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16)

 

목사 안수례를 앞둔 이에게

 

 

화창하고 청명하여 오히려 서러운 날입니다. 꽃 시절을 한껏 즐거워 할 수 없는 나날입니다. 꽃 향기 저 너머로 처연하게 들려오는 피 울음소리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잃은 이 땅의 라헬들은 위로받기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정부는 유가족들에게 돌아갈 거액의 보상금 운운하며 사태를 휘갑치려 합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포획된 이들은 차마 해서는 안 될 말조차 꺼리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아무리 애써보아도 피눈물이 잦아들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사람들은 이제 그만 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말합니다. 세월호 문제 때문에 경제가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주류 종교는 자본과 권력의 욕망에 굴복한지 오래입니다. 한기총이 주최한 부활절 연합예배에서는 세월호 문제가 단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불편한 것은 말끔히 소거시켜 버리는 그들의 편의주의에 예수는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셨을까요?

 

저는 가끔 마종기 시인의 <시인의 용도>라는 시를 떠올리곤 합니다. 그는 이디오피아에서, 소말리아에서, 중앙 아프리카에서 굶고 굶어서 가죽만 거칠어진 수백 수천의 어린이가 검게 말라가고, 또 매일 쓰레기처럼 죽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시인의 용도’가 뭐냐고 묻습니다. 그는 하루도 그칠 새 없이 총소리가 들려오고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시인의 용도’가 뭐냐고 묻습니다. 정말 시인의 용도는 무엇일까요? 그는 같은 제목의 다른 시에서 고통스럽다는 말, 외롭다는 말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인의 용도가 무엇이냐는 그의 질문을 통해 그는 시인의 역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아픔을 아파하는 것이고, 상처를 상처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멀쩡해 보이는 세상 이면에 있는 상처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시영의 <내가 언제>라는 시를 들어보셨는지요?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이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曠原을 거쳐서 내게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시인은 ‘우주의 사업에 동참’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참 깊게 다가옵니다. 하이데거는 시를 ‘언어의 사원’이라 한 것도 어쩌면 같은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즘 시인들의 이런 치열한 자기 물음에 빗대어 ‘목사의 용도’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답은 백인백색이겠습니다만, 저는 시인의 용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며칠 후면 목사 안수를 받으시네요. 제게 목사 안수례 보좌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잠시 멋칫했습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심사숙고 끝에 하신 부탁을 뿌리칠 명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문득 31년 전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할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긴 세월을 이 길 위에 서 있는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라고 혼잣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안수례 이전과 이후가 크게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만, 일종의 입문의식(initiation)으로서의 목사 안수례는 참 중요한 의례라고 생각합니다. 입문의례는 ‘문지방을 넘는 체험’입니다. 문지방을 경계로 하여 방과 마루가 나뉘고, 안과 밖이 나뉩니다. 의례는 ‘몸을 통한 상징적 행위이자 의미전달의 수단’입니다. 유대인들의 할례처럼, 기독교인들의 세례처럼 안수식은 새로운 존재로의 초대입니다. 마땅히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흔연하지 않은 것을 보면 한 평생 목사로 살아온 내 삶이 그렇게 자랑스럽지 않은 때문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꾐에 빠져서 말씀의 대언자로 살아왔지만 자기에게 돌아온 것은 가까운 이들로부터의 따돌림과 미움이었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야훼의 이름으로 다시는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합니다. 모세도 부름을 받았을 때 몇 번씩이나 그 부름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그는 야훼의 강권을 끝내 뿌리치지 못했습니다. ‘마음 내키지 않는 예언자’(reluctant prophet)라는 말과 만났을 때 부름 앞에서 주저하며 자꾸 뒷걸음치던 내 마음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공모의 미소를 지었던 적이 있습니다. 야훼께서 왜 자꾸 달아나려는 이들을 붙들어 쓰시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조금 앞서 그분의 손에 붙들린 사람으로서 몇 마디 당부의 말을 해도 될까요? 조금 주제넘은 짓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정으로 드리는 말씀이니 너무 허물치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소명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색을 하고 말씀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몇 마디 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구도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진실한 사람의 길 혹은 성실한 구도자의 길을 걷기보다는, 유능한 목회자가 되는 일에 더 마음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본질에 대해 묻기보다는 목회의 방법에 대해 물으며 지냅니다. 목회의 방법을 가르치는 모임에 많은 이들이 몰리지만, 본질적인 물음을 다루는 모임은 대개 외면당합니다. 논어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군자는 본에 힘쓰고, 본이 바로 서면 도가 저절로 따른다”(君子務本, 本立而道生). 본에 힘쓰는 사람들은 자기를 완성태로 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학생정신에 투철합니다. 진리가 몸과 마음에 배어들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입니다. 그러니 방심해서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조급증을 내서도 안 됩니다.

