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어귀의 느티나무처럼


대만신학자 송천성은 어머니를 가리켜 ‘하나님의 공동 창조자’라 말했다. 생명을 낳아 기르는 행위의 소중함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날이 갈수록 그 말이 실감난다. 현대문명은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고, 그 욕망의 폐쇄회로에 갇힌 이들은, 기쁨을 누릴 줄 모른다. 이웃은 신이 보내주신 선물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경쟁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합리성과 효율이 최상의 가치로 대접받는 세상에서 삶은 부박하고 공허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마음 내려놓을 곳을 몰라 방황한다. 고향 상실, 안식 없음이 지금 우리 삶의 실상이다. 괴테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구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아니라 여성적인 것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여성적인 것이 대체 뭐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긴 하지만, 생명에 대한 감수성과 관계 지향적인 공감능력을 가리킨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지난 시절 여성들은 주체로 살기보다는 남성 중심 사회의 객체처럼 살아왔다. <씨알의 소리> 1978년 5월호에 실린 함석헌 선생의 ‘씨알에게 보내는 편지’ 제목은 “나야 뭐“였다. 함 선생은 아내 황득순의 죽음을 알리면서 그의 삶을 ‘나야 뭐’라는 말로 요약했다. “먹을거나, 입을거나, 뭣에서나, 자기는 늘 빼놓으면서 늘 하는 말의 첫 머리가 ‘나야 뭐……’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여인들의 삶이었다. 다른 이들을 위해 자기를 지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삶 말이다. 지금은 세월이 달라졌다. 여성들은 더 이상 객체의 자리에 머물려 하지 않는다.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다. 그런데 주체가 된다는 것이 곧 외로운 단자로 살아간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주체는 다른 이들과의 창조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유연한 존재가 아니던가.



김명현 선생님은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주체라 할 수 있다. 젊은 시절 공부한 신학을 자양분 삼아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지속해왔다. 교회갱신을 위한 헌신, 여성들의 권익과 지도력 개발을 위한 활동에서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긴장을 해소시키는 건강한 유머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가정생활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가정생활이야말로 바깥에서의 활동을 가능케 한 생명의 묘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속성을 돌봄, 존경, 지식, 책임이라 했다. 김명현 선생님은 그러한 사랑의 좋은 예이다. 가끔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표정과 말 속에 배어있는 남편에 대한 아낌없는 신뢰와 사랑은 곁에 있는 이들을 가만히 미소 짓게 만든다. 부부는 서로 돕는 배필이어야 한다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분들이다. 두 아들에 대한 존중과 신뢰, 그리고 손자 손녀들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은 실답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제 몫을 톡톡히 해내며 사는 것은 어쩌면 이 가없는 사랑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그렇지 않다고 부인할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어제도 오늘도 마을 어귀를 지키며 찾아오는 모든 이들을 차별하지 않고 맞아주는 품 넓은 느티나무를 닮아가고 있다.


민영진 박사님과 함께 걸어온 50년의 세월을 회고하고 또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이 글 모음집에는 배꼽 빠지게 만드는 웃음, 아련한 아픔, 그리움,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가 넘실거린다.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비근한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장엄한 명분을 붙드는 것보다 거룩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께서도 일상의 일들 속에서 깃든 하늘나라의 광휘에 주목하시지 않았던가. 코헬렛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그렇다, 우리의 한평생이 짧고 덧없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니,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요, 좋은 일임을 내가 깨달았다! 이것이 곧 사람이 받은 몫이다”(전도서 5:18).


우리의 영원한 중심이신 그분의 마음에 당도하기까지 몸 성히, 마음 성히, 잘 지내시기를 빌고 또 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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