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께(3)


이상동몽(異床同夢), 대동소이(大同小異)의 길을 가는 수도자


한여름 산중은 만원입니다. 남도답사 일 번지 땅 끝 마을 대흥사 십리 숲길은 수시로 차량이 엉키고 꼬입니다. 왜 그런지 미루어 짐작하실 줄 압니다. 중복이 지나고 본격적인 휴가철입니다. 그래서 풍광 좋고 유서 깊은 산중 절의 수행자들에게 이 시기는 손님맞이로 과로에 가까울 정도입니다. 십년 전부터 불기 시작한 템플스테이 바람으로, 산사는 지친 몸을 쉬고 헝클어진 마음을 살피고 다잡는 사람들의 쉼터와 깸터가 되고 있습니다.


모처럼 맞이하는 휴식마저도 번잡하고 과다한 소비로 허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하는데, 참 다행스럽고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작년 여름에는 한 달 내내 하루에 대여섯 차례 오는 벗들에게 차 대접 하다 보니 그윽하고 향기로운 차 맛이 무미하고 텁텁하기까지 했습니다. 때로는 예고하지 않고 불쑥불쑥 찾아오는 나그네들 때문에 다소 지치고 힘들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외우는 주문이 있습니다. ‘일기일회一期一會’. 모든 만남은 오직 한 번뿐입니다. 세속에서 힘들고 지친 벗들은 어렵게 귀한 시간을 내어 암자를 찾습니다. 맑은 차 한 잔을 나누며 속내를 털어놓고 그동안의 삶을 돌아보며 좋은 생각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결코 소홀할 수 없지요. 나는 그들을 맞이하면서 거듭거듭 겸양과 정성의 덕성을 미덕을 다지고 가꾸게 됩니다. 한 생각 돌리면 수행이 아님이 없고 하느님 나라와 불국정토가 아닌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성찰의 죽비


목사님! 선하고, 따뜻하고, 지혜롭고, 열정이 넘치는 목사님, 이라고 김기석 목사님을 그렇게 표현해도 결례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를 촘촘히 정독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제 마음은 새벽 별빛 아래 좌선하는 듯한 적멸의 환희에 젖었습니다. 특히 종교수도자의 글은, 읽어가는 행간이 그대로 명상과 눈 열림의 순례 길이어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습니다. 틈틈이 연두 빛 형광펜으로 밑줄 친 글들을 마주합니다.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거듭 새삼스럽습니다. 의미의 환생과 부활입니다. 사유의 진폭을 넓혀주고 성찰의 죽비를 주는 글들이 얼마나 고맙고 벅찬 것인가를 다독가인 목사님도 공감하실 것입니다.


얼마 전에 인문학을 공부하는 모임의 벗들이 제 방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방을 살피더니 그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스님, 비싼 물건이 하나도 없네요.” 책상 하나, 노트북 컴퓨터, 작은 음향기기, 그리고 책장에 가득한 책들이 내 살림의 전부입니다. 그렇게 말한 이의 속내를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많고, 비싸고, 화려하고, 명품에 대한 소유물이 비교우위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이기 때문이겠지요. 더욱이 분수에 맞는 소유로 자족하면서 내면의 향기로 가득해야 할 종교인마저도 자본과 권력에 매몰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비싼 것이 없다고 하세요. 여기에 있는 책들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고가품들인데요.”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책의 내용들은 천만금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지혜와 복을 내게 주니 천하에 최고로 값나가는 것들이지요.


좋은 책을 말하려니 중국 송대의 문장가이자 정치개혁가인 왕안석의 권학문이 생각나는군요. 그는 이렇게 책의 값어치와 효능을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 비용이 들지 않고, 책을 읽으면 만 배의 이득이 생긴다. 가난한 자는 책 때문에 부유해지고 부자는 책 때문에 귀해진다. 어리석은 자는 책을 읽어 어질어지고 어진 사람은 책으로 인해 부귀를 얻는다.” 그런데 목사님, 이런 효능을 가지게 하는 책은 반드시 ‘좋은 책’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정보의 홍수 속에서 하루에도 얼마나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지요. 그 중에서 어떤 책들이 좋은 책인지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그 많은 책들을 보면서 내면의 살림살이가 부끄럽고 글 쓰고 말하기가 저어되고 조심스러워집니다. 그러면서 좋은 글은 무엇일까를 자신에게 질문합니다.


