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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by 한종호 2015. 3. 9.

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9)

나도 그랬으면 좋겠네…

- 야곱의 사다리 -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 이르렀을 때에 해가 저물었으므로 거기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는 돌 하나를 주워서 베개로 삼고 거기에 누워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사닥다리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야훼께서 그 사닥다리 위에 서서 말씀하셨다. “나는 야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느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느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야훼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야곱은 다음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베개 삼아 벤 그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베델이라고 하였다. 그 성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다.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야훼께서 저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느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창세기 28:10-22)

1.

디나 강간과 세겜 몰살, 그리고 그 앞에 쓴 유다와 다말 얘기가 상당히 ‘쎄서’ ‘짭조름한 구약이야기’라는 제목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엔 그것들보다 상당히 ‘연하고 부드러운’ 내용이 되겠다. 여전히 짭조름하진 않을 수 있지만 말이다.

창세기 28장에는 신약성서 요한복음에도 인용되어 있는 얘기가 나온다. 이 얘긴 널리 불리는 찬송가에도 사용됐는데 그게 영화 <타이타닉>에서 배가 가라앉는 순간 현악기로 연주되어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게 베고 잠 같습니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기억나시나? 이번 얘기는 야곱이 돌베게를 베고 잠자다 꿈속에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했고, 하느님이 야곱에게 동행과 귀향을 약속했다는 얘기다.

아버지와 형을 속인 야곱은 더 이상 집에 머물 수 없어 도망쳐야 했다. 아버지는 늙어 기운이 없었지만 사냥이 취미이자 특기인 터프가이 형 에서를 피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에서는 아버지 야곱이 죽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를 곡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때가 되면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27:41)고 작정하고 있었던 거다. 어머니 리브가는 이런 에서의 의도를 알아채고 야곱을 불러 “너의 형 에서가 너를 죽여서 한을 풀려고 한다. 그러니 나의 아들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 이제 곧 하란에 계시는 라반 외삼촌에게로 가거라. 네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너는 얼마 동안 외삼촌 집에 머물러라. 네 형의 분노가 풀리고 네가 형에게 한 일을 너의 형이 잊으면 거기를 떠나서 돌아오라고 전갈을 보내마. 내가 어찌 하루에 자식 둘을 다 잃겠느냐!”(27:42-45)라고 말했단다.

그래서 야곱이 집을 떠났다. 그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집을 떠났던 거다. 그런데 이게 이스라엘의 조상 체면을 구긴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창세기 27장 46절은 그래서 야곱이 집을 떠난 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아내를 얻으려고 그리 했다고 말한다(“리브가가 이삭에게 말하였다. ‘나는 헷 사람의 딸들 때문에 사는 게 아주 넌더리가 납니다. 야곱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딸들 곧 헷 사람의 딸들 가운데서 아내를 맞아들인다고 하면 내가 살아 있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무슨 사는 재미가 있겠습니까?’”). 바로 앞에선 리브가가 형에게 죽지 않으려거든 얼른 도망치라고 했다더니 여기선 헷 사람 며느리를 맞고 싶지 않아서 야곱을 딴 데로 보내겠다는 거다. 리브가가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걸까?

야곱이 왜 집을 떠났느냐, 형을 피해 도망친 거냐, 아니면 이삭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아내를 얻으려고 갔던 거냐를 두고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 두 얘기가 서로 다른 문서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 학자들도 있는데 그건 지나친 해석으로 보인다.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만 발견하면 다른 문서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역사비평학의 오랜 습관으로 보인다. 나는 아내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났다는 설명이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의 초라한 행동에 그럴듯한 명분을 주려는 것이라는 로버트 알터(Robert Alter)의 견해에 끌린다.

그래서 이삭은 야곱을 불러 그를 축복하고는 ‘가나안 사람’의 딸들에게서 아내를 맞지 말고 밧단아람에 사는 외삼촌 라반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맞으라고 말한다. 야곱은 아버지에 순종하여 먼 길을 떠난다. 이 글이 다루는 사건은 이 여행 중에 벌어졌는데 그 얘길 하기 전에 이방인과의 통혼금지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보자.

