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유철의 음악 정담(9)

장욱진과 슈베르트

 

슈베르트(1797-1828)를 자기주장이 강했던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보통 음악가들에게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신경질적 예민함이나 신념이 강한 사람의 과격함보다는 수줍음, 청순함이 더 잘 어울려 보이기 때문입니다. 슈베르트 음악은 나쁘게 말하면 소녀취향이고, 좋게 말하면 투명하게 아름답다는 평이 우세합니다. 하지만 그가 쓴 종교 음악을 들여다보면 그런 통념에 슬그머니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집니다. 사람들이 슈베르트하면 떠올리는, 짝사랑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용기 없는 사람이란 통념이 절반만 맞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 까닭입니다.

슈베르트는 짧은 31년을 살다 가면서 1000여 곡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 종교 음악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베 마리아’와 7개의 미사곡이 있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 밑에서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를 노래한 <스타바트 마테르>도 남겼습니다. 슈베르트로는 매우 예외적인 스케일 크고 장대한 <전능>이란 가곡도 있습니다.

 

 

이처럼 슈베르트는 종교 음악을 몇 곡 쓰지 않았지만 하나의 작품을 남길 때도 자기 목소리가 분명했습니다. 다만 “나는 이렇게 다르다”라고 떠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눈이 밝은 사람들은 알아 볼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일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성모송인 ‘아베 마리아’의 기원으로 누가복음 2장을 이야기합니다. 임신 6개월째인 엘리사벳이 자신을 찾아 온 마리아에게 했던,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도 복되십니다”란 인사에서 ‘아베 마리아’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라틴어 ‘아베’는 ‘안녕’을 뜻합니다).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를 찬미하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간청하는 성모송은 6세기에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68년에 교황 비오 5세가 성무일도[聖務日禱, divine office]에 수록하면서부터입니다. 그 뒤로 수많은 화가와 작곡가들이 ‘아베 마리아’를 주제로 작품으로 남겼습니다.

슈베르트는 이 짧은 ‘아베 마리아’를 작곡하면서도 선배들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16세기이후 정형화된 라틴어 성모송 텍스트로 가사를 쓰지 않고, 월터 스코트의 <호수 위의 아가씨>에 나오는 ‘엘렌의 세 번째 노래’ 를 독일어로 번역해 사용한 것입니다. 물론 ‘엘렌의 세 번째 노래’도 성모송이긴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장이 아니라 위험에 처한 아버지와 애인을 성모께서 구해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랬으니 보수 신앙인들이 좋아했겠습니까. 요즘은 원작자 슈베르트가 선택했던 가사가 아니라 라틴어 로 더 자주 부른다고 합니다. 그 역시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종교 음악을 쓸 때 슈베르트의 생각이 더 또렷하게 표현되는 작품은 7개의 미사곡입니다. 수백 년 동안 음악가들은 통상문이라고 하는 똑같은 라틴어 가사로 미사를 작곡했습니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이 전통에 대해서도 고분고분하지 않았습니다. 독일어로 가사를 쓴 <독일 미사>야 애초부터 그 대목이 없었으니 문제될 게 없었겠지요. 그러나 나머지 6개 미사에서 슈베르트는 미사의 세 번째 곡인 ‘크레도’(신앙고백)에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라는 부분을 뺐습니다. 어떤 저명한 개신교 작곡가가 사도신경으로 작곡할 때마다 “성도가 교통하는 것과…”를 모두 뺐다면 교회 측 반응이 어땠을까요.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슈베르트가 18살이었을 때 오스트리아는 빈 의회(1815)를 기점으로 급격히 보수화되었습니다. 정치적 억압과 사상의 통제와 검열이 곳곳에서 자행되던 시기였던 것입니다. 권력을 거머쥔 당대의 집권 보수 세력은 왕정복고를 주장하며 역주행에 안간힘을 썼습니다. 때문에 미사에서 통상문의 일부를 빼고 작곡을 계속한 처사는 일종의 체제 도전으로 간주할 수도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쓴 <독일 미사> F장조 D. 872에 대해 가톨릭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미사곡은 반드시 라틴어로 작곡해야 한다는 교회법을 어기고 빈의 공업학교 물리학 교수 필립 노이만의 독일어 가사로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슈베르트가 독일어로 종교 음악을 작곡한 최초 인물은 아닙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바흐가 수난곡들을 독일어로 썼고, 정통 미사 형식은 아니었지만 모차르트도 두 개의 교회용 가곡에서 독일어 텍스트를 사용했습니다. 하이든의 동생 미하엘 하이든(1737-1806)도 이미 독일어로 <독일 미사>을 작곡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슈베르트도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도 없고, 느낌이 오지도 않는 라틴어보다는 일상 언어인 독일어로 신앙과 삶을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던 게 확실합니다. <독일 미사>는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인 1827년 여름에서 초가을에 작곡했지만 주교구 행정청은 일반 공연장 연주나 악보 출판은 허락했지만 이 곡을 미사 시간에 연주하는 것은 금했습니다. 때문에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가 성당에서 미사로 드려지기까지 꼭 100년이 걸렸습니다. 서거 100년이 되던 1928에서야 주교회의가 <독일 미사>를 묶고 있던 포승줄을 풀어주었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종교 음악이라면 중세로부터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로시니, 브람스, 베를리오즈, 베르디를 거쳐 현대의 스트라빈스키, 메시앙, 아르보 페르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게 많은데 슈베르트까지 들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의 몇 백이 넘는 가곡이나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겨울 여행>,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현악5중주 <송어>,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피아노 즉흥곡과 소나타 등등 주옥같은 곡 듣기도 바쁜데 그의 종교 음악까지 챙겨야 하느냐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감합니다. 슈베르트의 7개의 <독일 미사>를 바흐의 <B단조 미사>나 베토벤의 <장엄미사>와 어찌 단순 비교하겠으며 그의 <스타바트 마테르>와 페르골레시나 로시니의 작품 또한 어찌 단순 비교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베르트의 미사곡을 내칠 수 없는 이유는 있습니다. 슈베르트에게는 베토벤의 <장엄미사>처럼 한계를 뛰어넘는 극한의 감동이 없습니다. 바흐처럼 더 길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정서나 영감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의 종교 음악은 위대하다기보다는 겸손하고, 새로운 시도로 종교 음악의 영역을 넓히거나 높이는데 의미를 두었다기보다는 개척교회 성가대도 부를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이 전통적인 형식인 ‘디에스 이레’, 즉 최후의 심판을 강조하는 무시무시한 곡을 빼고 포근한 죽음의 안식을 강조했듯 슈베르트 역시 쉽고 따뜻한 언어와 정서로 신을 노래했습니다. <독일 미사>의 쉽고 단순함은 인상적입니다. 이전에 작곡한 5번 Ab장조나 후에 작곡한 6번 Eb는 연주 시간이 50분이나 걸리지만 이 곡은 30분이 채 걸리지 않습니다. 따로 독창자를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작은 교회 성가대를 하거나 지휘해 보면 이런 배려가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금방 압니다. 곡이 아무리 좋아도 너무 어렵거나 빼어난 독창자를 두세 명씩 요구하는 곡들은 개척교회에서 연주가 불가능하지요. 그렇다고 수준에 맞는 곡을 고르면 내용이나 곡이 너무 형편없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구요.

