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랗게 질린’시대에

‘하나님조차 안쓰러워 보이는’ 시절에

 

부제(副題)는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다. 읽으니 우선 글이 저자의 인품처럼 잔잔하고 진진하다. 묵직한 중량감이 독서를 차분하게 한다. 인용된 예레미야 시대의 정세와 동요는 화염과 폭풍 같을지라도 그 숨 가쁜 현실을 행간에 묻어둔 채 담백하게 기록된 문장들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 내려가는 저자의 말씀을 대하는 진중한 숨결이 느껴진다.

 

실존이 놓인 현실과 더불어 가는 슬픔

 

그것은 우선 겸손한 자세다. 어떤 겸손인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腹中)에 짓기 전에 내가 너를 알았고, 네가 태(胎)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4,5)”,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나는 아니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1:6).(「훨씬, 무한히」, 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너무나 바쁘고 들떠있는 주변세상의 속력과 속도에 제압당하며 살아가는 세태 속에서, 이런 걸 느끼기도 어렵지만, 드러내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것이다. 저자는 아마 예레미야서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그걸 발견한 것 같다. 그래서 그것부터 느끼게 해준다. 복중에 짓기 전에, 태에서 나오기 전에,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첫마디로 지극한 슬픔을 표명한다.

 

그 슬픔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현실과 직면한 민생의 고통과 다가오는 멸망의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와 더불어 있다. 그것은 차분한 사람의 슬픔이고, 진지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느끼는 고통이다. 그는 세상의 선지자로 나서기 전, 남에게 무언가를 표명하기 전 이런 슬픔의 고백을 품은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 풍경은 그래서 읽기도 전에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거라고.

 

그러나 독자들이 저자를 따라 하루하루 시간을 들여(그렇게 읽으면 좋겠다) 예레미야의 발자취를 따라가노라면 삶과 존재의 신비에 대한 경외와 실존의 고백으로부터 나오는 겸손함과 그러한 자기부인이 주는 뜻밖 은총의 휴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신비일지라도 실존이 놓인 현실과 더불어 가는 슬픔이고, 피치 못하게 선택받은 선지자(先知者)의 슬픔일지라도 자기는 물론 이 세상 전체를 부인함으로써 영생을 따라가는 은총의 과정이다.(자기를 줌〔버림〕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어쩌면 가능의 영역에서 가능한 꿈과 비전으로 우리들의 행복한 세상을 건설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이 비현실의 현실을, 그러나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가능하고 소멸되지 않는 소망의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비밀의 양식(성만찬, The Holy Communion)일 것이다.

 

 

하나님은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저자의 손가락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관심이 늘 이 세상의 중심보다 구석진 곳, 외진 곳, 그늘진 곳, 그래서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 외면당하는 곳,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는 외롭고 높고 쓸쓸한 무명의 ‘한 사람’을 향해 있었다고 가리켜준다.(「하나님의 방법」) 그것은 무명(無名)이나 유명(有明), 예레미야가 그랬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자명하다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을 굳이 손가락까지 짚어가며 읽음으로써 새롭게 발견하다니. 마치 본래 있던 대륙을 발견하고 그것을 ‘신대륙’이라 부른 사람만큼이나 신기하다.

 

저자는 그 항목의 결미에 이렇게 쓴다. ‘말을 잘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달변가를 원하시지 않는다. 어눌하더라도 당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할 수 있는 사람을 원하신다.(「나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43쪽) 그러므로 그것은 「약점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을 통해 용기를 낸 겸손한 사람의 의연하고 결의에 찬 선언이다.

 

예레미야가 살아간 시대에 예레미야는 지금 우리가 읽는 예레미야가 아니었다. 당대에 그는 예언자로 인정되지 못했다. 경멸받고 무시당했으며 욕설과 조롱과 투옥과 추방과 피체를 당해야 했고 원치 않는 곳(이집트)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시대에 ‘하나님조차 안쓰러워 보이는’ 시절에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예언의 말씀을 업으로 삼아 삶을 살아갔다. 그의 전 청춘을 다 바쳐서.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모든 것이 파국으로 끝날 때까지.