 

공부는 문자 공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몸으로 체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일쑤 말씀을 삶으로 번역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진짜 공부는 그런 것일 겁니다. 연암 박지원은 책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상 깊게 설명합니다. 푸른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뜰에서 마침 새가 지저귀고 있었습니다. 그 새를 보며 연암은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날아가고 날아오는 글자요, 서로 부르며 화답하는 글월이구나. 다섯 빛깔 무늬가 들어 있어야 문장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이것보다 더 좋은 문장은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 책을 읽은 것이다.”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꽃을 보라 하신 말씀과 여축없이 일치하는 말이 아닙니까? 문자에 매이는 사람은 새 ‘조’ 자 한 글자로 그 생생함을 없애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면 저 공중을 나는 새의 빛깔과 모양과 소리가 누락되게 마련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지리멸렬을 면치 못하는 까닭은 이런 공부의 묘리를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공부가 철저하지 않은 데도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도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새로운 배움에 개방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자유의 새 땅으로 인도하려 하기보다는 애굽의 끓는 가마솥 곁에 붙들어두려 합니다. 그들은 인생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섬깁니다. 구도자는 불확실한 삶을 향해 자기를 개방하고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입니다. 발밤발밤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은총에 감격하는 사람입니다. 진실에 가 닿으려는 사람은 절망조차도 진실로 인도하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정쩡한 절망 끝에 초월의 세계로 재빨리 달아나지 말아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고 성경 묵상을 하십시오. 시간을 정해놓으라는 것은 그렇게 해야 내면의 질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흐름을 자꾸만 끊어내 그분 앞에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세상의 중력에 속절없이 이끌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엎드립니다.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닦기 위해서입니다. 개신교도들에게 성무일과가 시행되지 않는다는 게 참 안타깝습니다. 오로지 그분 앞에 서는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시간 속에 마련한 지성소입니다. 종교 상인 혹은 여리꾼이 되지 않으려면 자기 삶을 자꾸만 하늘의 뜻에 맞추어 조율해야 합니다.

 

파당을 짓거나,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일을 피하십시오. 공동체를 이루는 일은 아름답지만 파당을 짓는 일은 진리 공부에 해가 됩니다. 파당을 짓는 까닭은 이익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까? 이익의 원리가 삶을 사로잡을 때 우리는 진리의 길에서 영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은 외로움을 선택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한 말씀을 나는 늘 마음에 새기고 지냅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 드리려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습니까? 내가 아직도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갈라디아서 1:10).

 

이 말씀을 잊지 마세요. 목사 안수식을 앞두고 여러 어른들께 인사하는 과정에서 느낀 당혹감을 말씀하셨지요? 관행화된 일을 따라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분별의 영을 주께 구하면 지혜를 주시지 않을까요?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그 장엄한 선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은 언제나 사건이 될 때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강대상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있는가 생각할 때마다 나는 무기력증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회당에서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이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 있는 말씀이라고 놀랍니다. 대체 어떤 말씀이길래 그런 반응이 나타난 것일까요? 저는 두 가지 점에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예수의 가르침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거룩의 현존 앞에 세울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예수 선포의 특색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미 상투어로 변해버린 종교어, 닳고 닳아 매끄러워진 말을 가급적 피해야 합니다. 그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속뜻을 드러낼 수 있는 해석의 능력이 절실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텍스트에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통로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존재와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오롯이 일치되었습니다. 그의 말씀이 곧 존재였고, 그의 존재가 곧 그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말씀 선포자에게 요구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리기 위해 시간을 내십시오. 많은 목회자들이 탈진 증세를 보입니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이 유입되는 통로 하나를 닫고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계절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예언> 첫 연을 잘 아시지요?

 

한 알의 모래에서 세상을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면

네 손바닥 안에 무한이 있고

순간 속에 영원이 있다

 

이 눈이 열리면 삶의 신산스러움을 넉넉히 견딜 수 있을 것입니다. 오랜 훈련과 기다림 끝에 이제 마침내 새로운 삶의 출발선상에 선 것을 축하합니다. 부디 문지방 너머의 세상에서 더욱 깊어지시길 빕니다. 그 길의 동행이 되어 참 기쁩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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