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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세월호 참사 1년, 대통령과 권력, 그리고 부활

by 한종호 2015. 4. 5.

한종호의 너른 마당(15)

 

세월호 참사 1년, 대통령과 권력, 그리고 부활

 

 

세월호 참사 1주년이다. 잔뜩 흐린 날씨가 우리네 삶의 풍경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지난 4월 4일 영정을 들고 안산을 출발하여 광화문 광장을 향하여 걷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절규를 들으며 지금은 더 이상 절망하지 않는 것이 희망이지 싶다. 참사 후 1년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365일이지만 유가족들에게는 2014년 4월 16일에서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세월호 특위는 만들어졌지만 그마저도 조사권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한 것은 우리 사회가 어떤 현실에 있는지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진상은 아직도 오리무중이고 책임을 따지는 문제는 언제 정리될 수 있을지 도무지 가늠이 잡히지 않는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데 그렇게 보자면 우리는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가족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고 싶어 하는데, 권력은 그것을 어떻게든 덮어버리고 싶은 모양이다. 이렇게 현실이 굴러가면, 우리는 진실을 알지 못한 채 떠도는 소문이나 권력이 만들어낸 공식설명 외에는 아는 게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것은 우리 생각이 아니라 남이 만들고 우리에게 주입한 생각을 마치 자신의 견해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된다.

 

 

 

 

 

만일 그런 것이 우리 사회에 통용된다면 우리는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들로 전락하고 만다. 권력이 “이렇게 생각하라, 저렇게 믿어라” 하는 말에 휘둘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 식의 사회는 거짓을 따지지 못하게 되고 무엇이 진실인지 알지 못하는 사회가 되고 만다. 그건 누군가 억울한 상황이 되어도 알지 못하는 것이 되며, 누군가 우리를 속여도 그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월호 참사는 그런 현실을 우리에게 경험시키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우리는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그 단어를 말하는 것이 무언가 캥기고 두려운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300명 이상이 수장된 사건에 대해 질문을 던지거나 “이건 문제가 아니냐?”라고 묻는 것이 마치 금기가 된 일을 거론하는 것처럼 된다면, 그런 사회는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망가진 사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가 바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런 사회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누군가 위기에 처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그건 냉혹하고 잔인한 사회가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안전에 대해 자신할 수 없게 된다. 위험에 빠져도 자신이 구조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참담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이 나라 정부와 권력이 얼마나 냉혹한가를 경험했다. 자신의 아이들이 비통하게 숨져간 가족들에 대해 대통령과 정부는 일말의 아픔과 책임을 내보이지 않았다. 책임전가만 할 뿐이다. 그래서 유가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계속 대못만 박고 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정부가 존재하는 이유는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유력한 교회와 꽤 이름 있다고 하는 목회자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발언과 질타를 하지 않는다. 목회를 하면서 누릴 것은 다 누리고 은퇴 후엔 유유자적하는 그네들은 목자와 교회가 해야 할 말과 행동을 포기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게 세월호와 관한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요즈음 들리는 소식은 우리를 더욱 참담하게 한다.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것은 물론이요, 유가족들에게 돈 몇 푼 쥐어주면 입다물겠지 하는 식의 정부의 태도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실종된 현실을 보여준다. 극심한 반발만 사고 있다. 문제의 핵심을 딴 곳으로 돌리고만 있을 뿐이다. 비열한 작태이다.

 

 

 

 

오죽하면 엄마들이 머리를 삭발하겠는가? 이 고통의 현장을 온몸으로 부둥켜안고 지켜온 일부 목회자와 교회를 제외하고는 이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다. 으리번쩍한 건물을 지으면 뭐하나, 수만 명 모여 우리들의 리그로 자화자찬하면 될성싶은가? 고통 받은 이들에게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교회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면 그건 이미 교회가 아니다. 자기 배만 살찌우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 비굴한 집단이 될 뿐이다.

 

나사렛 예수는 마태복음 13장 31절에서 겨자씨가 자라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일깨우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직후 이 나라는 눈물바다와 함께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각성의 물결이 일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언제였나 싶게 되어버렸다.