먼저 목사님이 책에서 말씀하셨지요.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말의 허망함을 저는 너무도 잘 압니다. 가르침은 가리킴이 되어야 합니다”(295쪽).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사유와 경험과 성찰의 삶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글은 아무리 논리가 반듯하고 문장이 아름다워도 울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좋은 글은, 읽는 이의 눈을 뜨게 해주는 글이라고 단언합니다. 눈을 뜬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현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반성하게 하는 것, 한 층 더 넓고, 높고, 깊게 세상과 자신의 정신을 이끌어 주는 것이겠지요. 이런 맥락에서 오랫동안 감신대 교수를 지내셨던 이정배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말이 분명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좋은 말들로 세상을 흔들어야 한다.” 늘 불립문자不立文字와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는, 말에 대한 일종의 불신과 위험을 가지고 살고 있는 나에게 이정배 목사님의 선언은 말의 효용과 말의 나아갈 길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제 생각이 깨지고, 열리고, 다져지는 뿌듯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감사 충만! 성령 충만!


목사님! 생각해 보니 저와 목사님은 종교수행자이면서 글을 쓰는 업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 아닌 이상동몽異床同夢의 도반입니다. 각자의 지점에서 깨침과 헌신의 길을 가고 있으니 참으로 든든한 동지입니다. 이상동몽과 대동소이大同小異는 제가 관계성을 말할 때 핵심 지침으로 삼는 말입니다. 대동소이, 이상동몽, 참 옳고, 좋고, 정겨운 신뢰와 연대감이 느껴지지 않으신지요. 저는 비교적 비교하지 않고 사는데, 글을 쓰는 재주를 조금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라는 방편으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으니까요. 때로는 진실하고 치열하게 생각과 몸짓을 밀어 올리면서, 삶의 극점에서 나오는 글을 써야 하는데, 짐작과 논리와 당위만이 앞서고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편이 찔리기도 합니다. 그래도 글은 경전 독송과 참선과 더불어 주요한 수행의 방편입니다.


좋은 글을 쓰고자 하면 많이 읽고, 다양하게 부딪치고, 깊게 생각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다른 이의 책을 대하면서 저는 책을 열기 전에 제목에 대해 나름대로 짐작해 봅니다. 책의 제목은 글쓴이가 하고자 하는 의미의 집약이고 호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목차 하나하나를 꼼꼼히 주시합니다. 본문을 읽기 전에 건져내는 각 글의 제목은 그것 자체로 얼마나 신선한 울림이 있는지를 목사님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책은 각 글의 제목만을 음미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고요함과 침묵은 우리가 시간 속에 마련한 성소


이번 목사님의 책에서 제가 특별히 마음이 머무는 글의 제목을 말해도 되겠지요. 「사람은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 「담백한 삶을 위하여」,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 「움씨를 뿌리는 마음」, 「돈의 전능성을 해체하라」, 「마주 잡을 손 하나」, 「무거운 삶 가볍게 살기」, 「서로 따뜻하게 비벼대면서」, 「인간보다 이상한 존재는 없다」, 「세속적 우상과의 싸움」, 「가시밭길을 걷다」, 「눈 떠 바라보기를 잊지 마라」,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바늘로 우물 파기」, 「의미의 저장소」, 「길을 잃으면 어때」… 목차를 쭈욱 읽어가면서 첫사랑에 꽂힌 느낌으로 위의 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마 많은 독자들은 다른 제목들이 마음에 닿았을 것입니다. 《다시 책은 도끼다》를 최근에 발간한 박웅현이 책은 기본적으로 ‘각자의 오독’이라고 말했듯이, 각자의 삶의 지점에서 접점을 이룬 글들이 눈에 밟혔을 것입니다. 글의 제목은 본문과 함께 삶의 지침이고 방향입니다. “중생이 아프니 보살이 아프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 진리는 이렇게 한 줄의 문장으로 의미를 저장하고 길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리고 한 줄의 문장 너머에는 성스러운 ‘침묵’과 ‘기도’와 ‘노동’만이 최초이자 최후의 고갱이로 존재하고 있지요.


