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교회(1)

교회, 길을 걷다

-제1회 임진강 민통선 트레킹에 부쳐-

 

한 달에 한 번씩 예배당을 벗어나 길 위에 나서 보자고 시작한 첫 번째 시도로 임진강 민통선 트레킹에 나섰습니다. 두 교회 약 30명이 함께 합니다. 예배도 설교도 기도도 찬양도 없이 그저 함께 걸어보려 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예배당과 조직과 교의와 ‘이런 게 교회다운 교회’라는 지난 백년간의 철갑을 두른 틀에서 벗어나 보려고요. 아니죠. 우리가 어머니께로 나올 때 우리가 무슨 기독교도라거나 무슨 교의를 신봉함으로써 인생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 후에 결국 이런 사람들이 됐을망정 사람의 본질인 영혼은 역시 그 무엇으로도 규정될 수도 가둘 수도 갇힐 수도 없는 것이죠. 인생의 의미란 각자의 길 위에 서서 각자의 길에 적응하는 것일 뿐. 있다면 이 길이라는 공통의 길의 법이 있을 뿐 아닌가 합니다.

 

돌이켜 보면 길에 적응하는 동안 길이 길을 열고 길을 내고 길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는 떠나고 떠나고 떠나왔습니다. 어떤 인류의 스승께서 가르쳐준 말씀처럼 ‘모든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믿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깨달은 것으로부터의 자유. 도달하고 이룩한 것으로부터의 자유. 이제 교회라 불리는 모임도 길 위에 나서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안다는 아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때가 이르렀습니다. 교의가 아니고 교파가 아니고 교단이 아니고 우리가 놓인 이 공동의 생존 조건 속에서 길이 길을 가르쳐주기를, 길이 길을 열어주기를 기대합니다. 거창할 것도 거창하게 주장할 것도 없이 두벌 옷과 지팡이를 지니지 않은 맨 몸과 빈 맘으로 나서보려 합니다. 길을 나선 우리의 몸이 맘이 각자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요? 아무 생각이 없이 걸음에 집중하게 되는 거기서부터 진정 필요한 숨과 힘이 우리의 결핍과 해답을 가르쳐 줄 겁니다.

 

 

임진강은 한반도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흐름은 자연이라 그 무슨 법으로도 이념으로도 철조망으로도 댐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를 연결해주는 임진강을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를 가르는 강으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렇게 믿어왔고 믿다보니 실제로 그렇게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이제 오랫동안 꿈으로만 말로만 글로만 상상력으로만 꿈꾸고 말하고 쓰고 그려보던 일들이 사실은 본래 현실 그 자체라는 이 쉽고 간단한 진리를 다른 무엇이 아닌 새로운 길 위의 나선 맨몸으로 느끼고 인정해야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모든 아는 것으로부터 자유가 우리의 서로를 갈라놓은 거짓된 임진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킬 겁니다. 비무장 지대에서 총기가 사라지고 자유왕래가 시작된다니 이게 본래 그런 것이 아니고 뭣이었겠습니까. 본래 그런 것을 그런 것으로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눈물과 참혹하고 악독한 거짓들이 벌어졌습니까? 모든 것이 그 거짓의 교의에 종사하며 모든 것이 우리를 옥죄었습니다. 정치나 이념뿐이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 종교였습니다. 모든 본래 그러한 것이 본래 그러한 것으로 인정되기까지 우리를 가로막고 서있던 정신상의 우상.

 

 

 

지난 주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년 11월 6일~2018년 10월 22일) 목사님이 소천 하셨습니다. <미스터 선샤인>에도 나온 이 이름은 ‘고귀하고 위대한 이’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그분의 책은 단지 몇 권 읽어봤습니다 마는, 기억나는 건 세 가지쯤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20대에 처음 목사로 부임해 목회를 시작할 때, 그 교회에 가서 느낀 첫인상이 자기 목회의 길을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성도들이 한결 같이 개성이 없이 똑 같은 지. 그것이 마치 개성뿐 아니라 지성도 명철도 현명함도 눌려서 상실된 것과 같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자기의 목회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으로 대접해주는 것’, 그것이 되어야할 것이라고. 그렇게 10년을 했더니 그 다음에는 사람들의 개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두 번째는 ‘이제 바쁘다는 것은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인 문제다’라는 말입니다. 저는 ‘바쁘다’는 게 단지 여유를 가질 수 없이 할 일이 많은 걸 가리키는 말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학의 문제가 된 바쁨은 오직 그것 외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인식상의 고정된 정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바쁨의 신학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개인의 사업을 멈추고 교회로 가서 목사를 도와 하나님의 사업(교회 일) 열심히 하라는 결론으로 갈 수가 없죠. 그 바쁨이 사회적 문제가 아닌 신학의 문제라 했을 때는 반드시 이대로는 아닌 근원적 사색과 행동을 요구하는 문제의식으로서, 우리가 사회적 문제의 해결책이라 제시하는 모든 교의와 의식과 봉사와 실천의 종교 전체를 신학적으로 재검토하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런 신학적 의미로 지금 교회들은 너무 바쁩니다. 그 바쁨은 게으름이기도 한 것이죠. 너무나 바빠서 정신을 못 차리고 너무나 게을러서 오로지 답습의 보수 말고는 알지를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바쁜 거기에 종속돼 있는 것 말입니다.

