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


19권의 저서와 10권의 번역서를 낸 김기석 목사가 스무 번째 책을 출간했습니다. “무심한 듯 지나치는 것 같으면서도 깊숙이 응시 하는 성찰의 힘”에서 나오는 문장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에 가능한 일이지 싶습니다. ‘김기석 표 문장의 아름다움’을 생략한 서평이나 독후감을 아직 보지 못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최근에 나온 《인생은 살만한가》에서 김기석 목사는 “바늘로 우물 파는 행위에 빗대 설명했”던 오르한 파묵의 목소리를 빌려, ‘무모한 열정의 글쓰기’와 그것이 가져다 줄 ‘바위에서 솟아오를 샘물에 대한 기대’를 말했습니다. 그렇게 글을 써왔으니 아름답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모두가 김기석의 문장을 이야기하다보니 이젠 그런 찬사가 진부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문장 앞에 멈춰 섰던 순간들을 완전히 지우고 이 글을 쓸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편집자가 허락한다면 이 서평의 나머지 부분을 김기석이라는 작가의 문장으로만 채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인생은 살만한가》는 두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아내, 딸, 신학대학 동창, 청년 등과 나눈 12편의 ‘대화’가 3분의 2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11편의 ‘편지’입니다. ‘대화’와 ‘편지’를 읽을 때 제 몸은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저자가 12편의 대화는 안단테 템포로, 11편의 편지는 그보다 조금 빠른 안단티노나 모데라토로 템포를 지정한 것처럼 책을 읽었습니다. 대화편에서 왜 몸이 더디게 움직였는지는 책을 덮을 때까지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사실 김기석 목사는 느림이 “우리의 문명병을 치유해주는 가장 소중한 요소”라는 점을 거듭 말해왔습니다. 이 책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시대의 점점 더 빨라지는 템포가 “전체에 대한 매혹과 어울림의 감성을 빼앗아 갔”다면서 ‘바로 이런 것이 타락’(245쪽)이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문명의 템포에서 타락을 읽어내는 저자이기에 우리 독자들은 가장 느린 아다지오나 라르고 템포로 이 책을 읽어야 할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내와 산행 중에 주고받았던 “나는 내가 당신의 영웅인 줄 알았는데… 아이구, 참 내. 그래요. ‘당신을 나의 영웅으로 임명합니다.’(204쪽)란 발랄한 대목까지 안단테로 읽을 독자는 없겠지요.


김기석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로 그의 빼어난 문장을 꼽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런 주장에 머리를 끄덕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미문(美文)이 아니라 그 문장에 담긴,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더 귀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원색적인 이원론은 물론 교묘하게 자신을 위장한 변종 이원론에 격렬하게 휘둘렸던 교인들에게 ‘모든 이원론적 선택에는 억압이 내포되어 있다’(83쪽)는 목소리는 거의 복음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도 사랑의 노래를 지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야. (중략) 고통 받는 사람들의 아픔에 함께 아파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불러야 할 아름다운 노래를 포기해서는 안 돼.(17쪽)


저는 오히려 현실이 난마처럼 얽혀든 시대일수록 경전을 깊이 파고드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102쪽)


김기석을 읽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그의 글이 모두가 멈춘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지네딘 지단과 함께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피에르 신부의 《단순한 기쁨》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청년 조르주가 새 인생을 살게 된 과정이 소개됩니다. 조르주는 피에르 신부가 자신에게 돈이든 일이든 그저 베푼 게 아니라 자기에게 꼭 필요했던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줬기 때문에 자살의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김기석은 이 감동적인 이야기 끝에 “인간은 누구나 ‘원본’으로 태어났다”는 랍비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을 상기시킵니다. “남과 구별되길 원하면서도, 같아지지 않으면 불안”해 하는 사람들에게 “이 우주 가운데 나와 똑같은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느끼는 경이감을 전한 것입니다(236쪽).


그리고 ‘기억과 망각 사이’는 한국 개신교가 거짓 종교의 특징인 망각의 전략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왜곡된 기억의 주입을 경고하는 글입니다. “친일파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역사의 변방에 유폐”되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역사적 소명은 ‘망실된 기억의 복원’과 ‘왜곡된 기억의 바로잡음’이라는 것입니다(158쪽). 김기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거는 과거로 흘러가 버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게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야.(159쪽)


저는 이 책에서 이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소중한 가치로 ‘아낌’을 말하는 대목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기석은 생태계의 파괴가 가속화되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서 ‘아낌’을 절실한 도전으로 인식합니다. ‘아낌’이 예수가 보여준 삶의 핵심이고, 사람을 아끼는 것이 참 삶의 시작(313쪽)이라는 것입니다. 김기석은 아낌이야말로 우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지름길이라면서 “예수의 마음, 즉 ‘아낌’이라는 단어 하나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라”(317쪽)는 부탁으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노자가 오래 전에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 한 것이 없다’는 말을 한 건 맞지만 현직 목사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단어나 개념을 차용하지 않고 예수가 보여준 삶의 핵심을 이야기한 부분이 고맙고 놀라웠습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끊어낼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이들로 인해 생겼던 어두운 일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이 고마운 이유입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관계망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기도 합니다. 일상은 우리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일 수도 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주고받는 사소한 눈짓, 몸짓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명멸하는 불빛입니다. 그 불빛들이 모여 생을 이루는 것이겠지요?(275쪽)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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