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1)

단서가 붙은 인생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 놓고 준비하고 있어라!”(누가복음 l2:35-40)

거울 앞에서 정성을 쏟고 있는 여인, 명동 거리의 그 아름다운 자태들을 보노라면 "집과 여자는 다듬기 나름이다"라는 옛말이 실감난다. 마찬가지로 셋방살이 끝에 내 집을 한 채 사고 나면 고치고 다듬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을 모른다.

그러나 서울 인구 70퍼센트는 자기 집이 없다는 통계이고 보면 집을 다듬는 재미는 나머지 30퍼센트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이다. 독채 전세를 들더라도 자기 돈을 들여 손질하는 일은 드물다. 남의 집이니까 언제 비워 달랠지 모르는지라 정을 못 붙이는 것이다.

남의 집이니 언제라도 비워 달라면 이사를 갈 생각으로 사는 셋집살이…. 오늘 성서 말씀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 셋집살이와 같다. 믿는 사람은 하느님과 참사랑 외에는 모든 것에 단서를 붙이고서 산다. 사랑하는 사람, 손에 넣은 재산, 힘써 얻은 명성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붙잡아 두려는 것이 인간의 정이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은 죽고, 부귀공명은 이 손 저 손으로 옮겨가며, 인류 역사는 진보와 퇴보, 전쟁과 평화, 희극과 비극을 번갈아 되풀이하며 극히 느린 걸음으로 향상될 따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더구나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집주인)이 오셔서” 내놓고 가라면, 이 인연을 훌훌 털고 나서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신세이다.

이런 말을 듣자면 그리스도의 복음이 “민중용 아편” 아니냐고 욕하는 자들이 떠오른다. 신앙인이란 고작 “자신을 위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준비하고 하늘에다가 없어지지 않는 재물을 쌓아 두자고” 멍청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처자식 건사나 나라 일이나 세상사는 될 대로 되라고 구경하는 폐인(廢人)들이라는 욕설이다.

 


<"RossGospWiseFoolVirginsF4". - Wikimedia Commons.>

 

믿음이 있는 자만 모험을 한다. 스물 몇 해를 포근히 감싸던 가족을 떠나 낯선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은 사랑하는 그 남자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마흔이 넘어 남의 나라로 이민을 가는 용기는 손에 쥔 돈이나 그곳의 친지나 자신의 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만 믿고 자기가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떠났다.

처자식 건강하고 만족할 만한 집 한 칸 있고 직장 든든하다면 우리 서민은 그것이나마 잃지 않겠다는 소심증이 생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것만 안전하게 보호[安保]해 주겠다는 자가 나타나면 칼잡이든 총잡이든 하늘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자가 된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잘 살고 사회가 안정되고 국가 안보가 튼튼하다고 해도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 거기에도 단서를 붙이고, 정의에 어긋난 점이 하나라도 있으면 비판하고, 보다 나은 세계를 향해 노력한다. 비록 이 땅에 유토피아가 서더라도 신앙인의 눈은 “하느님께서 설계자가 되시고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 주실 도시를 바라며 산다.”

하느님이 세상과 역사의 주인이심을 우리는 믿는다.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보다 의롭고 인간답고 형제애가 군림하는 세계를 건설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음을 안다, 그 의무를 소홀히 하다가는 불충한 종으로 찍혀 영원히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신앙인이 인생에 붙이는 단서란 언제나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해 나가는 태도를 말한다.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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