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벌레처럼 가는, ‘걷는 기도’(45)


걷기를 마치며


갑자기 배가 고팠다. 그동안은 일부러라도 허기와 친해지고, 거친 밥과 친해지고, 불편한 잠자리에 친해졌던 시간들, 그런데 일정을 모두 마치고 나자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오르듯 허기가 밀려왔다.


인근에 있는 식당을 검색해서 찾아갔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먹으라 했다고, 당신이 사는 것이라며 아내는 장모님의 뜻을 전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라는 말 한 마디면 족했다. 무얼 먹어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 그런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식당으로 가는 길, 뭔가 이상했다. 규민이가 차를 운전하는데 자동차의 속도가 낯설게 다가왔다. 두 발로 걷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너무나 쉽게 너무나 많은 것들이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기도 전에 너무 사라지고 있었다.


더없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포 사격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땅의 아픔과 상처는 그런 것이었다.


삶에도 속도가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도 빨리 달리고 있었다. 달리지 않으면 뒤쳐진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살고 있는 것이었다. 빨리 달리는 것이 성실이지 미덕이라고, 남을 앞서는 것이 성공이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것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인 채 죽어라 앞으로만 달리며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것들을 그냥 지나쳐 간다. 길가에 핀 키 작은 꽃이나, 수풀 사이의 메뚜기, 땅 위를 기어가는 개미나 그들을 노리며 깔때기 모양의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개미귀신, 마른 가지에 앉아 날개를 접은 잠자리에 눈길을 주지 못한다. 한 아이의 해맑은 눈동자나 지친 노인의 눈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밤하늘의 별자리와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는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별똥별이 날아간 곳과 무지개가 뿌리를 내린 자리에 꿈을 새기던 설렘도 더는 남아 있지를 않다.


삶의 속도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어쩌면 열하루 동안의 걷기가 준 선물 중에는 삶의 속도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시선도 있었다.


길을 걷는 동안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았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열하루 동안의 로드맵을 짜고 내내 마음으로 걱정하며 동행을 한 함광복 장로님께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누구보다 분단의 땅(DMZ)을 가장 많이 밟은 사람, 우리 가까이 있는 ‘거룩한 땅’(聖地)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마음 아파하는 분이시다.


먼 길을 기꺼이 달려와 격려와 위로, 힘과 용기를 전해주신 분들께도 감사를 드린다. 화인(火印)처럼 마음에 남아 있을 만남, 인생이라는 길에서 만난 멋진 동행으로 기억될 것이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함께 걸었던 분들께야 뭐라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열하루 동안의 숙박비에 해당하는, 생각지 않았던 봉투를 건네준 태건상사 김만석 사장님의 따뜻한 마음도 마음에 간직한다.


길을 걸으며 만났던 모든 이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소소한 만남이라도 모두가 소중한 만남이었고, 밤하늘을 밝히는 별들처럼 열하루 길을 의미 있게 해 준 고마운 이웃들이었다.


마음으로 동행하며 응원을 보내준 벗들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들이 있어 나는 혼자 걸으면서도 혼자가 아닐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걷는 동안 찍었던 사진을 보며 일정을 되돌아보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중간 중간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이 전부였는데, 사진 중에는 마지막 날 장파리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가족들을 만났을 때 규민이에게 사진을 한 장 찍어달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워낙 사진 찍는 걸 싫어해서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도망을 치곤했었다. 그런 내가 나를 찍는 것은 더욱 어색한 일, 생각해 보니 걷는 동안 나를 찍은 사진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한 장쯤은 남겨두면 어떨까 싶어 부탁을 한 것이었다.


일부러 뒤로 돌아섰고, 규민이는 내 뒷모습을 찍었다. 얼굴 대신 신발 두 개가 배낭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찍혔다. 그런데 그 사진에는 사진을 찍을 때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 사진 속 하늘의 한 부분이 범상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찍을 때는 몰랐던, 나중에야 빛의 형상을 보며 깜짝 놀랐던 사진. 

그동안 수고했다며 손을 흔드시는, 내게는 영락없는 주님의 모습이었다.


뒤로 돌아선 내 머리 바로 위에, 잔뜩 흐린 하늘 한복판에 빛의 공간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검은 하늘 사이로 남아 있는 빛의 형상을 확대해서 보니 떠오르고 있는 아침 해와 그 해와 접해서 생긴 공간이었다.


그 빛은 선명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빛이 만들어내고 있는 형상은 누군가가 서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영락없는 주님의 모습이었다. 빛나는 옷을 입으신 그 분이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수고했다고, 기도의 시간을 가져 고마웠다고, 나는 늘 너를 따라다니며 너를 지켜보았다고, 빙긋 웃으며 손을 흔드시는 빛의 형상, 내게는 부인할 수가 없는 주님의 형상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핑 돌았다. 열하루 동안 내내 나와 동행하셨던 분은 주님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할 때에도 내 등 뒤에서 묵묵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분, 내가 보낸 모든 시간 속으로 그분의 사랑이 짙게 스며들었다.


열하루 동안 홀로 걸었던 걸음 걸음을 기도로 받아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해진 이 땅을 주님이 손수 기워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좋은 길을 안내해주어 고마웠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을 때, 함광복 장로님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셨다.


<아! 해내셨습니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마시고 푹 주무십시오. 하나님이 한 순간도 안 놓치시고 목사님 돌보셨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무탈(無頉)의 장정이 가능했을까요.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동안 감동의 장정을 하신 목사님 감사합니다.>


장로님의 마음은 내 마음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감사했다. 정말이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철조망과 지뢰가 허리를 두르고 있는 아픔의 땅 DMZ를 따라 홀로 걸었던 열하루 동안의 걸음걸음을 부디 기도로 받아주시기를 빈다. 갈라진 이 땅을, 너덜너덜 어처구니없이 해진 이 땅을 주님께서 손수 주님의 손으로 기워주시기를 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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