이방인과의 통혼금지는 구약성서 여기저기서 자주 본다. 법으로도 규정되어 있고 에피소드로도 다뤄졌으며 직접 언급되진 않지만 그게 전제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들을 잘 읽어보면 그것이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금지되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규정상으론 금지된 게 확실하다. 하지만 그것이 다뤄지거나 전제된 에피소드들을 보면 실제론 그게 철저히 실행되지는 않았다. 유다가 가나안 사람 수아와 혼인한 걸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게(창세기 38:2) 그 대표적인 예다.

특정 지역 이방인과의 통혼은 금지됐지만 다른 지역 이방인과의 통혼은 허용된 것처럼 보이는 것도 흥미롭다. 야곱의 경우가 그렇다. 리브가는 야곱을 ‘헷 사람’의 딸과 결혼시키기 싫어서 오라비 라반에게 보냈다. 그녀는 헷 사람 때문에 사는 게 넌더리가 난다고까지 말한다(46절). 그들 중에선 절대 며느리를 얻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편 이삭은 야곱을 불러놓고 ‘가나안 사람’의 딸들 중에서 며느리를 맞을 수 없다면서 그를 밧단아람으로 보낸다. 리브가는 ‘헷 사람’의 딸들이라 했는데 이삭은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라고 했다. 여기서 가나안은 넓은 의미로 사용됐고 헷 사람은 가나안에 살던 족속들 중 하나였으니 리브가가 이삭보다 더 구체적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문제는 ‘밧단아람’이란 지명이다. 리브가의 오라비 라반이 살던 그 지역 말이다. 그곳은 메소포타미아 땅 하란 근처다. 그러니까 거기도 이방인의 땅이라는 거다. 가나안 사람이나 헷 사람의 딸은 안 되는데 밧단아람 사람의 딸은 괜찮다? 둘이 뭐가 다른데? 이방인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근데 왜 둘을 구별했을까? 물론 야곱과 결혼한 레아와 라헬은 라반의 딸이니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녀들의 몸종들도 야곱의 아내가 되어 자식들을 낳았으니 야곱이 이방인과 결혼 한 게 맞다.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목숨을 걸고 먼 곳까지 갔는데 거기서 이방인과 결혼했으니 이를 어쩌란 말인가. 헛고생했나?

2.

이 얘기엔 이방인과 통혼을 금하는 후대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습관적으로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이 경우는 일리가 있다고 여겨지는데 근거는 이렇다. 바빌론 포로기가 끝나고 거기 잡혀갔던 사람들이 제국을 등에 업고 귀향했다(여기서 야곱의 ‘귀향’이 떠오르는 게 우연은 아닐 거다). 거의 두 세대 동안 포로생활을 했으니 예레미야의 권고대로(예레미야 29:4-8) 그들은 거기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살았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들끼리만 혼인했을까? 천만에!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바빌론 및 페르시아 사람들과 통혼했다! 그래서 귀향 명령이 내려졌을 때 귀향하지 않고 거기 눌러 앉은 사람들이 많았다는 거 아닌가. 거의 두 세대에 걸쳐서 정착해 살다가 귀향한다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소수만 귀향했고 다수는 거기 남았다.

귀향한 이들이 가나안 땅에 와 보니 남아 있던 사람들이 땅을 모조리 차지하고 살고 있는 게 아닌가. 당연히 그랬겠지만 말이다. 안 그래도 이스라엘과 유다에서는 땅에 대한 개인적 소유권이 명확치 않았는데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갖고 있던 땅을 그대로 뒀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귀향한 자들이 자기 땅 되찾기 운동을 벌인 것도 당연했겠다. 게다가 그들은 제국을 등에 업고 있었으니 땅 찾기가 훨씬 쉬웠을 터이다. 이 상황에서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계명이 힘을 발휘했다. 고향에 남아 있던 사람들을 종교적, 이데올로기적으로 공격할 때 좋은 구실이 됐던 거다. 남아 있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결혼할 수밖에 없었는데 돌아온 사람들은 그걸 공격했다. 에스라가 귀향해서 동족이 이방인들과 결혼한 걸 보고 통곡했다는 거 아닌가(에스라 9장). 거기 그치지 않고 강제로 이혼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나 말이다(에스라 10장).

