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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의 '말씀 안으로'

산타가 홍포를 두른 까닭은?

by 한종호 2017. 12. 21.

이길용의 말씀 안으로(4)


산타가 홍포를 두른 까닭은?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 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하시니라.(마태 25:31~46)



성탄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는 날인데 어느 날인가부터 국적도 없이 등장한 홍포를 두른 허연 수염의 할아버지가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것 마냥 설쳐댑니다. 이렇게 성탄의 즐거움은 교회보다는 밖에서 먼저 가로채 향유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가로챈 성탄의 중앙엔 역시 예수의 모습은 순진무구한 아기의 이미지 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전부가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곳곳에서 예수의 오심과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에 대한 뜻을 곱씹으며 성탄의 의미를 몸으로 알아가는 이들도 적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번을 양보해도 대중매체를 통해 만나는 성탄의 이미지는 이미 본뜻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성탄 이미지 한 가운데에는 어김없이 홍포를 두른 두툼한 몸매의 한 나이든 사나이가 자리합니다.


바로 그의 이름 산타 클로우즈.


지금도 여전히 해마다 그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은 아기 예수보다도 더 이 할아버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가 성탄선물을 고대하는 아이들을 위해 친히 그의 모습으로 치장하여 산타의 신화 잇기에 협력하기도 합니다.


바로 그의 이름 산타 클로스.


제 아이들도 그를 기다리고 있고, 그리고 저도 어린 시절 항시 그날이면 이 붉은 옷의 할아버지를 기다리느라 잠을 설친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여전히 성탄이면 온 거리를 가득 메우며 사람들의 시선을 자극하는 이 산타 클로스. 붉은 피보다도 더 선명한 홍포를 두른 이 할아버지. 과연 이 사람은 누구인지, 저는 그의 정체가 무척 궁금해 졌습니다.


‘도대체 산타는 어디서 오는가? 그는 왜 붉은 옷을 입고, 그것도 오리털 패딩도 아닌 두터운 솜옷을 입고 있는가? 왜 그는 벤츠도 BMW도 아닌, 아니 백번 양보하여 말이 끄는 썰매도 아니고 코가 붉은 사슴이 끄는 썰매만을 고집하는 것일까? 에스키모인은 개가 끄는 썰매를 탄다고 하는데, 왜 산타는 사슴만 고집하고 있는 걸까? 왜 산타는 그처럼 통통한 몸매에도 하필이면 좁디좁은 굴뚝을 주 통로로 삼고 있는 것일까? 요즘은 너무도 멋지고 예쁜 선물상자들이 널려있는데, 왜 산타는 여전히 냄새나고 자그마한 양말에만 선물을 담는 것일까?’


순식간에 산타에 대한 온갖 궁금증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도저히 이 궁금증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 저는 분연히 일어나 산타의 정체를 밝혀보고야 말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여러 서적을 통해 확인한 산타의 정체는 약간 의외의 모습으로 제게 인사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잠시 산타의 정체를 여러분께 공개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산타는 아마 북부 추운나라 어딘가에서 탄생했을 거라 믿는다. 실존 인물이든 상상 속의 인물이든 말이다. 그러나 산타는 과거 시이저로 하여금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했던 터키의 중앙. 아나톨리아지방의 남쪽 Myra(현재는 Kale)라는 곳, 그러니까 추운 곳이 아니라 오히려 사막지형에 가까운 곳에서 4세기경에 살았던 실존 인물 니콜라우스란 사람이 그 모델이 된 것이다. 어린이를 특히 좋아했다는 그는 평생 갖가지 선행을 행했다는데 그 중에서도 세 명의 자매가 구혼자가 있음에도 가난해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자 이들을 몰래 도와주기 위해 저녁에 그 집 지붕에 올라가 금 주머니를 굴뚝으로 떨어뜨렸다는 이야기가 가장 유명하다. 그 금 주머니가 우연찮게 벽난로에 걸어 두었던 양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후 이를 전해들은 사람들이 기대치 않는 선물을 받았을 경우에는 항상 이 니콜라우스에게 감사하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 훗날 이 니콜라우스에 관한 이야기는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간 네덜란드인에 의해 뉴욕에 자리 잡은 후 자본화, 상품화의 연금술사인 미국인들에 의해 재창조되어 지금의 산타의 모습으로 바뀌어져 전 세계로 역수출되었다고 한다.