 

성서는 이런 현실 앞에서 소중한 것을 일깨우고 있다. 겨자씨만한 믿음 하나 있으면 그것이 자라나 큰 나무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크기만 큰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대목은 공중에 거처 없이 떠도는 무리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준다는 대목이다. 교회가 바로 이런 현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모두 이렇게 공중에서 떠도는 처지가 되었다. 대통령은 이들을 반기지 않는다. 여당도 그렇다. 여당의 김진태 의원은 “세월호 선체는 인양하지 말잔다. 괜히 사람만 또 다친다”라며 “대신 사고해역을 추념공원으로 만들어 아이들은 가슴에 묻자”고 한다. 이게 사람이 할 소리인가? 그는 그간 세월호 선체 인양에 반대 입장을 보여 왔다. 지난해 11월 라디오 방송 인터뷰에서 “추가 희생자가 나타날 수 있고 돈이 너무 많이 든다.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며 선체 인양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야당은 정도만 다를 뿐이지 이들 역시도 유가족들을 자신의 식구처럼 반기고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유가족들은 공중에서 떠도는 새들처럼 외롭고 기가 막힌 신세가 되어버렸다.

 

정부가 거들떠보지 않으면 교회라도 이들을 돌보고 아껴야 하는데 대부분의 교회는 정부나 권력의 태도와 다를 바 없이 유가족들을 외면하고 있다. 도대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 있나? 이번주는 그렇지 않아도 부활절이다.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식과 가족의 죽음 앞에서 무너진 영혼을 되살려야 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인데 ‘부활’은 ‘종교적 언어’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현실에서 정작 부활의 축복을 경험해야 하는 이들은 배제되고 있다.

 

실로 통탄할 노릇이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질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자업자득이다.

 

세월호의 문제는 단지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문제요, 우리 모두의 도덕과 윤리의 문제요,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문제다. 하지만 모두가 이런 과제를 뒷전에 놓고 있다. 그러면서 정작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들은 모두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씩 마음을 모으면 그것이 겨자씨이다. 우리가 아, 이래서는 안 된다, 다 함께 힘을 합치자, 하면 그것이 겨자나무가 되는 길이다. 그러다보면 세월호 참사로 상처받고 비틀거렸던 이들이 그 나무의 그늘에서조차도 안식을 취할 수 있다. 위로를 얻고 기력을 되찾을 수 있다. 아무리 작게 보여도 그것이 힘이 된다. 그래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진실규명을 위한 노력이 중단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사고 1년의 시간 뒤에,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의 핵심은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과 몸이 공중에 떠도는 새들처럼 되어버리고 만 이들을 하나씩 찾아서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로써 세상은 달라진다.

 

진실규명을 위한 모든 법적, 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아니면 또 다시 기만이 판을 칠 것이다. 그로써 당사자들은 좌절하고 우리 모두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된다. 그것은 이 나라의 정신을 해체시키는 일이다. 그런 곳에서는 내일을 위한 희망이 태어나지 못한다.

 

이제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함께해야 한다. 그것이 겨자씨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 심겨져서 자라나도록 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점점 큰 소리가 되도록 해야 한다. “이건 아니야!” 하고 우렁찬 함성이 되어야 한다. 유가족들을 응원하고 이들이 외롭지 않게 소리 내고, 함께 걷고 서명하고 뜻을 같이 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우리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게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지금은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여도, 우리가 뜻을 꺾지 않으면 새로운 미래는 열린다. 어디에 자신의 곤고한 마음과 몸을 맡겨야 할지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가 겨자나무가 되는 것이다. 그 어떤 나무보다 커져서 세상이 무시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겨자나무 앞에서 압도당하는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비통함을 넘어 우리는 세상을 온전히 새로운 기초 위에 세우게 될 것이다. 아무런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 대통령과 권력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을 것이다. 억울한 심정을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이들은 겨자나무 가지에 둥지를 틀게 될 날이 속히 올 것이다.

 

거기서 기운을 차리고 나면, 우리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모두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일 것이다. 우리 하나 하나가 겨자씨에 불과해도 함께 있으면 온 세상을 뒤덮을 겨자나무가 될 것이다. 힘들고 외로운 이들이 겨자나무에서 안식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이런 일들이 가능해질 것이다. 오래 기다리지 않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오는 것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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