭고 비루한 일입니다.


가령 지난 십년간 제가 만일 목회의 불평과 고통을 늘 사람들에게 하소연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해결하려했다면 여러분은 아주 제 얼굴만 보아도 질리게 됐을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이 ‘사모의 얼굴은 목사의 이력서’라는 멋진 말을 했다고 하는데, 하물며 목사 자신의 얼굴은 어떨까요? 제 얼굴은 김삼환 목사의 얼굴 같이 늘 배고프고 아픈 사람 같은 형상을 꾸미느라 찡그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뒤로는 8백억 원(저는 이 돈을 가늠하지 못합니다!)의 비자금을 돌리고 있으면서, 빈 지게를 지고 머슴의 퍼포먼스를 하면서, 자기와 자기 아들은 남들이 안 져도 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식으로 엄살을 부리는 것입니다.


도무지 그럴 필요가 뭡니까? 고통과 고난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가시요 십자가라면 저는 그걸 입 꾹 다물고 기꺼이 지고 갈 겁니다. 하나님이 내 질고를 풀어주시는지 안 풀어주시는지 그래서 누군가 ‘목회란 게 할 만한 것이냐’ 묻는다면 ‘내가 죽을 때 대답해 주리라. 내가 한번 직접 겪어본 다음에 말해주리라.’ 이런 각오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도 잘 아는 위인들이 고작 염치없이 뻔뻔하게 세습하느라 괴로운 십자가를 가지고 엄살을 부리는 것인가요? 중세의 세습이 성직매매였고 성직매매가 축첩(蓄妾)에서 비롯된 악습인 것을 모르십니까. 그것이 북한 김일성 세습과 다른 점이 하나라도 있는가요? 모름지기 이런 세습은 김하나 목사 하나 뿐이 아닐 것입니다.


김삼환 목사에게 자식이 몇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각기 한자리씩은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이 이재용 상무에게 삼성을 물려주듯이, 이명박 장로가 이시형에게 다스를 물려주듯이, 최순실이 정유라에게 명마 블라디미르와 스타시아를 선사하듯이. 열심히 빚지고 알바하고 스펙 쌓아 대학 졸업하면 뭐합니까. 강원랜드 신입공채 518명 뽑는데 5,286명 중 10:1의 경쟁률에서 낙하산 청탁 대상이 625명이라면 우리 애들은 이 나라에 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계 최대의 대형 교회들이 즐비하면 뭐합니까. 기독교적 제도를 창출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는 요술로 사람을 속이는 언어와 상징의 쇼일 뿐입니다.


●침묵을 지키라


산 속에 들어가 밤을 새워 본 사람은 산의 막대하고 막중한 소리를 경험으로 압니다. 불교애서 이 적막을 대적(大寂)이라 합니다. 대적광전(大寂光殿)이니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니 하는 현판을 답니다. 모든 현상의 소리를 잠재운 절대적 원리(原理)의 소리. 거기는 모든 현상의 소리뿐 아리라 현상자체가 적멸(寂滅)된 대적(大寂)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절대적 침묵에도 무게가 있고 소리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 근원적 소리와 무게가 현상적 소리와 무게를 압도합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생긴 이명(耳鳴)으로 24시간을 손오공의 머리에 삼장법사의 쇠테가 조르는 듯한 소리의 고통에 시달리는데 이상하게도 거대한 밤 산중에 홀로 있을 때면 이명이 들리지 않습니다. 인식하질 못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그런 적막도 아닌 절대의 침묵 가운데 계신 존재입니다. 그의 경륜(經綸,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iκονομία)는 경제란 말의 어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우주를 운용하십니다. 그는 자취도 없고 소리가 없으나 모든 자취와 모든 소리를 주관하시고 주재하십니다. 가령 지금도 저 시베리아 자작나무 원시림의 눈더미 속에 웅크린 채 사색에 잠겨있는 늑대 일가족도 그는 다스리십니다. 아무 표시도 나지 않는 저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도 눈과 비를 내리십니다. 그에게는 쓸데없는 일이 없습니다. 우주는 광활하고 정신이 없이 돌아가지만 그에게는 온전한 지성과 의지가 있어 이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 가운데 시간과 공간들이 펼쳐지고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상상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가장 최종적으로 이러한 침묵에 도달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가 됩니까. 거기에 어떤 행위가 필요한가요. 그대는 나에게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 또한. 우리는 거룩한 무관심의 침묵 가운데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앎으로 나는 먼서 나의 일체의 행위를 멈추었습니다. 부지런히 뭔가를 하는 사람, 일을 만들고 감정을 만들고 갈등을 만드는 사람, 불평과 불만을 생산하는 사람을 그분은 그러한 대적과 적멸의 세계의 침묵으로 잠잠케 하시고, 부드럽게 어루만지시고, 거친 맘을 비둘기 같이 온유하게 다스려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가 벗어나듯 벗어나게 치료해 주십니다(시 124:7). 그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사냥꾼의 올무에서 어떻게 새가 벗어나는지 모릅니다. 벗어난 순간은 이미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순간이 아닙니다. 그렇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영원합니다! 죽음일지라도 그에게 맡길 수 있는 근거죠. 그러나 나는 여전히 침묵을 바라보며 그 가운데 존재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인의 거룩한 무관심, 고귀한 품격의 근거입니다.