그러면 자기들은 어땠나? 자기들은 바빌론에서 두 세대 동안 살면서 이방인들과 절대 통혼하지 않고 ‘순수하게’ 지냈나? 천만에 말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이방인과 결혼할 가능성이 더 컸다고 보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기들 결혼은 문제 삼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 것만 문제 삼았다. 그러니까 이방인과의 통혼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이방인인가가 문제였던 것이다. 야곱이 가나안(또는 헷) 사람들의 딸 중에서 아내를 얻지 않고 굳이 밧단아람까지 가서 그 지역 사람들 딸 중에 아내를 얻은 얘기에는 이런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래서 가나안 여인은 안 되고 메소포타미아 여인은 괜찮겠다는 얘기가 나왔다.

대부분의 구약성서 독자들은 이스라엘이나 유다를 일치단결, 통일된 하나의 공동체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거기에도 수많은 분파들이 존재했다는 얘기다. 사실 그렇지 않은 집단이 어디 있나. 이스라엘에 군주제가 도입됐을 때도 그걸 찬성하는 집단이 있었고 반대하는 집단이 있었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싸워야 한다는 집단과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집단이 있었다. 외국의 도움을 구걸할 때도 갑이란 나라에 도움을 구하자는 집단과 을이란 나라에 도움을 구하자는 집단이 구별됐다. 이렇듯 이스라엘과 유다에는 상호협조와 갈등을 번갈아가며 하는 여러 집단들이 있었단 얘기다.

늘 있어온 이런 갈등이 극명하게 드러난 때가 바빌론 포로기 이후다. 바빌론에서 귀환한 자들과 고향에 남아 있던 자들이 생존이 걸린 땅을 두고 갈등했던 것이다. 저 유명한 ‘빈 땅의 신화’(the myth of the empty land)라는 게 이 시절의 산물이다. 구약성서 일부가 바빌론 포로기 내내 이스라엘 땅이 마치 비어 있었다는 듯이, 아니면 그 기간 동안 농사 안 짓고 땅을 쉬게 하는 ‘안식년’이었다는 듯이 말하는데 이를 한스 바스타드(Hans M. Barstad)가 ‘빈 땅의 신화’라고 불렀다(Hans M. Barstad, The Myth of the Empty Land: A Study in the History and Archaeology of Judah during the “Exilic” Period).

 


<Jacob at Bethel, as in Genesis 28:10-22, published 1900 by the Providence Lithograph Company>

 

3.

이제 본격적으로 야곱의 사다리 얘기를 해보자. 놀랍게도(나만 그런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과 야곱이 처음 만나는 얘기가 바로 이것이다. 그 전까진 하느님이 야곱을 만난 적도, 그에게 직접 말을 건 낸 적도 없었다. 첫 만남, 첫 사랑, 첫 믿음, 첫 교회, 첫 경험 등 같이 사람은 첫 번째 것에 특별한 의미를 둔다. 구약성서도 그런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걸 읽는 사람들은 대개 그렇다. 야곱에게도 하느님과의 첫 만남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 거다. 자신은 안 그런지 몰라도 그의 얘길 읽는 사람들은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아버지와 형을 속여서 아버지의 축복과 장자권을 차지하는 등 야곱의 행태를 보면 ‘과연 이 사람이 하느님이 있다고 믿나?’ 싶을 정도다. 그만큼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는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거나 땅끝까지 갈지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분(시편 139:8-10)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고 보인다. 한 길 사람 속을 안다고 자신하진 못하지만 말이다.