산타의 고향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다고 여겨져 그곳에 설립되어진 후 매년 전 세계 어린이들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산타본부는 원래 이 지역에서 구전되던 말을 타고 선물을 나눠줬다는 바이킹의 신 Odin과 염소를 타고 비슷한 일을 했다는 그의 아들 Thor의 전설이 미국식 산타와 결합하여 그리 되었다 한다. 그러니까, 터키에 살았던 성 니콜라우스와 염소를 타고 다녔다는 바이킹의 신이 미국에서 만나 그 후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건너가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이 산타할아버지라는 것이다. 배가 볼록하여 늘 기분 좋게 “ 하! 하! 하! Merry Christmas!!”라고 말하며 웃는 흰 수염의 할아버지는 성 니콜라우스의 모습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성 니콜라스의 외모가 이랬던 것은 아니고, 흰 털이 달린 빨간 옷에 검은 벨트를 두르고 긴 모자를 쓴 모습은 미국 만화가 Thomas Nast가 1863년에 그린 만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성 니콜라스의 모습은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산타클로스협회 홈페이지, <산타의 유래> 참조

http://desk.santaclaus.or.kr/shopinfo/santaclaus.html)


이상이 역사적으로 확인된 산타의 유래입니다. 지금의 터키지역에서 남몰래 선행에 힘쓰던 니콜라우스가 산타의 모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산타의 모습은 여러 목적이 섞여 들어가 재창조된 이미지들인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산타의 그림도 역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물을 나누어주고 있는 모습. 바로 그 모습의 산타만은 여타의 각색에도 좀처럼 탈색되지 않은 이미지였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선행에 힘쓰며 또한 그들을 위해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한 니콜라우스의 모습은 사실 성탄의 의미와도 잘 부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의 삶도 ‘소외받은 이들을 위한 선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오신 날에 산타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리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고 할 수 없는데도 왜 제 마음은 이리 편치 않은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산타의 그림에서 변조된 무언가가 하나 둘씩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우선 산타가 산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언급했듯이 그의 이웃에 대한 애정과 봉사에 있습니다. 즉 선물을 나누어주는 니콜라우스의 모습이 바로 산타의 원형인 셈입니다. 그런데 산타를 맞아들이고 있는 지금의 우리는 선물을 나누어주고 있는 니콜라우스의 모습이 아니라 선물을 받고 있는 나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니콜라우스가 되지 않으려는 상황에서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로만 채워지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니콜라우스의 자리는 거대 기업이나 상업주의로 치장한 각종 다양한 매체들이 차지하게 됩니다. 가지고 있는 돈만큼 우리는 니콜라우스의 선물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값없이, 돈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먹고 마시게 했던 니콜라우스의 모습은 이제 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세상입니다.


‘각자의 여유 있는 만큼의 자금을 가지고와 니콜라우스의 은총을 만끽하라!’


조금 아리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맞아들이고 있는 니콜라우스의 정확한 모습은 바로 그것일 따름입니다. 어디에도 공짜는 없습니다. 투자한 만큼의 응당한 대가를 기대하는 것은 세상의 논리로는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수없이 복잡하게 오가는 자본의 흐름 속에 산타의 이미지는 상업적으로 이용되며 이어지고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럽다 할 것입니다.


상황이 이쯤 이르게 되자, 저는 갑자기 산타의 이야기에서 마태가 전하고 있는 최후 심판에 대한 모습을 읽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심판의 이미지 중 가장 장엄하고 준엄한 그림을 지니고 있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나오고 있는 바로 그 심판의 모습이 제 머리 속에서 곧바로 산타의 이미지를 대체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그 사연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의 최후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모로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 중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 정도로 요약이 가능합니다.


그 첫 번째는 종말심판의 대상입니다. 사실 신구약 구석구석에는 여전히 유대중심주의적 시각이 강하게 박혀있는지라 이방인은 성서에서도 부정적이거나 속된 종족으로 그려집니다. 그래서 구원과 믿음의 주체도 대개는 이스라엘 종족으로만 국한됩니다. 그러나 오늘 마태는 우리에게 최후 심판의 대상은 이스라엘에게만 제한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전반부에 적혀있듯이 최후 심판의 자리에 참여하게 되는 사람은 특정부류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참석해야만 하는 종말심판! 바로 이 장엄한 그림을 마태는 선언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인자의 종말심판에 참여해야 한다는 이 선언! 우리에게 주는 무게가 그리 녹녹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심판을 향해 모이게 된 시점에서 다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심판의 기준입니다. 이것이 이 종말심판에 대한 비유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두 번째 의미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종말심판의 분명한 기준을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그것은 종교나 신앙도 아니고 기도와 예배도 아니며, 오직 불행한 이웃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들을 가련히 나의 마음속에 담아내는 행위, 그들을 애달피 여기는 정서, 긍휼히 여기는 심정으로 대표됩니다. 즉 이웃을 위한 내 삶의 진실도와 실행의 크기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짐을 이 비유는 확연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종말 심판의 잣대는 기존 우리가 입에 발린 듯이 외고 다녔던 ‘신앙고백이 종말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과는 적지 않은 괴리감을 줄 정도입니다. 그러나 같은 복음서의 다른 부분에 등장하는 마태의 진술을 살펴보면 그 괴리감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사실 마태 자신도 그의 복음서 10장 32-33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에 관해 고백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에 관해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도 같은 복음서 7장 21-23절에 기록되어 있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주님, 주님, 우리가 당신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당신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당신 이름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입니다. 그 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범법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하고 선언할 것입니다.”


