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영의 구약지혜서 산책(14)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하나님은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실까. 착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 구별 없이 느닷없이 닥치는 자연 재해나 대형 참사들, 그리고 대학살(홀로코스트)같은 어마어마한 고통을 어떻게 설명할까. 때때로 인생과 세상사는 인간의 빛나는 지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봉착하곤 한다. 때문에 누군가는 고통과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 사이에서 방황한다.


해롤드 쿠슈너(Harold S. Kushner)라는 랍비는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 때』(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책으로 남겼다. 8개월 된 아들 아론의 ‘조로증’ 때문에 겪었던 고통과 내면의 문제들을 진솔하게 표현했다. 젊은 랍비는 인생의 고통의 경험이 많지 않았지만, 아들의 질병 때문에 무자비한 시간을 견딘다. 그는 아들의 질병이 조로증이라는 의사의 진단을 듣고,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어”라며 몇 번을 되 내었다. 그러고서 그는 아들 아론을 위해 생일 마다 축하파티를 열지만, 젊은 랍비 부부에게 아들의 생일잔치는 아들의 살아갈 날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부부는 부모보다 먼저 늙어가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순간들을 견뎌야했다. 그리고 끝내 아들 아론은 14번째 생일 이틀을 앞두고 부모 곁을 떠났다(1963-1977). 젊은 랍비가 아들을 회고하며 책을 쓴 이유는 단순했다. 고통에 대한 전문적인 신학적 해석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인간의 고통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아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젊은 랍비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악이 발생하는지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고통의 문제를 자신의 신학적인 지식으로 설명하려들지 않았고, 고통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지극히 의로웠던 의인 욥에게(욥기 1:1), 생애 어떤 날도 부끄럽지 않기를(27:6) 원했던 그에게 닥친 재앙들은 완벽했던 그의 삶을 산산조각 냈다. 경건한 욥은 왜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이 닥쳤는지 알 수 없었다. 흔들림 없이 견고했던 욥은 끔찍한 육체적 고통과 사회적인 고립 앞에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죽음을 갈망하기에 이른다(3장). 열 명의 자녀들이 혹시 모를 마음의 죄까지 염려하며 번제를 드릴정도로(1:5) 신중했던 그였지만, 아니 너무 지나치게 강박적 신앙인 같았던 그였지만, 그도 흔들렸다. 죽기를 갈망하며 자신을 저주하는 욥의 탄식 앞에서 욥의 친구들은 인간의 고통은 죄 때문이라는 판단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더군다나 친구들은 욥의 죄를 집요하게 추궁했다. 도시의 오물더미처럼 버려진 욥이(2;8) 깨진 우정 앞에서 얼마나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끝까지 그는 자신의 결백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도 하나님은 왜 충실한 종에게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고통은 죄의 결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통의 원인자는 하나님


하늘 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욥이지만, 적어도 자기의 고통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의 말은 과감하다. 솔직하다.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6:4, 개역개정)


욥은 자신이 전능자의 원수 같다고 느낀다. ‘욥’이라는 이름의 뜻이 ‘핍박 받는 자’, ‘미움을 받는 자’, ‘대적자’라는 뜻 말도고 다양하게 전해지긴 하지만, 그의 이름이 그의 존재 자체가 된 셈이다. 욥은 고통당하며 친구로부터 위로를 얻지 못하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최후의 은총을 기대할 뿐이다. 거룩하신 분의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하는(6:10) 욥. 친구들은 이런 욥이 건방져 보인다.


욥도 자신이 왜 고통당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다. 친구들의 집요한 추궁, 숨 막히듯 조여드는 통증의 괴로움, 깨진 우정의 상처는 하나님을 향해 거침없는 항의로 이어졌다. 욥은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사이의 긴장 속에서 양가적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하나님을 규탄하면서 동시에 절대적인 통치자 하나님을 찾는다. 욥은 왜입니까? 라고 묻기도 한다(7: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님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님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7:20, 새번역)


욥은 고통을 견디며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지만, 친구들은 다르다.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의라고 확고하게 믿는 빌닷은 전통주의자였고, 신학적인 전통이 모든 것을 구원할 것처럼 말했다. 빌닷은 욥에게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우라’(8:8) 한다. 빌닷의 말처럼 지혜 전통과 유산은 귀하다. 하지만 그 유산을 빛내줄 새로움이 없다면 전통주의만 남을 뿐이다. 기독교 역사학자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Jan Pelikan, 1923-2006)이 “전통은 죽은 자들의 살아 있는 믿음이지만, 전통주의는 살아 있는 자들의 죽은 믿음”이라고 했던 한 문장, 깊이 새겨 봄직하다. 전통은 새로운 환경에서 재해석되지 않으면 가치를 잃게 된다.


빌닷은 욥에게 청결하고 정직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돌보실 것이고(8:6),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8:9, 개역개정) 말하기도 했다. 너무도 유명한 이 한마디! 말 자체는 그럴듯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도 때에 맞는 말이어야 가치 있는 법. 욥에게 어떤 위로도 주지 못하는 친구들의 말 말 말! 욥은 친구들이 가하는 보응교리 때문에 괴로워하며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없음을 탄식한다(9:32-33). 욥의 솔직한 발언을 문제 삼아 친구 소발도 회개를 촉구한다(11장). 친구들에게 욥은 고난당하는 자가 아니라 죄인이다. 그러니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11:14) 그러면 ‘네 생명의 날이 대낮처럼 밝은 것이라’(11:17)는 등등의 약속을 한다. 엘리바스도 욥에게 회개하면, 겸손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며 약속의 말들을(22:21-30) 쏟아낸다.


욥의 친구들처럼 우리가 한 가지 신학적인 확신만 있다면, 그런데 그 확신이 틀렸다면 어떡할까?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신비한 일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죄 없이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들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욥의 친구들처럼 고난의 신비를 인식할 수 없다면, 내가 아는 진리에만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빠져 모르는 것은 안중에도 없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에게 비난과 혐오로 맞대응하게 된다.


경건하고 착한 사람에게 닥치는 곤경을 누가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것 하나 있다면, 고통은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지 간에 만사가 잘 돌아간다는 환상을 깨고, 사람이 창조자 하나님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리는 시간 아닐까. 인간중심적인 사고에 균열을 가져오는 시간 아닐까. 하나님의 손이 짧아 예수님을 십자가의 고통에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 아니듯, 고난은 하나님의 버려둠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또 하나의 길 아닌가.


김순영/ 《어찌하여 그 여자와 이야기하십니까?》저자, 대학원과 아카데미에서 구약 지혜서를 강의하며 신학과 현실의 밀착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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