 

셋째는 개인적인 것인데, 그가 남긴 수많은 어록 중에 하나로 ‘사모의 얼굴은 목사의 이력서’라는 말입니다. 사모뿐이겠습니까? 모든 부인들의 얼굴은 남편의 이력서지요. 또 모든 남편의 얼굴은 부인의 이력서이기도 합니다.

 

 

결론은 결국 하나입니다. 모든 인위에 지치고 피곤하고 메마르고 강퍅해지고 부패하고 오염되고 악해지고 마침내 공허해진 모든 거짓된 말들과 의식과 허세와 사업. 그 모든 이미 아는 척으로부터 모든 이들의 믿고 안다고 믿어온 거짓 종교를 해방시킬 때가 왔습니다. 아니, 2000년 전 유대 예루살렘의 젊은 스승 예수의 말씀처럼 거짓 종교에서 정직을 다해 스스로 해방될 때가 왔습니다. 더 이상 예배당에 갇힌 신은 신이 아닙니다. 더 이상은 교의에 갇힌 신도 신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나누고 배제하고 배타하고 구별하고 낮게 보고 정복하고 교화시키려드는 더 강한 신들의 바쁘디 바쁜 종교사업도 더 이상 권장할 것으로 사람들 앞에 내놓아서는 안 됩니다.

 

나쁜 것보다 더 나쁜 것은 가장된 좋은 것입니다. 이력서는 꾸밀 수 있지만 얼굴을 바꾸진 못하죠. 얼굴은 고칠 수 있지만 영혼으로부터 발산되는 지성과 지혜와 명철의 빛은 조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님을. 우리가 무엇인가를 위해 가장 거룩함과 고결함과 장엄함을 가장하고 꾸며내는 그 순간에도 우리의 영혼의 양심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고 그것이 우스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지금 교회라 불리는 추상적 명칭과 그 추상을 힘입어 위세를 부리는 조직에는 신이 안 계시고 역사적으로도 늘 안 계셨고 본래 신께는 그런 사원이 필요했던 적이 없었음을. 어떤 면에서 우리는 이 역사적 교회라는 서사로부터 벗어나야지만 진정한 신께로 돌아갈 수 있음을. 아니 아니라하더라도 결국 그렇게 될 것임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3~36)

 

인정할 것을 인정함으로써만 우리 모두를 지금의 거짓된 현실로부터 우리들 자신이 해방시킬 수 있다는 진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과 교회가 기로에 서있습니다. 부득불 불가피하게 하던 사업들을 끝내야할 때가 온 겁니다. 특히 교회는. 모든 사업(死業)을 멈추고 처음 출발했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 이상 각자의 역사를 핑계로 하나님의 뜻을 인위적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는 99.9999%가 부동산이라고. 그러니 우리의 출애굽은 건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겁니다. 건물이 만든 신과 신학과 사업들. 정말 우리가 하나님과 돈을 함께 숭배할 수 없는 거라면, 그것이 맞는다면, 우리는 서둘러야 할 겁니다. 문제라 하면서도 그대로 눌러 앉아 뭉개고 있는 신앙은 이제 내밀만한 이력서가 못될 마이너스 스펙이 될 겁니다.

 

 

아직도 세상을 너무나 모른다고, 오만하다고, 편협하다고, 또 사랑이 없다고 비난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늘 그랬으니까요. 그런 거라면 우리는 오히려 모든 저마다 바쁜 사람들의 대충 그러한 진리의 적이 되는 오해도 불가불 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가진 것으로부터의 자유, 의지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아는 것, 가진 것, 의지하는 것에 의거해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는 없죠. ‘가난한 너희들은 행복하다. 천국은 너희 같은 가난한 이들의 것이니까.(누가복음 6:20)’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그것을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도 교회도 길 위에 서 있고 길을 걷도록 부르신 이것이 또한 신의 부르심이 아닐까요? 이제 우리를 보다 분명한 실제의 길로 부르시는 부르심이 아닐까요? 그러나 교황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나아가라’입니다. 우리는 대통령도 아니고 군인도 공무원도 검찰도 법관도 목사도 의사도 사업가도 학생도 어린이도 노인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참되게 아무것도 아님을 알 때 우리는 참되게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을 뿐. 길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울 뿐. 그 길에서 평등하게 만나는 예배를 위하여. 신 없는 교회를 벗어나 사원 없는 신께 경배 드리러 예루살렘의 고루한 서사가 끊어진 광야로 나가려 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편 121:1~2)’ ‘야훼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사무엘상 2:10)’

 

하나님의 자녀의 출애굽(Exodus)을 가로막는 파라오는 그의 화려하고 잡다한 신전과 함께 공허하게 허물어질 겁니다. 세습까지 하며 자기들의 제단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저들의 바쁨에 비하면 얼마나 통쾌한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오직 맨 몸의 평화가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우리의 전도라 생각하게 된다면 우리는 한 것 없이 보수를 받은 사람처럼 행복할 겁니다. 다복(多福)과 조이(Joy)와 이수를 위하여!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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