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기석 목사님께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by 한종호 2018. 10. 29.

작은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쓰신 편지들을 읽으면서 저는 그 속에서 제 이름이라도 호명될 것 같은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의 수신자가 되어 있었음을 고백하고 싶습니다. 답글 한번 보내드리지 못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제 입장을 지지해주실 너그러움을 잊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누군가의 처지를 살피는 마음이 유난하신 분이기에 제 처지는 언제나 선배님의 시야 안에 놓여 있음을 많은 편지들 속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들녘

 

「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에서 유년시절에 들었던 소리들을 표현해 주셨네요. 그 대목에서 제 심장이 그 소리들을 따라 요동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많은 소리들을 따라가다가 그만 울컥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보글보글’ ‘자작자작’ ‘탁탁’ ‘사르륵사르륵’ ‘솨아솨아’ ‘똑똑똑’ ‘꿀꿀꿀’ ‘구구구구’ ‘컹컹’, ‘참새, 직박구리, 꾀꼬리, 뻐꾸기, 꿩, 멧비둘기, 뜸부기, 부엉이, 소쩍새 등 각종 새울음소리들’, 다듬이질 소리, 새 쫒는 소리, 알밤 떨어지는 소리, 얼음장 깨지는 소리, 문풍지 떠는 소리 …(69-72쪽).

 

어릴 적 들었던 기억속의 소리들이 거기에 있었고, 그 소리들은 단지 추억이 아닌 한 사람의 존재의 모양을 만들어낸 소리들로 느껴진다는 말씀에 제 마음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 소리들이 그리워 시골에 내려와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소리와 함께 그 소리를 내는 어른이나 듣는 아이들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농촌현실에서 절망을 느끼곤 합니다. 그 소리들은 인간의 삶의 원형에 닿아 있고 생성과 소멸 너머에서 들려지는 영원의 편린과도 같은 소리라고 해석해 주실 때는 그 그리움의 의미와 양이 배가되어 울적한 심정으로 한참 동안 마음이 정지해 있었습니다.

 

농촌에 내려와 처음 만났던 이곳의 들녘은 지금은 더 이상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죽음의 지경에 빠져 있습니다. 들녘에서 허리를 굽혀 일하던 농부들의 모습과 그들이 일을 하면서 서로 부르는 소리와 노래는 더 이상 들판의 메아리가 되지 못합니다. 돌담 너머로 넘나들던 소리들과 동구 밖에서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나누던 이야기 소리는 그친지 오래입니다. 농번기에는 사람을 대신하여 농기계소리가 벌판을 휘젓고 있을 뿐이지 사람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25년 전 이 벌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만났던 어른들이 모두 떠난 지금 외로움을 벗 삼아 홀로 벌판을 지키는 심정이 참담합니다. 씨앗의 이야기는 종묘상이 빼앗고 갔고 노동의 이야기는 농기계에 빼앗겼습니다. 수확의 기쁨은 외국산 농산물에 치여 더 이상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합니다. 피폐해진 농촌 모습의 결론은 이야기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까지 왔습니다. 수백 수천 년 대지를 바탕으로 이어온 농민들의 이야기 소리는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어릴 적 들었던 그 소리들을 아직도 기억해내고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그 마음에 고요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번잡한 도심의 폭력적 소음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현실에서 그 옛날 고요함의 흔적들을 끌어올려 소란스런 일상을 정화하고 삶의 관점을 전환시키는 모습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단지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고요함 속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들에 귀 기울일 수 있는 힘이야말로 사람이 가진 능력 중에 어쩌면 가장 고귀한 능력일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지요? 세미한 소리 가운데 소명을 위임하시는 분 앞에서 귀가 열린 채로 살아갈 수 있기를 다짐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추방당한 이들의 작은 소리와 광야로 내몰린 이웃의 소리에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고,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일이라고 일침해 주셨습니다. 상대의 말 못하는 작은 소리까지 알아들으려면 우리의 내면은 얼마나 고요해야하는지를 생각해 봅니다. 또한 신음하는 이들의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라면 얼마나 괴로운 사람이겠습니까? 그런 소리를 듣는 사람의 삶의 무게는 얼마나 무거울까요? 정작 고요함 속에 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초월적인 평온함이 아니라 아픔을 겪고 있는 이웃의 절규인 세상이니, 그 괴로움으로 몸과 마음이 성치 않은 상태를 견뎌내야 하는 깨어있는 이들의 사정을 헤아려 보게도 됩니다.

 

세례요한이 자신을 일컬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했을 때 광야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을 것인지 짐작해 봅니다. 그 소리가 세례요한의 운명이 되었을 것입니다. 굽은 길을 곧게 하면서 주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는 음성을 접한 사람이 어떻게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명을 받는 자리에 어김없이 들려지는 소리는 결코 달콤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성서의 여러 소명자들을 통해 알게 됩니다. 동포들의 애타는 절규를 결코 그 마음에서 씻어낼 수 없었던 모세에게 결국은 힘겨운 소명이 주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고요한 광야에서 일체의 번잡한 소음을 차단한 채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공생애를 시작했던 예수님의 길이 어땠는가를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스러운 공간

 

보내주신 「나는 일필휘지를 믿지 않는다」는 편지에서 공간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새겨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3초 이내에 대답할 수 있는 절실한 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마침내 거룩한 공간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라고 대답해 주신 이야기가 제가 가는 길을 환히 비춰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 십 수 년의 노력을 지속해 오면서 공간 하나를 만들고 있는 저로서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요즘은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 우리의 사유와 삶의 방식을 결정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공간에 들어서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종교시설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거룩의 현존 앞에 서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77쪽).

