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봉의 성서 묵상, 영성의 길(4)

 

바라보라!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3:17-18).

 

신학대학원에 진학했을 때, 제가 공부하고 싶었던 신약성서학 분야에 새로운 교수님이 부임하셨습니다. 저는 그분의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나중에는 조교로 그분을 도왔습니다.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분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려고 힘썼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분과 사무적인 관계로부터 인격적인 관계로 나아갔고, 저의 은사라 할 만한 분이 되셨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유학을 나오기 전에 그분이 맡으신 강의를 몇 주간 동안 대신 맡게 되었습니다. 제 강의를 듣고 나더니 학생들이 제게, “강의하는 것이 교수님과 똑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의아하게 느꼈습니다. 그분을 닮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일이 없었고, 저 자신은 그런 줄을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 선생님을 존경하고 그분의 강의를 집중해서 듣는 동안에 저도 모르게 그분을 닮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목해서 보는 그것에 의해 영향 받고, 또한 귀담아 듣는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습니다. 지속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무엇인가를 주목하거나 무엇인가에 귀 기울이면,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누군가를 좋게 생각하고 자주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을 닮게 되어 있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노력하지 않아도, 인격적으로 사귀는 동안 서로 닮게 되어 있습니다.

 

어릴 적에 교회에서 불렀던 노래가 생각납니다.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위에 계신 주께서 사랑스레 보시네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하나님께서 “사랑스레 보신다”고 말하면서 “조심하라”는 말은 도대체 뭡니까? 사랑스레 보신다면 조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앞뒤가 잘 맞지 않는 가사입니다. 이 가사는 하나님을 ‘하늘의 경찰관’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부를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에게 벌 받을까 무서워서가 아니라, 우리가 보는 그것에 의해 우리가 지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노래의 가사를 이렇게 바꾸면 좋겠습니다.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네가 보는 그것이 너를 다스릴 것이니 네 눈이 보는 것을 조심해.”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그리고 지속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천천히, 점진적으로 그러나 틀림없이 변화합니다. 우리 자신은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변화가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이며, 내가 내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동안, 그와 같은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사귐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 데다가, 성령께서 그 변화를 촉진시키십니다.

 

18절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라봅니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카톱트리조마이’(katoptrizomai)인데, 두 가지 의미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목해서 바라보다’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비추어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주목해서 바라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우리는 주님의 영광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의미를 잘 살펴보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생각해야 바울이 말한 바가 온전히 드러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주목해서 바라봄으로 그리고 그 영광의 거울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성찰함으로 주님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17절에서 바울 사도는 “주님은 영이십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영’이라는 말은 바람처럼 혹은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는 것을 가리켜 ‘관상’(觀想)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contemplation이라고 합니다. Contemplation은 원래 “주목해서 바라보다”라는 뜻으로 쓰이던 말인데, 요즈음에는 “깊이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을 주목해서 바라본다는 말은 그분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마치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난 것처럼, 우리에게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주목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사귀는 매우 중요한 방법입니다. 예배만큼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통로가 없습니다. ‘설교란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회중이 하나님에게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집중하면 거기서 사건이 일어납니다. ‘말씀 묵상’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영적 사귐’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의 섬김’도 역시 하나님을 보게 해 줍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몸을 낮추어 섬기다 보면, 그들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에게 주목하고 하나님을 사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통로입니다. 기도를 할 때 우리의 최고의 관심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자주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에게 혹은 우리 문제와 욕망에 집중되곤 합니까? 우리의 문제와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만드는 도구로 쓰임 받고 끝나야 합니다. 우리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왔다가 그분에게 사로잡혀야 합니다. 기도 중에 하나님을 만나야만 우리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지금 당하고 있는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우리는 또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중에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기도는 요구가 아니라 사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묵상)

 

잠잠히 당신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당신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자주 보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이 가장 많이 듣는 소리는 무엇입니까? 당신의 마음을 자주 사로잡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얼굴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볼 것 같습니까?

 

기도 중에 당신은 무엇에 주목해 왔습니까? 기도로써 당신에게 일어난 변화는 무엇입니까? 기도 중에 주님에 대해 생각하는 것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 보십시오.

김영봉/와싱톤 한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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