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0)

우리 시대의 순교자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단장하고 선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마태복음 23:29-33).

신앙인에게 남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두 개의 눈 말고 또 하나의 눈, 신앙의 눈인 셋째 눈이 달린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유다인 예수를 우리는 “그리스도”로 섬긴다. 한낱 정치범을 “구세주”로 모신다. 죽어 버렸으니까 모두 끝장났다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그분이 부활하셨다!”고 선포한다. 누구나 십자가에서 죽음의 공포를 보는데 우리는 인류의 새 생명을 보고 그 고상을 성당 지붕에 설치하고 방안에 걸고 가슴에 달고 다닌다. 이야말로 신앙의 신비이다.

“너희가 예언자의 무덤을 단장하고 성자들의 기념비를 장식해 놓고는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 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고 떠들어댄다. 이것은 너희가 예언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여라. 이 뱀같은 자들아, 독사의 족속들아!”(마태복음 23:29-33)

딴 사람 아닌 예수님의 발언이다.

그런데 신앙인 중 이 구절에 나오는 ‘예언자’를 ‘순교자’로 바꾸어 읽거나, 예수님의 이 엄청난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하는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 천주교 신자가 되어 있으니 순교자의 후손이지 박해자의 후손은 아니라고 믿는 까닭이다. 박해자와 그 후손은 온데간데없고 순교자와 그들을 받드는 영예로운 후손만 남은 셈이다. 듣기에 껄끄럽고 불리한 성경 말씀은 대개 딴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다.

 

 

과연 대원군 시대에 선량한 백성은 우리의 순교 선열을 어떤 이라 생각했을까? (국가보안법 보다 두려운) 상감마마의 뜻을 어기고 서학을 믿는 대역죄인들, (신천지 같은 사교를 믿는)사학 죄인들, (미국이나 러시아 같은)서양 오랑캐의 패거리,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사르는 불효막심한 패덕자들(어떤 교우의 눈앞에는 김정은의 사주를 받는다고 말하는 주사파 대학생이 떠오를 것이다)로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수많은 목숨이 떼로 생매장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들에게 죄도 없이 억울하게 학살당하는 희생자라고 동정을 보내는 백성이 얼마나 있었을까? 죽일 놈들이 죄 값으로 죽어 가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교우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고 자신도 그 길을 따라갔다.

단, 우리한테 문제가 되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하느님의 예언자가 있고 신앙의 순교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이 항상 일하시고 언제나 당신 사람을 세상에 파견하시고 있음을 아무도 부인 못한다.

누구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고 말한다. ‘한 마음 한 몸’ 운동에도 속했고 본당 차원으로 자선 봉사도 행한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 아예 없는 세상을 만들어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되었을까? 그들은 권력자에게 제거 당할 뿐더러 대개 교회의 저주를 받는다. 빈민 운동, 노동 운동, 민주화 운동을 하는 성직자와 신자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돈을 내더라도 교회 건물에 세들어 살지 못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이 명동 가톨릭 회관에서 쫓겨나 따로 사무실을 얻게 된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교회가 북한 선교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권장하면서도 정작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을 사상의 이름으로 앞장서서 모조리 단죄하고 말았다.

“예언자를 예언자라는 명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의 보수를 받고, 의인을 의인이라는 명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의인의 보수를 받을 것이다”(마태복음 10:41).

오늘 신앙인의 ‘셋째 눈’에는 우리 시대의 순교자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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