이런 야곱이 형을 피해 밧단아람이란 먼 곳으로 도망쳐야 하는 처지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한 흔적은 없다. 그가 밧단아람 근처인 하란으로 가다가 어떤 곳에서 밤을 보내게 됐다. 그는 돌 하나를 취해서 베게 삼아 자리에 누워 잠이 들었다는 거다. 차가운 돌을 베고 자다가 입이 돌아가면 어쩌나 싶지만 여기선 그게 중요하지 않다. 그가 꿈에서 놀라운 광경을 봤다니 말이다.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다리 하나가 서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더라는 거다. 무슨 SF 판타지도 아니고 자다가 봉창 뜯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괴이한 일이란 말인가!

야곱이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본 게 꿈인지 생시인지를 두고 고대 해석자들 간에 벌어진 논쟁은 얘기하지 않겠다. 어떤 사람은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한 건 꿈 아닌 생시였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과 하느님의 말씀이 모두 꿈속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하는데 나는 그걸 어떻게 알겠으며 그 차이가 이 얘길 이해하는데 왜, 어떻게 중요한지 이해할 수 없다. 야곱조차 꿈인지 생시인지 아리송했을 텐데….

왜 하필 ‘사다리’(혹은 ‘계단’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였을까? 땅과 하늘을 이으려면 그때로선 생각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엔 없었으리라.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는 꿈도 못 꿨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실재하는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뭘 연상하거나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야곱(또는 설화자)의 머릿속엔 ‘지구랏’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한다. 사진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다리꼴의 탑처럼 생긴 지구랏의 꼭대기에는 제단 비슷한 게 있었고 땅바닥에서 거기까지는 계단으로 올라가야 했다. 시간적으론 그가 지구랏을 봤을 가능성이 희박하지만(하지만 설화자는 봤겠지) 둘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다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겠다.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통한 천사들의 통행이라…. 어떤 학자가 이걸 ‘천사들의 트래픽(traffic)’이라고 표현한 걸 보고 슬며시 웃었다. 출퇴근 시간 교통체증이 연상돼서 말이다. 사다리(또는 계단)가 양방향으로 오갈 수 있는 2차선 정도는 됐을까,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할 때 충돌이나 추돌사고는 없었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들고….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했을까? 그들은 왜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으며 또 왜 올라갔을까? 올라간 거야 그들 주소지가 하늘이니까 자기 집으로 간 거겠고, 궁금한 건 왜 내려왔는가 하는 점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흥미로운 얘기들을 고대 해석자들이 어떻게 해석했는지 집중적으로 연구한 사람은 이전 글에서도 인용했던 하버드대학 은퇴교수 제임스 쿠걸(James Kugel)이다. 그는 <야곱의 사다리 The Ladder of Jacob: Ancient Interpretations of the Biblical Story of Jacob and His Children>라는 책에서 이 얘기에 대한 고대 해석자들의 다양한 해석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일부를 소개한다.

고대 해석자들은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했다는 대목에 주목했다(히브리 원어에도 이 순서로 되어 있다. 영어로 정확히 번역하면 ‘ascending and descending’이 되겠다). 그러니까 땅에 있던 천사들이 먼저 하늘로 올라갔고 그 다음에 하늘에 있던 천사들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거다. ‘뭐 이런 사소한 것까지 따지나…’ 싶은 생각은 여러분뿐 아니라 나도 든다. 하지만 고대 해석자들은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신경썼다는 점은 알아줘야겠다.

4.