●행위의 기만성


행위란 극도로 기만적일 수 있습니다. 겉으론 지극히 좋게 보여도 속은 얼마든지 사악할 수 있고, 겉은 비록 거칠고 우악스러울지라도 속은 얼마든지 선량하고 부드러울 수 있습니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명성교회 수십 년에 가장 성공한 가정은 김삼환 씨의 가족이 아닌가요. 심지어 자살한 사람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과 업적이란 구체적인 생존(먹고 사는 존재함)에 관한 정신과 영혼의 이해력 문제이지 겉만 봐선 모릅니다. 지나치게 남을 숭상하지도 깎아내리지도 마십시오. 사람을 지나치게 높이지 마십시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질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거라니 맞습니다. 남들은 고작 하루 세끼의 밥을 먹고 사람다운 환경과 안전과 안락을 위해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데 그렇게 무겁고 거룩한 수만 명의 십자가를 지고 어떻게 살려고 하는 건가요. 저라면 그런 부담스러운 십자가 보다는 산중의 자유와 고독을 택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자기를 임금 삼으려는 열광분자들을 피해 산으로 가셨던 걸 모르는 겁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사람을 높이고 또 거꾸러뜨리는 우를 자주 범합니다. 제가 항상 주장해마지 않는 교우관계의 제1의는 경계를 존중하고 개성을 지켜주는 정중함입니다. 잠언에 보면 ‘조상들의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잠 22:28)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게 어찌 토지에 대한 권면일 뿐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들 자신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고유한 개인의 경계를 침범해선 안 됩니다. 내가 무수한 사람의 구원을 책임지고 있다는 따위 전근대적이고 비민주적인 봉건을 소명으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왜 우리가 나의 구원을 타인에게 의지해야 합니까. 타인이 내게 그렇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먼저 그런 과장과 허영의 함정과 그물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자립이고 독립이고 만인제사장 곧 기독교적 아나키즘입니다.


●놓이기 위해 애쓰라


다시 한 번 ‘사냥꾼의 올무에서 새같이’ 오직 벗어나기 위해 이제부턴 맹세에서 놓이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는 그럴만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나 무분별한 맹세로 나를 타인에게 양도하고 타인을 내게 양도하도록 약속을 남발했었나요? 사람들이 내게서 내가 사람들에게서 약속이 배반당하고 맹세가 깨지는 꼴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떠나며 내게 실망했고 내가 사람들을 떠나며 그들에게 실망했습니다. 내가 그랬었나? 아니다! 맞다! 내가 그랬다! 그것을 인정할 때만 우리는 인간관계의 폭력성에서 벗어나 동일한 우를 범하지 않을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할 것입니다.


이제 나의 행위는 오직 진리와의 일체를 향할 뿐 그런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합니다. 이런 점에 착안하면 타인에 관해 세간에 퍼진 명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게 됩니다. 우리의 노력은 행위의 뒤에 숨어 있는 나의 기만성과 부족함을 일깨우는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이익을 보려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변화하거나 발전하기 위해서라면. 아니 정말로 자기와 성도들을 벗어나고 벗어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이것이 인권이죠. 저는 기업이나 이윤의 강화 외에 명성교회와 같은 대형화된 교회의 목회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까요? 바벨탑을 쌓은 고대인들의 목적은 한 덩어리로 뭉쳐 이름을 내고 흩어지지 않는 거였습니다(창 11:4).