슈베르트의 <독일 미사>는 100여 년 전부터 합창단이나 성가대의 훈련용이나 학교의 학습용으로 사용될 때가 많았습니다. 슈베르트는 이 작품을 남성합창 등 여러 형식의 버전으로 편곡도 했습니다. 이 곡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달랐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유튜브에는 스위스 동남쪽 끝에 있는 포렌트리에서 1000여 명 정도의 남녀노소가 광장에 모여 노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독일 미사>를 4성부로 노래하는 장면이 있더군요. 전 교인의 성가대화 그 자체였습니다. 장관이더군요.

 

 

저는 <독일 미사>의 5번 ‘Zum Sanctus’와 7번 ‘Zum Agnus Dei를 한국어로 번역한 곡으로 성가대의 입례송이나 송영으로 가끔 사용했었습니다. 이 곡을 듣거나 연주할 때면 종종 화가 장욱진 생각이 났습니다. 『그 사람 장욱진』을 쓴 김형국은, 장욱진의 어린이가 그린 듯한 지극히 단순한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며칠씩 자지도 먹지도 않고 매달렸다고 썼습니다. 양기승이 슈베르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적어놓은 대목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는 겉으로만 본다면 별다른 사건 없이 단 몇 문장으로 줄여도 모든 얘기가 되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내면적으로 보면 훨씬 더 충실하고 환상적인 삶이었다. 그리움과 기쁨, 밝음과 우울함을 동시에 지녔으며 지상의 것과 신의 나라를 넘나든 슈베르트의 삶은 예술이었고 그의 작품이 곧 그의 삶이었다.

-양기승, 《작곡가의 집》, 한길사, 71-72쪽.

시인 천상병은 어린이처럼 천진해 보이는 삶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음악은 브람스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4번 교향곡을 즐겨 들었다고 썼더군요. 60년대의 4·19를 회고하는 글에서는, 베를리오즈가 <환상교향곡>을 작곡하고 나서 서랍에서 권총을 꺼내 혁명의 대열에 합류한 것을 말하며 당시 우리 문인과 예술가들을 질타했었지요. 만약 천상병 시인이 음악가였다면 자기의 시나 슈베르트의 음악처럼 심플하고 단순한 작품을 썼을까요. 아니면 그가 좋아했던 브람스처럼 고독하고 중후한 음악을 만들었을까요. 천국에 가서 천상병을 만나면 물어보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까먹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다시 지휘할 기회가 생긴다면 슈베르트의 미사곡을 더 많이 연주해 볼 참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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