 

그리고 그의 예언서처럼 예레미야와 함께 우는 여정도 거기서 끝난다. 예레미야가 우리가 읽는 예레미야가 아니듯이, 예레미야와 함께 우는 독서 역시 항용 우리의 독서(우리 시대의 설교)와 같지 않는 점이 비상하다. 그 비상함은 현실을 과장하거나 소망을 부풀리거나 억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으려는 일체의 욕망과 야망과 소망과 아첨을 거부하는 예언자의 예언자적 태도를 고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하나 결연하고 피동적이나 단호하게 행동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지시해준다.

 

겸손과 결의와 절제의 굳셈

 

설교를 업으로 삼고 사는 목사로서 동시대의 설교에 늘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나의 스승이지만 그 말은 다른 의미론 모두가 나의 경쟁자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때론 선의의, 때론 불만족과 저항과 대립의 경쟁이기도 하다. 모두가 선의의 경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설교도 그 무엇도 선행하는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하지만 설교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이 바람직하다는 것보다 그저 어떤 사람이냐 정도의 무심함이 필요하다. 무심함이지만 과학성이 있는 무심함.

 

모두들 목표와 비전과 소망과 꿈과 야망의 구획된 프로젝트 안에서 발버둥치는,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만족스럽지 못한 총체적 불만이 오늘의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바로 그런 분주함과 분요함으로부터 지극한 샬롬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전파해야할 교회와 교회의 설교가 그러한 불만족의 표상이 되었다. 예레미야가 나와도 열 명, 스무 명, 백 명은 나올 법 한. 그러나 저자의 예레미야 읽기는 그러한 불만족에 대한 속 시원한 해법이 아닌 그래서 더욱 불만족스러운 해법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고전적이고 너무나 겸손하고 너무나 정중한 건지도.

 

그러나 바로 그런 겸손과 결의와 절제의 굳셈이 또 다른 섣부른 분요함을 추가하는 설교가 아니라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차분함과 고요함의 미덕(美德)을 일깨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심한 듯 치밀한 과학이 들어있는. 저자는 우리(나)로 하여금 예레미야가 아니라 무릎을 꿇고 손가락을 짚어가며 예레미야를 읽는 사람됨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가시덤불과 묵은 땅을 내버려 둔 채 그 위에서 요란하게 믿음의 언구럭만 떨고 있는 것은 혹 아닐까?’(「언구럭을 떨지 말라」) 정말 싸워야할 것을 발견할 때까지, 그리고 정말 싸운다는 건 무엇인지, 저자는 마치 말과 경주하듯 끝까지 겸손과 결의의 손가락을 떼지 않는다.

 

*

일독(一讀)을 권한다. 매 회 분량은 길지 않다. 차분한 독서. 두런두런 들려주는 진진한 음성. 우렁우렁 울리는 마음의 공명. 그리고 예화로 꺼내보는 저자의 추억의 에피소드들 속에는 사람에 대한 따스한 사랑과 맛깔스런 이야기와 빛나는 지혜가 담겨 있다.

 

동화작가이기도 한 저자를 만나면 비전(秘傳)으로 간수해온 오래된 고전의 신선함이랄까 하는 동화적(?) 발견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를 통해 독자들이 동화 속 짤랑 거리는 금화와 같은 순결한 정신의 힘을 만나게 되기를. 여러 번역을 대조하며 짚어가는 저자의 손가락 끝에서 요란한 세상 가운데 본래 있는 평화를 찾아가는 좁은 문을 발견하기를. 깡그리 끔찍한 폐허일지라도, 웅덩이에 빠졌을지라도, 낮과 밤이 자신의 때를 따르는 한, 흔들릴수록 중심에 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 수 있기를. 흐르는 강물처럼.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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