하늘로 올라간 천사들은 왜 땅에 있었을까? 어떤 해석자는 그들을 야곱의 수호천사(guardian angel)로 봤다. 야곱을 안전하게 지키다가 임무를 다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거다. 왜 하필 여기서 올라갔을까? 언젠가 얘기했는데 고대인들은 신들이 특정 지역을 관할한다고 믿었다. 신들이 각자 권리를 행사하는 ‘구역’이 있었다는 거다. 여기서 하늘로 올라간 천사들은 자기들 신이 관할하는 구역의 경계선에 도달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야곱과 동행하지 못하고 하늘로 올라가야 했다는 거다. 그러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은 새로운 구역에서 야곱을 지키려고 내려왔다는 얘기가 되겠다. 어떤가, 그럴듯한가? 하지만 이 해석엔 문제가 있다. 그때 야곱이 머물렀던 곳, 곧 나중에 ‘베델’이 된 ‘루스’란 지역이 이스라엘의 경계선에 있는 지역이 아니라 이스라엘 영토 안의 지역이란 점이 그것이다.

다른 해석 하나 더 소개해보자. 어떤 해석자는 땅에 머물던 천사들이 뭔가 잘못해서 하느님에 의해 추방됐다고 풀었다. 그렇게 이해할 근거가 없진 않다. 창세기 19장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살피러 왔던 천사들이 롯에게 이렇게 말한다. “식구들이 여기에 더 있습니까? 사위들이나 아들들이나 딸들이나 딸린 가족들이 이 성 안에 더 있습니까? 그들을 다 성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십시오. 우리는 지금 이 곳을 멸하려고 합니다. 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규탄하는 크나큰 울부짖음이 야훼 앞에 이르렀으므로 야훼께서 소돔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들이 여기서 오만방자했다는 거다. 자기들이 뭔데 ‘이 곳을 멸하려’ 하는가 말이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분은 하느님뿐이므로 천사들은 월권의 죄를 범했다. 그래서 추방당했는데 징벌기간이 끝나서 이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란다. 어떤가, 이것은 그럴듯한가? 물론 이렇게 해석할 텍스트 상의 근거는 없지만 어떻게든 이치에 닿게 해석해보려는 노력이 가상하지 않은가.

신약성서와 관련된 해석 하나만 더 소개해보겠다. 텍스트는 “그가 보니 땅에 사닥다리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고 읽는다. 우리말 성서는 ‘그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고 번역했지만 원문엔 ‘사다리’란 말 대신 ‘그’ 또는 ‘그것’이란 남성대명사가 사용됐다. 그러니까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했을 수도 있고(going up and down on the it[ladder]’ ‘야곱 위’를 오르락내리락 했을 수도 있다는 거다(going up and down on him[Jacob]). 후자자면 왜 그랬을까? 왜 천사들은 야곱 위를 오르락내리락 했을까? ‘의인’ 야곱을 천사들이 엄청 존경해서 한 번이라도 그를 보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야곱이 왜, 어떤 점에서 ‘의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대인 입장에선 자기들 조상이니 그렇게 이해했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점은 신약성서 요한복음 1장 50-51절도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해서 남성대명사를 ‘사다리’가 아니라 ‘인자’(사람)로 해석했다는 사실이다. 요한도 천사들이 인자를 숭모해서 그를 보려고 오르락내리락 했다고 본 걸까? 글쎄….

길게 얘기하고 싶진 않지만 고대 해석자들 중에는 야곱의 사다리를 시대사적으로 해석해서 사다리 하나하나가 흥했다가 망한 제국이었다고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했던 천사들이 각 제국의 수호천사란 거다. 그러니까 야곱은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등 이스라엘 후손을 지배할 제국이 흥했다 망할 것을 꿈에서 미리 봤다는 얘기가 되겠다. 다니엘서는 이런 해석의 전례가 된다.

5.

