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6)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7 예수를 위한 대명사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 부터 2018년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몇 년 뒤에 끝나게 될지 모르겠지만 매 년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 순례를 계속해서 연재 하도록 하겠습니다. 몇몇 분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조용히 따라 걸으며 마태수난곡을 묵상하려는 마음으로 이 연재를 시작했는데 올해에는 다소 갑작스레 평화교회연구소의 요청으로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40일간의 영적순례’라는 작은 사순절 묵상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40일 동안 마태수난곡 전 곡을 QR코드를 통해 들으며 묵상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물론 이 자리에서 나누는 것만큼의 이야기를 이 작은 묵상집에 다 담을 수는 없었지만 이 책을 통해서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마태수난곡의 전 곡을 만나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고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순례를 위한 작은 가이드북으로 쓰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순례의 길로


그럼, 계속해서 순례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만나게 될 곡은 베다니의 시몬의 집에서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오늘은 이에 대한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만나보겠습니다.

두 번째 시간에 설명 드렸듯이 마태수난곡은 내러티브, 대사, 코멘트, 기도라는 네 명의 화자들이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며 오늘의 코멘트 레치타티보를 부르는 성부는 알토입니다.


알토의 목소리


여성 목소리의 저성부인 알토는 모성과 슬픔과 공감과 눈물을 상징합니다. 일반적인 오페라나 오라토리오에서 소프라노가 여성성과 기쁨과 사랑과 미소를 상징하고 테너가 열정을, 베이스가 남성다움과 진중함을 표한 것처럼 마태수난곡에서도 각 성부의 음색은 고유한 표현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녀에 대해 ‘한 여자’라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인지 비슷한 별개의 사건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누가복음 7장 37절은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좀 더 상세하게 그녀를 설명하고 있는데 사회적 약자로서 세상에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왔고 인간으로서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었던 이 여인의 장면에 어울리는 목소리는 알토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화자를 이 베다니 여인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우리 자신이라고 할 수 있지요. 마태수난곡에서의 각 성부의 음색은 우리 안에 있는 감성적 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가사를 살펴보시겠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5번

5

코멘트

레치타티보

알토

Du lieber Heiland du,

Wenn deine Jünger töricht streiten,

Daß dieses fromme Weib

Mit Salben deinen Leib

Zum Grabe will bereiten,

So lasse mir inzwischen zu,

Von meiner Augen Tränenflüssen

Ein Wasser auf dein Haupt zu gießen.

사랑하는 구주여

당신의 제자들은 어리석게도

이 고귀한 여인이 향유를 가지고

당신 몸의 장례를 준비한 것을 막았지만

부디 제게는 허락하소서.

나의 눈에서 넘쳐흐르는 눈물방울들을

당신의 머리에 뿌리게 하소서.



‘du’의 시적의미와 관계적 의미


레치타티보의 시작 부분에서 노래하는 이는 예수를 ‘Du lieber Heiland du/사랑하는 구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와 예수가 이미 구원을 통한 사랑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지요. 문자적인 우리말로는 이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습니다만 독일어 가사에는 ‘너/당신’에 해당하는 의미인 ‘du'가 두 번 반복됩니다. 이는 시적으로나 관계적으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먼저, 시적인 면에서 화자는 ‘du’를 두 번 강조하여 표현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이, 나의 구원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예수뿐이라는 표현이지요.


관계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예수를 대명사 ‘du’를 사용하여 칭했다는 것이 의미가 깊습니다. 영어에서는 2인칭 대명사가 ‘you’하나 뿐이지만 독일어에서는 우리말의 ‘너’와 ‘당신’의 차이처럼 2인칭 대명사로 ‘du/두’와 경어 ‘Sie/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노래 알토의 코멘트에서는 예수님께 경어체인 ‘Sie’ 대신 ‘du’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참으로 낯선 풍경입니다. 하지만 ‘du’라고 해서 우리말과 같은 반말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du’는 친근함의 표현, 관계가 맺어진 사이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서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도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면 ‘du'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와 그로 인한 경직성은 엄격한 존댓말 때문에 쉽게 허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직위에 상관없이 서로를 닉네임이나 영어이름으로 편안하게 부르면서 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회사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신앙의 맥락이 아님에도 예수라는 이름 뒤에 ‘님’을 붙이지 않았다며 시비를 거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예수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높이기 위한 그 분들의 신앙과 정성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럴 때면 굳이 그분들을 설득하거나 항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 뒤에 무조건 ‘님’을 붙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예수와의 친밀함의 관계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시간만큼은 이 부분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다루고자 합니다. 실재로 ‘님’자에 집착하는 분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권위적인 모습을 띄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님’자에 대한 집착이 단지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


