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9)

한국교회와 샤머니즘(1)

 

한국교회와 샤머니즘은 여러 모로 자주 연결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누구의 분석, 혹은 진단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교회의 샤머니즘화’는 거의 정설처럼 되었고 또 마치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파생된 많은 문제의 시발점인양 ‘이해’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판단과 분석 뒤편에는 ‘우리’(한국 교회)는 본디 좋은 것인데 ‘나쁜 저것’(샤머니즘)이 은연 중 들어와 우리의 반듯하고 깨끗함을 흐려버리고 오염시켰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자리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한국교회가 샤머니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기준과 근거로 사람들은 편안한 자세를 하고 한국교회는 샤머니즘에 오염되었다고 선언하듯이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복주의’를 예로 든다. 혹자는 한국교회에서 보이는 열광적 신앙 행태가 샤머니즘의 그것과 많이 흡사하다고 한다. 그럴까? 과연 한국 교회의 기복주의는 샤머니즘으로부터 온 것인가? 잠시 이 문제를 곱씹어보자.

기복祈福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복을 비는 행위나 상징’으로 풀고 있다. 종교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기복행위, 즉 복을 비는 자세는 지극히 자연스럽다. 세상에 어떤 종교가 신앙 생활을 통해 지복至福을 희구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한국교회를 비판할 때 내세우는 기복주의는 편하게 뽑아놓은 얼굴 마담이고 기실 하고자 하는 뜻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복주의 뒤에서 부정의 이미지를 잔뜩 칠하고 있는 주인공은 정작 무엇일까? 물질주의? 맘몬주의? 그래 그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가급적 뒤로 물려야 할 물질에 대한 마르지 않는 애착. 어쩌면 사람들은 이러한 왜곡된 애정을 일컬어 기복주의라는 말에 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쯤에서 우리의 표현을 제대로 정리해보도록 하자. ‘지금 한국교회는 물질주의라는 수렁에 빠져있고, 그 원인은 한국교회의 샤머니즘화에 있다.’ 자, 이 정도 표현이면 우리의 논제는 깔끔하게 마무리된 것인가? 그런데 여전히 우리의 갈증은 쉽게 가셔지지 않는다. 이 논제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샤머니즘의 물질주의, 혹은 기복주의의 부정적 요소를 밝히 앞으로 내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논의는 ‘과연 샤머니즘은 부정적 의미의 기복주의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샤머니즘에 대한 기본적 이해에 먼저 시간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우선 명칭부터 살펴보자. 편의상 이 글에서는 샤머니즘이라 적고 있지만 각각 처한 입장과 시각에 따라 한국의 샤머니즘은 다양하게 불리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샤머니즘, 무속, 무교, 무 등을 꼽을 수 있다. 무속이란 용어는 불교계 학자 이능화로부터 사용되었는데,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이 무속이라는 말에는 샤머니즘의 종교적 성향보다는 그것이 가지는 관습, 풍습이라는 측면이 더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이 용어는 샤머니즘에 대한 적지 않은 문화적 천시가 포함되어 있다. 분명 살아있는 종교이며, 그 기능 또한 제대로 종교적인데도 그저 전통적 관습의 하나로 묶어 그것을 이해하려는 폄하적 의도가 스며있는 용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무교란 용어는 종교로서 한국 샤머니즘의 성격을 잘 나타내주고, 여타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는 독립된 종교 전통을 뜻한다는 점에서 중립적 위치에 있는 많은 학자들이 자주 사용한다.

이 단어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 교수가 학문적 용어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라는 용어는 90년 대 이후 한양대 인류학과의 조흥윤 교수가 즐겨 써왔는데, 그는 한국의 샤머니즘은 시베리아계열 하고도 궤를 달리하는 독특한 요소를 가지고 있기에 범용적 개념의 무교보다 차라리 무라고 독립된 용어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이러한 입장이 최근 조 교수 자신의 개신교 개종과 더불어 변화될 여지가 있기에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샤머니즘은 무당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현상으로서 지금까지 역동적으로 한국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5년 통계를 보면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무당의 숫자가 8만여 명에 이른다. 심지어 2007년 7월 7일 보도된 <뉴욕 타임즈> 기사에 의하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체 샤머니즘관련 직능 종교인들의 숫자는 무려 30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2002년도 정부 통계에 의하면 당시 한국 개신교회 전체 목회자 수가 12만여 명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이 숫자의 무게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줄잡아 30여만 명의 무속인들이 활동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연관된 단골들과 의뢰인들을 어느 정도 규모로 잡아야 할까.

어림잡아 본다 해도 한국 샤머니즘의 규모는 현 종교인 비율 가운데 매우 큰 몫을 차지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건 단순히 지면상의 통계가 아니라 한국 종교 생활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에서 무교, 혹은 샤머니즘은 살아있는 종교이고 게다가 매우 역동적이다. 여기서 우리의 궁금증 하나가 또 떠오른다. 과연 샤머니즘이 가진 어떤 점이 정보화 시대 초일류 국가임을 외쳐대는 21세기의 첨단 한국 사회 속에서 그처럼 활동적으로 만들고 있는 것일까?