자, 그럼 이제 이 얘기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따져보자. 야곱이 잠에서 깬 다음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중얼거렸다는데 그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를 본 것이나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것이나, 다 좋은 얘기 아닌가?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한 게 왜 두려웠을까? 하느님 말씀도 아버지와 할아버지에게 했던 약속을 재확인해준 게 아닌가? 게다가 귀향할 때까지 여정에 내내 동행하겠다는 얘기가 두려웠을까? 두려웠다가도 안심해야 맞지 않나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이 잠든다는 게 뭔가. 외부의 자극에 대해 가장 약해질 때가 잠들었을 때다. 더욱이 홀로 잠들었다니 그가 얼마나 약한 상태에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자아를 잃는 상태가 되는 거다. 옛 어른들도 잠들면 넋이 빠져나간다 했고 ‘엎어가도 모르게 잠들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 상태에서, 어떤 고대 해석자의 해석대로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그 앞에 펼쳐질 순탄하지 않은 운명을 상징했다면 그가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생각해보라.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도망치는 신세가 아닌가. 요즘이야 여행이 두려워할 일이 아니지만 그때는 가나안에서 밧단아람까지 여행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무리를 지어서 여행한 게 아니라 혼자였으니 쉽게 잠들진 못했으리라.

그런 그가 꿈을 꿨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왔다. 뭔지 모르지만 신비한 의미를 부여해왔던 거다. 하느님의 계시의 통로로 여기기도 했고, 무의식의 표출로 간주하기도 했으며, 새로운 인생이나 새 출발, 과거와 다른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뭐가 됐든 그때 야곱에겐 새로운 비전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 전까지 그의 삶을 지배했던 속임수와 거기서 오는 불안과 두려움, 외부로부터의 고립과는 다른 뭔가가 필요했다는 얘기다. 활달하게 밖으로 나돌았던 형 에서에 비해서 조용히 장막에 머물렀다는 그는 고립된 존재였음에 분명하다. 꿈꾸기 전까진 야곱이 하느님을 찾았다는 말도 없고 하느님이 그를 불렀다는 말도 없다. 그는 마치 하느님이 없다는 듯이 살았던 거다. 속임수를 써가면서 말이다. 요즘 말로 하면 ‘실천적 무신론자’였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그가 꿈에서 하늘과 땅이 사다리로 이어지는 걸 봤다. 그뿐인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도 했다. 드디어 그의 삶에 하느님이 ‘침입’해 들어온 거다. 혼자라고 여겼던 그에게 하느님이 나타나 혼자가 아님을 알려줬다. 하느님은 그의 선조들과 한 약속이 유효함을 확증해줬고 그와 동행하겠다고 약속까지 했다.

이제 야곱에게 새 세상이 열렸다! 내내 간섭 않고 내버려뒀던 하느님이 직접 그의 삶을 챙기겠다니 이게 은총이요 사랑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한 것의 의미가 모호하지만 하느님이 야곱에게 한 말씀은 오해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인지 고대와 현대를 막론하고 해석자들은 여기서 시각적 경험보다 청각적 경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저명한 구약 학자인 월터 브뤼그만(Walter Brueggemann)도 사다리 얘기보다는 야훼의 약속이 얘기의 중심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하느님이 자기 생에 개입하게 된 새로운 현실을 야곱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당연히 감지덕지 감사히 받았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그게 아니었다. 잠에서 깨어나 베게 삼아 베고 잤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운 다음 그는 이렇게 말했단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야훼께서 저의 하느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느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얼핏 들으면 야곱답지 않게 신실한 서약처럼 들린다. 안 그런가? 그런데 잘 읽어보면 ‘허, 그 사람 참….’이란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미 앞에서 하느님이 약속한 것들을 그는 ‘조건문’을 사용해서 재론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하느님은 그와 동행해주고 무사히 귀향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그런데도 야곱은 ‘만일 ~ 하면’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으니 그는 하느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까? 그는 이미 끝난 얘길 갖고 다시금 하느님과 흥정을 벌이고 있다. 그는 하느님과 진지한 관계를 맺었다. 하긴 이게 어디 보통 관계인가. 그러니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심정으로 신중을 기하는 걸 나쁘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건 지나치지 않은가 말이다. 더욱이 이 일 후에 그가 보여준 행동을 보면 대체 뭐가 달라졌는지 의문이다. 그는 라반에게도 속임수을 썼으니 말이다. 결혼에선 라반에게 속아서 십 수 년을 더 일했지만 말이다.

