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42)


아직도 아프니?


옥계리 마을회관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날, 아침을 부녀회장님 집에서 먹었다. 새로 만든 두부와 순두부로 아침상을 차렸는데, 밑반찬으로 오른 반찬들이 더없이 정겨워 보였다. 시골에서 만날 수 있는 찬이었다.


정겨운 것은 상 위에 오른 반찬만이 아니었다. 부녀회장님 내외는 물론 함께 사시는 어머니, 이웃에 사는 시동생 내외 등 가족들이 둘러앉으니 대가족이었다.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는 아침상에 활기가 넘쳤다.


식사를 마친 뒤 냉장고에서 꺼내주는 시원한 물 한 병을 받아들고 길을 나섰다. 여느 농촌과 다를 것이 없는 평화로운 길이 이어졌다. 곳곳에 밤꽃이 피어있고, 드문드문 집이 나타나고, 도로 옆으로는 논이 이어지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만 보고서는 내가 지금 지나고 있는 곳이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전방지역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걷고 있는 곳이 최전방일까 싶을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 이어졌다.


그렇게 길을 가고 있을 때였다. 저 앞에 제법 큰 논이 나타났는데, 논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었다. 모가 땅내를 맡아 모 사이의 빈틈은 보이지를 않았다. 검푸른 빛깔이 논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세 분의 할머니가 피사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피사리라는 말은 떠올리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실제로 논에서 피사리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욱 오랜만의 일이었다.


‘피사리’란 모판이나 모내기를 한 논에서 피라는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말한다. 잡초를 제거하지 않고 벼와 함께 자라게 두면 벼에게 돌아갈 양분을 피에게 빼앗기고 만다. 대개의 잡초가 그렇듯이 피는 벼보다도 왕성하게 자라 벼의 수확을 떨어뜨리게 만든다. 뿐만이 아니다. 귀찮다고 내버려 두었다가는 어느새 논을 뒤덮을 정도로 피는 대단한 성장력과 번식력을 가지고 있어 그냥 놔뒀다가는 논은 이내 피 논이 되고 만다.


논에서 피사리를 하는 할머니들이 있었다. 

내가 고되어도 곡식을 정성스레 키워내는 손길이 반갑고 고마웠다.


지금은 이래저래 피사리가 옛일이 되고 말았다. 피사리가 워낙 손이 많이 가는 고된 일인데다가, 농촌에서는 갈수록 일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다. 피는 생김새가 꼭 벼와 같아서 이삭이 패기 전에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데, 벼와 피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도 이제는 많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피사리는 농약이 대신한다. 효능이 좋은 제초제를 쓰면 굳이 피사리를 하느라 고생할 이유가 없다. 화학비료가 땅의 힘을 대신하고, 제초제로 풀을 잡으면 그만이다. 그러느라 독성물질이 땅과 곡식 속에 스며들고, 그걸 고스란히 우리가 먹는데도 그런 것을 헤아리고 고민할 겨를이 없다.


그런 중에 할머니들이 피사리를 하는 모습을 보았으니 반가울 수밖에.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드린 뒤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를 여쭸더니 우리 같은 늙은이를 찍어 뭐 하겠냐 하시면서도 예쁘게 찍어 달라고 농을 하신다.


피사리를 하는 모습을 오랜만에 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고 하자, 할머니들은 내 행색을 살피시더니 어디서 오는 길인지를 물었다. 강원도 고성에서 걷기 시작을 했다고 하자 깜짝 놀라시며 어려운 수고를 한다며 격려를 하신다.


길을 걷는 내게 어디 아픈지를 물었던 할머니의 질문은 주님의 음성처럼 다가왔다. 

아직도 아픈지를 묻는.


잠깐의 이야기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서야지 할 때, 할머니 한 분이 내게 뭐라 질문을 한 것 같았는데 알아듣지를 못했다. 막 지나가는 버스 소리에 섞였기 때문이었다. 잠깐 기다렸다가 할머니께 여쭸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러자 할머니가 큰소리로 물으신다.


“어디 아파요?”


할머니 생각에는 그러셨던 모양이다. 이 뙤약볕 아래를 여러 날 혼자서 걷다니, 필시 죽을병이든 중병이든 병에 걸린 사람이 마지막 결심을 하고서 길을 걷고 있는 것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멀쩡한 정신으로 불볕더위 속을 혼자서 여러 날을 걷는단 말인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데 피사리를 하던 할머니의 마지막 질문이 마음속으로 메아리쳐 왔다. 괜히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는데 왜 그랬을까, 할머니의 질문은 마치 주님의 질문처럼 다가왔다. 내 마음 모르실 리 없는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시는 것 같았다.


“아직도 아프니?”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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