목사님! 저와 목사님은 이상동몽, 대동소이의 길을 가는 수도자입니다. 하여 우리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살아야 하는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셨지요. 지금 세상에는 전문가가 참 많다고요, 그런데 자신 존재 자체로 다른 이에게 울림을 주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고요. 그렇습니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자신이 좋은 삶을 살아가는,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수도자는 일상에서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대로 ‘말’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늘 다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말이 넘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넘치는 말 속에서는 나쁜 말들이 교묘하게 숨어서 우리의 생각과 삶을 좀 먹고 있습니다. 내 편을 만들고, 남을 배제하고, 혐오하고 고립시키는 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초점을 흐려놓고 시선을 돌려놓는 말을 생산하는 언론 기술자들이 부끄러운 줄 모르고 당당히 행세하고 있습니다. 또 지식인은 어떠한가요. 보수적인 정권과 천박한 자본가의 입맛에 맞는 논리를 생산해 주고 돈과 명성을 얻고 있습니다. 곡학아세曲學阿世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속기 쉬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지식인과 종교인은 세상이 나아야 할 길을 가리키는 말을 용기 있게 내어 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믿음을 얻어야 사람들의 생각을 흔들고 사람들의 가슴에 스밀 수 있겠지요.


목사님! 어떻게 해야 말이 믿음과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답은 간명하겠지요. 지행일치, 언행일치의 삶을 평소에 늘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맥락에서 진리를 내면화하고 일상화하는 삶이 곧 수도자의 길이겠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빛이요 소금이요 목탁이요 죽비가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각고의 정진이 필요하겠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신, “고요함과 침묵은 우리가 시간 속에 마련한 성소”(161쪽)라는 말씀에 고요히, 침묵으로 공감합니다. 내면의 성스러운 삶을 다지기 위해 부박하고 속된 만남을 줄이고 있습니다.


목사님! 요즘 사유의 줄거리는 평범한 대중의 성찰과 성숙입니다. 이번 책에서 다음과 요지로 물으셨지요.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일상의 노동에 힘겨워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성찰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라고요. 저의 고민도 이런 지점에 있습니다. 우리는 상층부 사회의 부조리를 비난하고 원망합니다. 각 영역의 1%에 해당하는 그들의 그릇된 세계관과 행태가 평범한 다수 대중의 삶을 헝클어뜨리고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단면으로 이루어진 단세포가 아니지 않습니까? 다면이고 입체적이고, 그런 입체적 다면들이 다양하게 관계하면서 삶의 여러 모습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결과에 대한 원인이 어찌 한쪽에만 있겠습니까. 그래서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시민의 각성이 필요합니다. 시민은 사회라는 관계망의 시민으로 존재합니다. 또 개인 시민이 존재합니다. 하여 평범한 직업을 가진 시민은 이 두 갈래 길 모두에 성찰과 성숙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시민은 나도 살고 이웃도 사는, 상생의 길이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안목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단위에서 참여하고 연대하는 실천을 통해 사람과 사람이 사이좋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염려하신 평범한 사람들,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성찰’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보편윤리의 삶을 지적하고 지향하는 것이겠지요. 모든 사람은 “분노와 적대감은 타자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자기 파괴적 열정이기에 더욱 심각합니다.” 목사님은 다른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각 개인이 행하고 있는 무지, 게으름, 비겁함, 불성실, 방관과 방종, 불성실, 몰염치와 무례, 평범한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갑을 관계, 작은 거짓, 지역과 연고주의에 의한 편견과 편향 등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해서 개인의 이런 삶들은 면죄되는 것일까요. 이런 것들에 대해 성찰하고 부끄러워하고, 그리고 고치지 않으면 자기 삶을 어둡게 하고 파괴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성찰하고 바꾸고 성숙할 수 있도록 하는 소명과 원력이 저와 목사님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청파교회에서 목사님의 책을 주제로 의미 깊고 정감이 넘치는 대화가 있어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목사님과 함께 하는 여러 목회자들이 제 암자에 와서 하룻밤을 보내며 기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오고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부처님과 하느님이 보시기에도 참 좋을 것입니다. 그 옛날 초의 선사와 추사, 다산 선생 등이 제가 깃들고 있는 일지암과 다산초당을 오가며 아름다운 만남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우리도 이렇게 생각과 정을 주고받으며 삶의 줄기에 푸른 잎 돋고 예쁜 꽃 피고 튼실한 열매 맺을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청안하시고 청락하십시오.


법인/일지암 주지, 참여연대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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