6.

야곱은 타향생활을 마치고 귀향할 때 에서를 만날 일이 두려웠다. 그를 속이고 고향을 떠났으니 그럴 법 했다. 에서가 동생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그에게 출발했다지 않나(창세기 32:6)!. 그는 하느님께 기도드렸다. “… 고향 친척에게로 돌아가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저에게 약속하신 야훼님… 제가 이 요단강을 건널 때엔 가진 것이라고는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만….” 그가 빈손으로 요단강을 건넜단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땐 도망자 신세였으니 말이다. 그가 이젠 여러 명의 아내와 자식들, 많은 종들과 가축떼를 이끌고 돌아오니 금의환향이라고 불러도 되리라.

그런데 그날 밤 그는 예기치 않은 일을 다시금 겪는다. 그날도 그는 혼자였다. 얍복강 나루터에서 그가 혼자 잠들었을 때 ‘어떤 이’가 나타나서 밤새 그와 씨름을 벌였던 거다(창세기 32:22-32). 여기서 이 얘길 할 수는 없지만 베델에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본 것과 얍복강 나루터에서 ‘어떤 이’(나중에 야곱은 그를 하느님으로 인식함)와 씨름한 것을 학자들은 한 쌍(pair)으로 본다는 점만 지적하자. 그는 고향을 떠났을 때도 특별히 하느님을 만났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도 역시 특별히 하느님을 만났는데 그게 괄호 역할을 한다는 거다. 떠날 때 만난 하느님은 동행과 보호를 약속했고 돌아올 때 만난 하느님은 허리춤을 붙잡고 씨름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구약성서에서 야곱은 다윗과 더불어 흥미로운 연구대상이다. 둘 다 ‘모범생’과는 거리가 있는 복합적 성격의 소유자다. 야곱 역시 다윗 못지않게 하느님의 ‘편애’를 받았지만 정작 그는 그걸 모르고 살았던 걸로 보인다. 다윗은 그걸 알았지만 모른척 하고 나쁜 짓을 저질렀고. 둘 다 진심을 알 수 없는 인물이란 공통점이 있다.

창세기에서 야곱의 진심이 드러난 얘기를 찾아보니, 그가 이집트 파라오를 만났을 때가 아닌가 싶다. 파라오가 “노인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오?”라고 묻자 그가 한 대답, “이 세상을 떠돌아 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제가 누릴 햇수는 얼마 안 되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세기 47:7-9)라고 대답했는데 이 정도가 전부로 보인다. 그만큼 그는 자기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다윗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 역시 끊임없는 권력투쟁 속에서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항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왕좌에서 몰아냈던 압살롬이 죽었을 때 그는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 압살롬아, 너 대신 차라리 내가 죽을 것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라고 울부짖었단다(사무엘하 18:33). 이때 그의 속마음의 일단이 드러났다고 본다.

살면서 하느님의 적극적인 개입이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 하느님의 개입을 받아들이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한다. 하느님의 개입은 곧 하느님의 ‘헌신’(commitment)이다. 그건 하느님이 나와 언약관계에 들어가겠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하느님 편에선 자신을 묶어 구속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하느님의 개입과 헌신, 자기구속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과 그분이 하는 일에 대해서 그분과 똑같은 개입, 헌신, 자기구속을 하겠다는 뜻일 터이니 이게 웬만한 용기와 믿음으로 되겠는가.

나는 야곱 얘기에서 믿음은 조건 없이 헌신하는 것이란 교훈을 얻는다. 믿음은 ‘거래’(bargain)가 될 수 없고 그렇게 돼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이 얘기를 나는 하느님이 개입하고 헌신하고 스스로를 구속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그걸 ‘거래’로 격하시키려는 야곱의 행동을 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걸로 읽는다. 지금도 씁쓸한 심정으로 ‘믿음’이란 이름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거래’ 행위를 보면서 말이다.

곽건용/나성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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