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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

짧은 본문, 긴 본문

by 한종호 2015. 4. 15.

민영진의 히브리어에서 우리말로(14)

 

짧은 본문, 긴 본문

 

 

“사울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아뢰었다. ‘오늘 소인에게 응답하지 않으시니, 웬일이십니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여, 만약 그 허물이 저나 제 자식 요나단에게 있다면 우림이 나오게 하시고, 그 허물이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다면 둠밈이 나오게 하십시오.’”

 

위에 인용된 본문운 <공동번역> 사무엘상 14장 41절의 내용이다. 밑줄이 그어진 부분은 <개역개정>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개역개정>의 것은 짧은 본문이고 <공동번역>은 긴 본문이다.

 

히브리어 원문 성서에도 밑줄 친 부분의 내용은 나와 있지 않다. 따라서 <공동번역>의 밑줄 친 부분은 히브리어 본문의 반영이 아니라 그리스어 칠십인역의 본문을 번역한 것이다.

 

그리스어 칠십인역 성서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번역되기 시작한 것으로서 그때 사용된 히브리어 본문은 지금 남아 있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보다 약 천 년이나 앞선 본문으로서 원본과 시간상으로 아주 가깝다는 것이 특징이다.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과 그리스어 칠십인역 사이에는 단순한 원본과 번역본의 차이 외에도 내용과 편집사의 차이도 현격하다.

 

 

 

여기에 제시된 사무엘상 14장 41절은 본문의 전달 과정에서 생긴 오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히브리어 본문이 전달된 형식 가운데 하나가 바로 베껴 쓰기였다. 베껴 쓸 때는 한 사람이 원본을 큰 소리로 읽어주면 여러 명의 베껴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쓰곤 하였다.

 

때로는 베껴 쓰는 사람이 직접 원본을 보고 베끼기도 하였다. 그런데 불러주거나 베껴 쓰는 과정에서 읽는 이가 착각을 일으켜 같은 본문을 두 번 읽으면 중복오자(重複誤字, dittography)가 생기고, 줄을 놓쳐 어느 부분을 빼놓고 읽으면 탈락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탈락 현상이 생기는 주요 원인들 중 두 가지가 특히 유명하다. 하나는 유사문미(類似文尾)이고 다른 하나는 우사문두(類似文頭)이다. 몇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어느 글 안에 유사한 단어로 시작되는 문장들이 잇거나 혹은 유사한 단어로 끝나는 문장들이 있을 때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

 

사무엘상 14장 41절의 경우는 본래의 히브리어 원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낱말이 세 번 나오는데 복사 과정에서 첫 번째로 나오는 ‘이스라엘’을 읽은 다음에 그 읽는 이의 눈이 몇 줄을 뛰어 넘어 세 번째 나오는 ‘이스라엘’을 읽어버렸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는 글자들이 모두 빠져버린 것이다.

 

<공동번역>은 히브리어 본문(MT)을 번역한 것이면서도 히브리어 본문의 전달 과정에서 빠진 부분은 칠십인역(LXX)에서 보충해 넣었다.

 

민영진/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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