위에 인용된 성서 구문을 생각하면 삶속에서 구현되는 실천적 신앙고백의 강조는 전혀 충돌되지 않는 지속적인 마태의 전승이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마태의 심판에 관한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종말심판의 기준을 잠정적으로 그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종말의 심판 기준 역시 신앙의 고백이긴 마찬가지이나 그 신앙의 고백이 언어 속에만 갇혀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굴레를 박차고 나와 신앙의 고백이 생활 속에 녹아있을 때에야 심판의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고통 받고 고난 중에 있는 이웃을 보고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신앙이란 의미 없다는 말이 바로 이 종말이야기가 전하는 핵심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니, 니콜라우스야말로 이 심판의 기준에 가장 적합한 증인일 수 있습니다. 평생을 이웃을 위해 헌신한 그의 이미지 속에 인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탄을 통해 기다리는 것은 선물을 우리에게 주는 산타가 아니라 선물을 주고 있는 산타가 된 우리여야 할 것입니다.


너무도 뻔 한 결론이 이미 나와 버렸지만, 말씀을 매듭짓기 전에 마태의 최후심판 이야기를 잠시만 더 붙잡아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흑백논리에 익숙해 있습니다. 흔한 말로 권선징악이 주는 통쾌함에 무척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종말심판을 하나의 영화로 생각하며 살펴본다면 흔한 할리우드식의 문법과는 다른 구조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희미한 선악의 구분입니다. 흔히 우리들 머릿속에는 양으로 비유된 선한 그룹과 염소로 비유되는 악한 무리들이라는 이분법적 구조가 자리하고 있을 터인데, 실상 꼼꼼히 살펴본 이 비유의 구조는 반드시 그들이, 즉 인자의 왼편에 세운 무리들이 악인이었다는 설명이 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진지하게 무언가를 찾고 있던 왼편 염소 무리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실성마저 읽어보게 됩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앞에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 잡게 할 것이다. 그 때에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은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또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 그들도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임금은 '똑똑히 들어라.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 갈 것이다.


이 이야기가 가감 없이 전해주고 있는 두 무리의 차이는 이웃에 대한 행위 바로 그것뿐입니다. 그 외에 그들이 범죄행위를 했는지 안했는지, 신앙적으로 불충분한 삶을 살았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비유는 상당한 경지의 고감도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먼저 인자는 오른편의 무리들에게 축복의 언어를 던집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그들이 바로 인자 자신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헐벗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심지어 감옥에 있을 때 그 사정을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 기준으로 왼편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음으로 저주의 언어를 접하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인자의 판결에 항소하고 있는 이 두 무리들의 변론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인자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변론합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 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리고 인자의 저주를 받고 있는 무리들도 거칠게 항의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심판을 받은 두 무리의 변론이 이처럼 동일하다는 사실이 무척 놀랍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언제 굶주리고 목마른 주님을 모른 체 했느냐?”는 저주를 받은 무리의 항변은 애끓을 만큼 사람의 마음을 진동하는 처절함으로 다가옵니다. 어찌 이 이야기만으로 그들을 악한 부류의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항변은 사뭇 진실을 담고 있고 또 절박하기까지 해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정말 굶주리고 목마른, 그리고 나그네 된 주님을 결코 만난 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항변을 통해 오히려 저는 그처럼 주님에 대한 절절했던 그들의 기대, 고행, 그리고 인내로 점철된 순례의 길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평생 그들은 그처럼 기다리던 주님을 만나기 위해 애쓰던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절절한 사연으로 주님을 찾지 않았던 사람의 입에서 그런 처절한 항소의 변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애절히 언제 우리가 주님을 만난 적이 있었느냐고 항변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평생 주님을 찾기 위해 애썼던 순례자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이 그렇게 큰 비약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 점에서 언제 우리가 주님을 도와주었느냐고 반문하던 첫 번째 축복받은 부류의 사람들보다 더 신실하고 진지한 삶을 살았던 이들의 모습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살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이처럼 억울함을 헤어날 길이 없어 쏟아내게 되는 항소의 말을 토해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야 말로 주님을 찾기 위해서 평생을 허비했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언제 당신이 굶주렸고, 언제 당신이 목이 말랐고, 언제 당신이 나그네가 되었고, 언제 당신이 헐벗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도대체 언제 당신이 병들었고 심지어 감옥에까지 갇혀있었습니까? 도대체 언제.... 왜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으십니까? 더군다나 세상의 임금이요, 인자요, 심판자로 오실 당신이 어떻게 굶주리고, 목이 마르고, 나그네가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될 소리를 하십시오... 차라리 주님께서는 우리들보다 저자들을 더 편애하고 있다고 단정하고 마세요! 애매한 착한 사람들 나쁜 놈들로 몰아가지 마시고.... 우린 평생 당신을 찾아 헤맸지만 당신의 그림자조차 만난 일이 없어요! 이거 사람 엉뚱한 일로 몰아세우지 마세욧!”


