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염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12)

무엇을 보러 광야를 헤매는가

 

“늘어진 두 팔에 힘을 주고 휘청거리는 두 무릎을 꼿꼿이 세우고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마태복음 11:2-11)

젊은 혼과 병든 지성은 무엇을 보려 허허한 가슴을 안은 채 유다의 저 텅 빈 들을 헤매고 있는가? “바람에 날리는” 갈대밭을 보러 가진 않았을 게다. 일찍이 뉴먼 추기경이 “사람은 주먹이 자기 면상에 날아드는 순간까지는 자기 편할 대로 믿으려 든다”고 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용기도 마음도 없을 때 맹랑한 낙천론처럼 편한 게 세상에 또 있을까?

 

 

그들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갈릴리에서 도륙한 백성의 피와 그 어머니들과 아내들의 눈물로 염색된 화려한 곤룡포를 걸치고 왕궁 깊숙이 숨어 있다. “나의 새끼손가락이 부왕의 허리보다 굵다”(열왕기상 l2:l0)고 대갈하는 바람에 겨레는 “더러운 악령 하나를 쫓아냈다가 더 흉악한 악령 일곱을 맞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누가복음 11:24-26).

그러면 저 넋은 무엇을 찾아 헤매는가? 예언자다! 지금 이 땅을 구할 한 가닥 기운은 희망이다. 마음은 응어리지고 젊은 얼굴이 웃음을 잃은 지 오래고 패배감과 허무주의가 지성들을 갉아먹고 있다. 냉소와 체념, 증오가 죄책이 고름처럼 엉기고 있다. 이런 때는 “하느님의 사람들”이 필요하다.

“울고 겁에 질린 자들을 격려하는”(이사야 36:3) 소리가 필요하다. “너희 하느님께서 원수 갚으러 오신다”고 말을 전하는 사람, “너희는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복음 l6:32)는 주님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맨손으로 사정없는 칼잡이들에게 덤비고, 아무도 듣지 않는 빈들에서 목이 쉬도록 외치고, 시대의 표지를 읽어 주고, 그러면서 배움터와 일자리와 처자와 끝내는 자기 목숨마저 잃는 무모한 꿈쟁이들이 필요하다.

그들의 고난과 고뇌와 죽음이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속죄요 제사임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겨레가 언젠가 한꺼번에 겪은 운명을 체험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목 떨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다. 자기 한 몸에 온 겨레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짊어지고서.

성염/전 바티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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