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9)

생성과 소멸이 한 자리에

 

설 명절을 즐겁게 보내셨는지요? 고향에라도 다녀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역귀성이니 해외여행이니 설날 풍경이 좀 달라졌다 하지만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습니다. 귀성행렬을 볼 때마다 돌아가 안길 품이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적막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설이 되면 늘 찾아뵙던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신 후 이제는 찾아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이든 스승이든 찾아뵐 어른이 없다는 것처럼 쓸쓸한 일이 또 있을까요? 나이 든다는 것이 쓸쓸한 이유 중의 하나는 꾸짖어줄 사람이 점점 사라진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저야 그래도 가족이 있으니 그 쓸쓸함을 쉽게 해소할 수 있었지만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 이주 노동자들, 격절된 곳에서 지내야 하는 사람들의 쓸쓸함과 비애는 해소되기 어려울 겁니다.

설 전날 아내와 만두를 빚으면서 참 고요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밀대로 밀가룩 반죽을 밀고 있자니 인생길에서 제법 먼 곳까지 흘러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후회도 아쉬움도 아닌 묘한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이 험악한 시대에 안온한 행복감이라니!’ 하는 자책감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즐거웠습니다. 전축에서 울려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 어울리지 않는 세팅이었지만 글렌 굴드의 연주를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이번 설은 처음으로 형님 댁에 가지 않고 집에서 지냈습니다. 출가한 아들·딸 내외와 손자 손녀들을 맞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오면서 역사는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모음이 많은 말랑말랑한 언어로 아이들을 어르고 보듬어 안으면서 그 아이들이 살아갈 시간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딸 내외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자, 소음에 자리를 내주었던 고요함이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고요함은 우리를 성찰의 자리로 이끌어갑니다. 일상의 분잡과 소음 속에서 저만치 물러서 있던 심원한 삶의 실상이 슬며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 속에 머무는 것이 진정한 쉼이요 치유임을 알겠습니다.

그 덕분일까요? 모처럼 아침에 가든하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즐겁게 글 한편을 쓰고 난 후, 그 여흥을 몰아 청소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베란다에 있는 화분들까지도 정리했습니다. 겨우내 위태롭게 목숨을 이어오던 화초들이 이제는 한숨 돌리게 됐다는 듯이 생기 있어 보였습니다. 형태를 잡아줄 것은 잡아주고, 정리해 줄 것은 정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무심한 주인의 돌봄을 받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것들도 있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뽑아내는 데 문득 코 끝 가득 향긋한 냄새가 배어들었습니다. 로즈마리였습니다. 로즈마리는 죽어서도 향기를 머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향기는 저를 몇 년 전에 방문한 적이 있던 밀라노의 암브로시오나 미술관으로 데려갔습니다. 사실 그때까지 그 미술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았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 박물관에서 미켈란젤로 만년의 걸작인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보고 난 후였기에 그곳은 가지 않아도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회화작품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에 내리는 비를 무릅쓰고 그 미술관에 찾아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에 미술관 입구에 앉아 다리쉼부터 한 후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것이 바로 카라바조(Caravassio, 1571-1610)의 <과일 바구니(Basket of Fruits)>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굳이 ‘만났다’는 표현을 쓴 까닭은 그 만남이 카라바조라는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저를 이끌어 갔기 때문입니다. 카라바조가 그 작품을 그린 것이 1596년이라고 하니까 그의 나이 25세 때입니다. 한창 혈기방장한 때입니다.

 

 

바구니 속에는 사과, 배, 포도 등의 과일과 나뭇잎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도판이 아닌 원본 앞에 설 때마다 색채가 주는 감동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을 미술관에서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오르네요. 저는 한동안 그 앞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변화산 산정에서 초막 셋을 짓고 거기서 살고 싶다고 말했던 베드로의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카라바조의 정물 역시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과일은 싱싱하지 않습니다. 나뭇잎은 이미 오가리들어 있고, 과일들도 시들어 있습니다. 언뜻언뜻 썩은 부분조차 보입니다. 시간에 빗대 말하자면 정오가 아닌 오후 4시 무렵이 화폭에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찌하여 카라바조는 그런 순간을 그렸던 것일까요?

그림은 대상에 대한 모사가 아니라 자기 마음을 그리는 것이라는 말이 빈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과일 바구니에 담긴 것은 카라바조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빛과 그늘, 영원과 시간, 생성과 소멸이 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빛이 만들어내는 생기가 영원을 떠올리게 해준다면, 빛이 통과하여 빚어낸 시듦은 소멸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과일 바구니>는 이탈리아에서 그려진 최초의 정물화라고 합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회화 작품들은 주로 신화 혹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카라바조는 그 관습적인 틀을 깨뜨렸고, 이전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영원과 시간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제가 그 그림 앞을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것은 어렴풋하나마 카라바조라는 인물이 구현하고 있는 시대와의 불화와 그로 인해 그가 겪어야 했을 외로움이 절절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카라바조는 당시 화단의 관습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반항아였다고 합니다. 그의 삶을 특징짓는 단어는 ‘싸움’과 ‘도주’입니다. 그는 불꽃같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폭력 사건에 휘말려 들 때가 많았고, 싸움 끝에 사람을 죽인 적도 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그는 이탈리아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그림 가운데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 있습니다. 생의 말년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림 속에서 소년 다윗은 오른손으로는 칼을 들고 왼손으로는 골리앗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카라바조가 그린 다윗의 얼굴은 우리가 통념상 생각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자신의 전리품을 바라보고 있는 다윗의 얼굴에는 승자의 의기양양함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수심에 차 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은 자에 대한 깊은 연민에 사로잡힌 것일까요? 골리앗의 얼굴 역시 바라보는 이들에게 연민을 자아냅니다. 크게 벌어진 입, 뜨고 있지만 이미 눈빛이 흐려지고 있는 두 눈, 그리고 고뇌에 찬 듯 보이는 미간의 주름…. 놀라운 것은 카라바조가 골리앗의 모습을 자기 얼굴로 형상화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인생의 패배자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저물녘의 쓸쓸함이 그의 시선을 규정짓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죽어서도 향기를 남기는 로즈마리로부터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를 거쳐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 이르기까지 두서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수 절기와 더불어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삶과 죽음, 시간과 영원, 빛과 어둠이 날카롭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등을 맞대고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어둠을 내포하지 않은 빛은 찬란하긴 하지만 깊이감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소멸의 계기를 내포하지 않은 생성은 활기차긴 하지만 불안정합니다. 승자들의 의기양양한 노랫소리가 패자들의 아픔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무정한 세월입니다. 약자들과 패자들에 대한 연민조차 스러진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욕망의 전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제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선드러진 발걸음으로 걷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참 좋아 보입니다. 분주하더라도 가끔 시간을 내 공원 산책이라도 하시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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