사실 왼편에 있었던 이들의 언어는 제가 옮긴 내용 이상의 더 절박하고 또 더 어처구니없는 그들의 억울함에서 터져 나온 항소의 언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으로 따져서는 오른편에 있던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는데도 자신들만 악마와 그 심부름꾼을 위해 마련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야만 되는 현실을 어느 누가 편히 앉아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그들 역시 막가는 인생으로 종을 친 사람들도 아니고 구석구석 심판의 왕으로 오실 주님을 찾느라 소중한 인생을 소진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론을 앞에 두고 즐거운 마음으로 영원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그들의 항변은 정당했고 또 마땅히 그렇게 변론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관은 이들의 항소에 정확히 답변을 해야 할 책무마저 있다고 해야 합니다.


“진실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지 않았을 때마다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심판관의 대답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심판관의 답변은 양쪽 무리 모두의 입을 틀어막았을 것입니다. 똑같은 항변에 똑같은 대답! 어느 유능한 작가가 이처럼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장엄한 심판의 언어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저도 몰래 제 주변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그마한 방 하나에 뭐 특별날 것이 없는 곳이긴 하지만.... 제 삶 속에서 혹시 놓쳐 버린 주님의 모습은 없나 하는 조바심 때문에 제 고개는 연신 저의 주변을 기웃거리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고정된 이미지로 오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요란스런 홍보와 함께 뜨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내 의식 속에 아니 내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곳에 누군가의 모습으로 나와의 만남을 계획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백 개, 천 개 혹은 만 개의 얼굴을 가지고 언제나 친근하게 혹은 귀찮게 우리 주변을 서성이듯 맴돌고 있는 분이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이 정도 진행되자, 저는 이제 마땅히 산타가 성탄의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곤란 중에 있는 이웃을 위해 최선의 삶을 산 바로 니콜라우스야 말로 성탄의 의미를 십분 살리는 최상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성탄 우리 모두 산타가 되었음 어떨까 생각합니다. 받는 즐거움보다 주는 기쁨의 포근함을 우리 모두 만끽하는 그런 날이 되었음 어떨까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이 애꿎은 주님의 고정된 이미지를 좇아 헤매기보다 분명한 우리의 이웃 속에서 주님을 느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또한 기도해 봅니다. 그토록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던 많은 이들 가운데 스며있는 주님의 체취를, 그의 내음을, 그의 그림자를 느끼는 예민한 신앙이 우리 가운데 가득히 넘쳐나기를 또한 기도해 봅니다.


여러분, 저는 다시 여러분께 제안합니다. 우리 산타가 됩시다. 비록 우리에게 반짝이는 빨간 코를 한 수사슴은 없어도, 멋들어지게 물들인 붉은 홍포가 없어도, 또 많은 이들을 위해 그득히 담아놓은 선물꾸러미가 없어도, 우리 한번 멋진 산타가 되어봅시다. 비록 준비된 많은 것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보다 멋진 산타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 잊힌 얼굴을 궁금해 하며, 그에게 혹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근심의 마음을 담으며 그의 연락처를 열심히 확인하는 우리의 손등에서, 즐거운 일이 생긴 이에게 찾아가 기쁨을 나누어 받는 우리의 정감 속에서, 혹 근심에 빠져 있거나 어려운 일이 생겨 낙담하고 있는 이들에게 관심의 언어와 애달픈 정서를 건네는 우리의 신실함에서 언제나 산타는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갇혀 지내는 내가 아니라 내 의식 속에 있는 모든 이들과 또 나와 관계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속에 있는 나의 모습을 그리며 그들의 내음과 음성, 웃음과 눈물, 슬픔과 걱정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나의 모습이라면 결코 산타와 멀지만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또 기원합니다. 눈이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만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산타가 되어 우리 이웃의 기쁨과 아픔을 공감하게 되기를, 또한 그러한 마음을 함께 나누게 되는 성탄이 되기를 저는 지금 간절히 기원합니다.


“I wish You a Merry Christmas!” 


이길용/서울신대 교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2017년 세종교양도서) 저자



* 빼앗긴 성탄절 http://fzari.tistory.com/1035

* 성탄전야의 유혈극http://fzari.com/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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