제가 가장 화가 나고 동의 할 수 없는 말은 그들이 그래도 한국교회를 위해 지금까지 큰일을 해왔다는 식의 말입니다. 도무지 큰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가시나무가 왕관을 쓰고 나무들 위에 부니는 것처럼 이런저런 어울리지 않는 감투를 쓰고 행한 일들을 의미하는 것인가요? 가령 돈을 많이 쓰는 걸 큰일이라고 말하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세월호에서 스러져간 학생들을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기 위해 희생시켰다는 설교. 박근혜 대통령이 고레스와 같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설교가 그들이 말하는 큰일이란 말인가요? 이런 걸 실구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저를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더 큰일을 말할 테니까.


사도 바울의 본명은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컸던 용사 사울왕의 이름을 딴 히브리 식 사울이었습니다. 그 이름의 뜻은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 진리를 깨우친 다음 그는 큰 사람의 비전을 버리고 바울로 개명(改名)합니다. 이 이름은 헬라말로 작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겐 세상을 격동하고 견딜 수 없게 만드는 스스로 큰 비루한들이 넘치고 넘칩니다. 우리는 그들을 숭배하고 높여주고 떠받들어 모셔주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치 독립투사들과 친일파의 역전된 현실처럼 진정 인간의 빛을 밝혀준 숨은 스승들에 대한 지식도 기념도 거짓 큰 자들의 거짓 명성에 가려 빛을 잃고 사장돼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국 기독교 지난 백년에 정말 예언자들이 없었단 말이, 말이 되겠습니까. 지난 인류의 수많은 스승 가운데 누가 진정 지혜의 등불을 밝혔습니까? 그분들이 인류에게 어떤 빛을 주었습니까? 참된 자기를 알고 발견하는 것. 벗어나고 벗어나게 해주는 것. 집착 도구 이용 수단 필요로부터 자립하는 것. 그러한 제도와 세계를 구현해 나가는 것.


각자 우리는 나는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제부터의 출발입니다. 마음과 가슴에 근본적 변화를 위해 공부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욱더 높고 큰 이상에 대한 욕망을 위해 반대로 크기의 현혹과 망상을 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노력하면서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도 함정이 있죠.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은 모른 체 무책임해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족할지라도 전체를 내가 책임지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실현 가능한 접근방법을 다해 모든 고통의 뿌리가 되는 부패와 죄의 죽음에 대해 도전하고 지향해 나가는 것.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 그럴 때 나는 진리의 사람으로 온몸에서 정신의 진동을 발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동굴 속에서 진리를 깨우쳐도 그 소식이 만리(萬里)에 퍼진다는 말처럼. 중보란 무엇인가요? 인류를 위한 기도, 세계를 위한 기도도 4분이면 족합니다. ‘나’라는 인식이 곧 온 세상이며 하나님인 것을 자각한 사람이 그 온 세상(나라는 인식)을 진리의 표상이자 대표로 삼고 나가는 것. 그것이 중보자로서 세상을 위해 기도할 뿐 아니라 사랑해서 고쳐나가려는 사람의 고귀하고 품격 있는 자태일 겁니다.


●울타리가 깨지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뻔뻔하고 파렴치해진 김삼환, 김하나 부자 세습사태에서 확인되는 교회의 쇠퇴가 의미하는 것은 교회 울타리가 깨졌다는 것일 뿐입니다. 진리가 요청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본질은 교회의 울타리를 벗어났습니다. 명성교회는 실로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바라건대 깨어있는 성도들은 김삼환, 김하나 목사 부자의 망상에서 벗어나십시오. 깨어있는 부목사들과 전도사들은 한 사람의 성도라도 그 비진리의 사원에서 이끌고 나오십시오. 김하나 목사에게 아들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 밑천인데 하는 노래가 있던가요? 참 잘 했네요. 아버지로부터 영광스런 세습을 받으셨군요. 그러나 이제부터 당신의 모든 설교는 세습에 대한 비루한 변명이 될 겁니다. 당신의 하는 일을 속히 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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