다른 종교와 차별되는 기독교의 가장 특별하고도 경탄스러운 부분은 신이 인간이 되어 우리에게로 내려왔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신과 대결을 하든, 불교처럼 자기 수행을 통해서든, 무속신앙처럼 무엇을 바치거나 간절한 기도를 하든 이러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이 신을 향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노력 없이, 오직 은혜로 신이 인간을 향에 먼저 내려온 종교는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과 인간이 이토록 가깝게 연결된 종교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 놀라운 사실을 믿고 영접하면 됩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십자가의 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육신의 고통, 배신, 홀로됨, 인간으로서 인간이 받아야할 극도의 고난을 주님께서는 다 당하셨습니다. 우리와 똑 같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헨리 나우엔의 표현대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기 위함이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친구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여러분과 공통분모가 있을 것입니다. 그 공통분모를 통한 공감이 우정으로 연결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부사이 보다 더 비밀이 없는 관계가 친구사이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말구유에 오신 이유도,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도, 부활하신 이유도 우리에게로 내려 오사 우리 안에 거하시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고 본디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기독교는 원래 이처럼 세상의 생각을 뒤집어 하나님의 뜻을 펼쳐내는 품격 있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창 18:17)과 모세(출 33:11)를 친구처럼 대하셨듯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기 원하십니다. 예수께서도 그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기 위해 먼저 우리와 친구 되어주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


시편 25편 14절은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유진피터슨은 이 구절을 ‘God-friendship is for God-worshipers’ 라고 읽었습니다. ‘프렌드쉽/friendship’은 말 그대로 ‘우정’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정서상 ‘하나님과의 우정이 그를 예배하는 사람에게 있음이여‘라고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어 이름으로는 상사를 편하게 부를 수 있는데 한국 이름에는 그 뒤에 직함과 ‘님’자를 꼭 붙여야 하듯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프랜드쉽’은 사랑만큼이나 중요한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 도무지 깨닫기 힘들어하는 이 관계를 우리는 알고 체험해야합니다.


마르틴 부버는 그 유명한 ‘나와 너/Ich und du’라는 짧은 책을 통해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와 ‘나와 너/ich und du’라는 인격적인 관계를 설명하였습니다. 부버는 ’만남의 신학자‘로 알려져 있는데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이야기했지요.


부버의 방식으로 생각 해 보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인지는 모르지만 이 노래를 부르는 이는 예수를 만났고 그 만남과 이어지는 만남의 연속을 통해 그와 ’나와 너/ich un du'의 관계를 맺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의 시작에서 ‘Du lieber Heiland du’라고 ‘du’를 두 번 강조하여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님’이라는 글자에 집착하다보면 예수와의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들어가지 못하고 ‘저 멀리 있는 신’과 ‘하찮은 피조물’과의 관계인 ‘나와 그것/ich und es’의 관계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태 수난곡에서 이 베다니 여인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이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이 곡의 다음 장면에서 가룟 유다는 예수를 부를 때 ‘랍비’라고 부릅니다. 유다는 끝까지 예수를 ‘du'로 만나지 못했고 ‘es'로 대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잘못은 여기에서 시작했습니다. 예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느냐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와 어떤 관계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는 그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면 된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만남이고 관계입니다. 예수는 여러분에게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과 삶을 위한 ‘es'입니까? 아니면 아직 친밀함의 관계에 이르지 못한 ‘Sie’입니까?


우리는 예수를 ‘du’로 만나고 그렇게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조건 때문에 이루어진 관계가 아니라 친밀함의 관계를 맺어 나가야합니다. 'es'도 아니고 ‘Sie'도 아닌 ’du'로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상호적인 것입니다. 사실, 그 만남은 예수께서 먼저 다가오심으로 시작하였습니다. 성육신 사건과 그 분의 말씀과 삶, 그리고 죽음의 과정까지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와 ‘ich und du'의 관계를 맺기 위한 선제적인 다가오심이었습니다. 이 수난곡 속에서 예수께서 우리가 당해야 할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를 친구, ‘du’로 만나 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앞서 우정에 관해 말씀드렸듯이 당신과의 친밀함의 관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기 위해 예수는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것을 다 겪으셨던 것입니다.


‘고귀한 여인/fromme Weib’


이 레치타티보에서 한 가지 더 살펴 볼 것은 노래하는 이가 이 여인을 ‘고귀한 여인/fromme Weib’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누가복음 7장 37절은 이 여인을 ‘그 동네에 사는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마태수난곡에서는 ‘고귀한 여인’이 되어 있습니다. 죄 많은 한 여인을 고귀한 여인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기독교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는 예수를 ‘나와 너/Ich und du’의 관계로 만나 그것을 ‘프렌드쉽/friendship’이라 하건 ‘우정’이라 하건 ‘친밀함’이라 하건 간에 그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머무르면서 어떤 비밀도 서로 없는 대화를 나누고 공감대를 나누는 가운데 현실로 펼쳐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내 안에 거하는 상태 말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낮은자리 믿음교회 담임으로 목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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