 

유럽여행 중에 만난 성스러운 공간에서 마치 영혼의 고향에 당도한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셨지요? 그 공간을 쉽게 떠날 수 없어서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었고, 또한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서러움이 찾아왔고 부박한 실존이 떠올라 눈시울이 시큰해졌다고요? 그리고 그때 하나의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하셨네요. 들어서는 순간 신의 현존 앞에 선 듯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를 돌아보도록 만드는 공간,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 공간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치유를 경험하게 되는 공간을 갖고 싶다고 말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 속에서 한 영혼의 순례자를 만났습니다. 마음 둘 곳 없는 이 세상에서 휴식처를 갈급히 찾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문명이 주는 편리함 안에서는 좀처럼 쉼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 조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영혼의 순례자들은 쉼을 얻을 수 있는 장소를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거룩함과 고요함으로 충만하여 그 감동이 사람의 영혼에까지 스며드는 장소를 말입니다. 세상의 소요를 잠재울 만한 힘이 있고, 현재를 태초와 이어주며, 가던 길 멈추고 자신을 정비하고 충전할 수 있는 장소를 저 역시 순례자의 한 사람인 양 갈망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을 짓는 목수로 살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사람들이 ‘그 목수’라고 불렀다고 제게 말씀해 주신 기억이 새롭습니다. 풀어주신 그 호칭의 의미를 제가 하는 일에서 다독이며 살고 있습니다. 안식을 위한 공간과 살림에 필요한 가구들을 만드는 일이 창조의 연속작업으로서 구세주가 되실 분이 업으로 삼기에 잘 어울리는 일이었겠다 싶습니다. 이름 있는 뛰어난 목수로서의 경력에 어울리게 예수님은 우리가 있을 거처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어떤 장소를 마련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는 표현으로 구원을 일러주신 사실을 유념해 봅니다. 목수만이 쓸 수 있는 손 때 묻은 표현과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짓고 있는 많은 구체적인 ‘짓기’의 행위들 - 집짓기, 밥짓기, 옷짓기, 농사짓기, 글짓기, 이름짓기, 사이짓기, 등 - 을 통해 우리가 들어갈 구원의 집이 영원과 잇대어 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분야의 장인이 된 사람이 그 정신과 그 눈으로 세상을 건설해 간다면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누군가에 의해 이룩된 한 공간이 아득한 옛날 자신이 떠나온 고향의 느낌을 회복시키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에도 타락한 채 낙원으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한 장소가 그 낙원의 데자뷰(旣視感)가 되어 그 원 기억을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면 그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습니까?

 

오랜 노고와 깊은 정성으로 마련된 장소라면 그 곳에서 순례자는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네 세상은 그런 수고와 기도를 멈추지 않는 영혼의 장인이 필요하고, 당연 그 몫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순례길을 가고 있는 이들에게 안식과 치유를 주고 새출발을 격려하는 성스러운 장소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세워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목사님께서는 농촌에서 목수와 농부로 사는 제가 부럽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이 허투루 던진 인사치레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농사의 중요성과 농사하는 이들에 대한 미안한 심정을 품고 살아간다는 고백 속에서 우리시대의 회한과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시교회 설교자로서 서재에 신영훈 선생의 『한국의 살림집』이라는 두 권의 책이 꽂혀 있는 것이 의아했지만 그것을 한옥 예배당을 지으려는 제게 선뜻 내어준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저희가 농사한 유기재배 쌀이 매주일 교인들의 공동밥상에 올려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가와 인문학자로 살아가면서 관념이 아닌 땅의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근원적인 추구를 멈추지 않는 모습, 또한 이웃의 작은 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과 한 가슴이 되는 모습을 통해 사람들의 영혼에 감동을 주는 글과 말이 세상에 선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편지를 쓰면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성스러운 공간을 완성하기를 계속하자고요. 거룩함을 짓는 목수로 살고 싶습니다. 제 손이 닿는 장소에 고요함과 거룩함이 깃들고, 사랑과 치유의 음성이 들려지는 장소가 되도록 하는 벅찬 일에 정성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농촌에 자연스레 존재해야 할 잃어버린 소리들을 복원하는 일에도 힘을 다해 보겠습니다. 동경하는 소리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절망하거나, 쉴 만한 곳을 찾을 수 없는 피곤한 일상에 포로가 되지 않고 계속하여 행진할 수 있는 힘을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주어진 소명을 받들고자 합니다.

 

한 시대의 아픔에 동반으로 존재하시는 분이 제가 가는 길에서 한줄기 조명이 되어 준다고 생각하니 한결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집니다. 때때로 저의 시름과 기쁨을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그때마다 시대의 상실을 좀 더 분명히 기억하도록 일깨워주시고 또한 공동의 희망을 밝혀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평안과 건강을 기원 드립니다.

 

정훈영/단비교회 목사

 

<희망, 그 빛깔있는 삶의 몸부림>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