앞서도 말했듯이 샤머니즘은 조직화된 종교라기보다는 무당 개인을 정점으로 하는 지극히 개인적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특별한 조직이나 교리, 그리고 신앙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여 무당의 숫자만큼 그들의 교리나 세계관은 다르고 또 다양하다. 물론 서울 올림픽이 있던 해 한국의 무속인들이 모여 <천우교>天宇敎라는 연합 종교 단체를 창설하고 그들의 통합 교리서까지 발간한 일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은 하나의 종교적 해프닝이었고 여전히 샤머니즘은 무당과 단골들을 중심으로 한 개인적 종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종교 행위가 이루어지는 구도는 단순하다. 문제가 생긴 의뢰인이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무당이 가진 종교적 직능을 요청하는 것이다. 이때 무당은 의뢰인이 가지고 온 문제의 원인을 진단 분석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때론 부적등과 같은 보다 손쉬운 방법을 통해 문제가 해결되기도 하지만 좀 더 심각한 문제인 경우에는 굿을 시행하게 된다. 이때 무당은 이 특별한 종교 의례(굿)의 주관자로서 주체적 행위를 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종교 행위 가운데 샤머니즘이 가지는 세계관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무당들은 의뢰인을 비롯한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문제의 대부분이 신령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기에 생겨난다고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굿을 행한다. 여기서 우리는 샤머니즘에서 바라보는 신령에 대한 시각 하나를 알 수 있게 된다. 이들이 말하는 신령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한 신과는 다른 존재이다. 즉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 하나님은 초월적 존재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긴 했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존재는 아니다. 물론 끊임없이 당신의 의지와 계획 속에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고 개입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분의 행위가 이 세계 내에 국한된다고는 고백하지 않는다.

반면 샤머니즘에서 말하는 신령이란 바로 ‘이 세계 내의 존재’이다. 존재의 양식만 달라졌을 뿐, 신령들 역시 인간들과 함께 더불어 실존적 경험을 나누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과 지속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들이며, 여기서 생겨나는 왜곡된 관계들이 바로 인간사의 많은 문제를 만들어 낸다고 본다. 따라서 이들 신령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 아니면 아예 이들이 달라진 존재 양식대로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자리를 정돈하는 일. 바로 그 일을 무당은 중점적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종교 행위를 통해 각 존재가 자신의 위치를 찾게 될 때 생겨났던 문제가 해결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굿이다. 따라서 굿이란 산자와 죽은 자의 조화를 위한 종교적 행위라 할 수 있다.

굿은 생각보다 길다. 요즘에는 기업화된 무당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굿을 몇 시간 단위로 끊어 행하기도 하지만, 본디 굿이란 며칠씩 소요되는 큰 종교 행사이다. 대략 굿은 10거리에서 38거리 정도로 이루어진다. 몇몇 굿들의 경우는 45거리까지 행하는데, 보통 한 거리에 들어가는 시간이 짧게는 30분 길게는 2시간인 것을 생각해보면 이 굿이라는 의례에 소요되는 시간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각 거리들은 청혼請魂행위를 통하여 문제의 원인이 되는 신령들을 불러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불러낸 신이 내리게 되면 경쾌한 음악과 춤으로 그를 즐겁게 해준다. 굿이 진행되는 과정에 무당들은 내린 신에게 빙의되어 문제 의뢰자들에게 공수空授를 내리기도 한다. 일종의 사이코드라마에서 보이는 치유 과정 같은 구조로서 이를 통해 살아있는 의뢰자들은 죽은 자와의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과정을 거쳐 문제의 원인이 해결되면 굿은 성공리에 그 임무를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굿의 주목적은 문제의 해결이며, 그 방법은 신령과의 관계회복이다. 틀어진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 그로써 문제의 해결을 선포하는 종교적 행위가 바로 굿인 것이다.

이때 무당들은 인간과 신령의 중재자로서 역할 한다.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인 것이다. 이들은 각 의뢰자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진단할 수 있어야 하며, 아울러 그 문제를 일으키는 신령들을 불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일을 위해 그들은 자신들의 몸주신의 도움을 받는다. 그만큼 그들에게 있어서 신령의 세계와의 접촉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그들은 이 신령과의 만남을 지속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끝없이 노력한다. 그들은 몸주신을 모신 신당에서 매일 새벽마다 신께 기도드리고, 그 신의 존재를 실감하기 위한 종교행위를 쉼 없이 반복한다. 향을 피우고, 매번 정화수를 갈아 올리고 정성을 다하여 몸주신과의 관계를 매번 재설정한다.(일종의 영성체험이며 훈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주신과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실제로 무당의 역할과 임무는 종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수행 관계가 생략된 채 직능적 행위에만 매달리는 변색된 직업적 무업인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직하게 무업에 전념하고자 하는 무당의 경우 그들의 종교 수행은 눈물겹도록 처절하고 또 치밀하다. 신령과의 접촉이 없이 그들의 종교 기능은 가능치 않기 때문이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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