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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

조봉암 사형과 진보정치 압살

by 한종호 2015. 4. 15.

김삼웅의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18)

 

조봉암 사형과 진보정치 압살

 

 

6.25 한국전쟁이 겨우 정전협정으로 마무리 된 1950년대 중반, 한국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체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으들어가 죽어버렸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이 휩쓸고 간 한반도 남쪽에는 멸균실 수준의 반공체제가 이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조봉암은 ‘평화통일론’과 “노동독재도 자본독재도 거부하는” 민주사회주의 깃발을 내걸고 진보당을 창당하여 활동에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승만의 라이벌 제거와 ‘반공 히스테리’의 희생물이 된 것

 

이승만 대통령에게 현재적이든 잠재적이든 도전자는 죽음(죽임)이 따랐다. 제헌의선거 때 이승만과 대결한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처형되고, 잠재적 라이벌 관계이던 김구는 암살되었다. 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은 병사하고, 현직 부통령 장면은 수하들이 총을 쐈지만 ‘불행히’(다행히) 죽지 않았다. 다음은 조봉암의 차례였다.

 

제2, 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 도전하고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정권위협적인 인물이 되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정부 조각 때에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했던 사람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 처형하고 진보당을 해산시켰다.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이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배치된다는 이유를 댔지만 목적은 정적제거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평화통일운동과 비판세력을 종북 좌경으로 몰아붙이는 터에 당시 정적이나 비판세력에 붉은 딱지를 붙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청년 조봉암은 공산주의 사상을 민족해방운동의 이념으로 삼고 사회혁명사상으로 받아들여 일제와 치열하게 싸우다가 광복을 맞아 전향했다.

 

이승만 정권에 똬리를 튼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재빨리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하면서 독립운동가ㆍ남북협상세력ㆍ반독재민주인사들에게 용공의 너울을 씌우고 더러는 형장으로 끌어갔다.

이승만 정부는 사법부를 동원하여 독립운동가이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두 번이나 지낸 사람을 용공으로 몰아 처형했다. 어김없는 ‘사법살인’이었다. 노회한 이승만은 조각을 하면서 친일파ㆍ우파 일색의 인물들만으로는 미국과 유엔의 지지가 어려울 것으로 알고 공산주의자 출신 독립운동가로서 해방 후 전향하여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참여한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친일 지주계급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견제하고, ‘이승만 정부’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로 조각되었음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그를 등용했다.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천거설도 있었다.

 

한민당의 지원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조각에서 한민당을 철저하게 배제했다. 이들이 친일지주 출신들이라는 이유와 함께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세력이 될 것으로 인식하고 견제한 것이다. 한민당을 견제하면서 시급한 현안인 농지개혁을 단행할 적임자로조봉암만한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독립운동, 공산주의운동을 하면서 친일파 지주계급에 증오심을 갖고 있었고, 미국과 유엔 등 대외용으로도 적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가을 조봉암의 대중적 인기는 국무위원 누구 못지않았다. 국민의 대부분이 농민이고 일제와 친일 지주들의 수탈에 시달려 온 농민들은 정부의 농지개혁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북한에서는 이미 해방 직후에 ‘무상몰수ㆍ무상분배’의 방식으로 농지개혁이 이루어 진 터였다.

 

조봉암은 농지개혁을 서둘렀지만 한민당의 제동으로 쉽지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날이 갈수록 농민들로부터 인기가 높아가는 조봉암의 행보에 심기가 편치 않았다. 농민들은 조봉암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신의주형무소에서 손가락 일곱 마디가 잘려진 손목을 잡으며 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이승만과 대결하게 된 것은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면서부터였다. 이후 3대 대선 때에는 온갖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표가 나왔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세력에게 조봉암이란 존재가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승산이 어려웠다. 그래서 제거공작이 시작되었다.

 

‘사법살인’에는 법조계가 동원되었다. 그들은 권력의 하수인이 되어 양심과 법률을 팔았고, 조봉암은 끝내 사형대에 서게 되었다. 그를 ‘사법살인’으로 몰아간 검사ㆍ판사 중에는 친일행위자들이 적지 않았다.

 

조봉암은 1956년 1월 26일 진보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본격적인 혁신정당의 창당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조봉암은 평화통일론을 제시하였다.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론에 맞선 통일방안이었다. 평화통일론을 제시한 조봉암을 국가보안법위반 협의로 구속하고 진보당을 기소한 검찰은 “평화통일이라는 용어는 북한괴뢰가 사용하고 있는 문구인데 진보당에서 이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봉암의 「평화통일에의 길」에서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현 대한민국 헌법의 파괴 내지 폐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대한민국을 부인하고 국헌을 위배하며 정부를 참칭하는 것이 되므로 진보당의 통일론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된다”고 주장했다.

 

조봉암의 제거에는 보수신문과 야당, 미국에서도 침묵 또는 ‘묵시적 동조’의 분위기여서 일을 꾸미는데 어렵지 않았다.

 

검찰은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하고, 2월 16일 조봉암과 간사장 윤길중을 비롯하여 박기출ㆍ김달호ㆍ신창균ㆍ조규희ㆍ이명하ㆍ조규택ㆍ전세룡ㆍ이상두ㆍ권대복ㆍ이동화 등을 국가보안위반혐의 등으로 구속 기소했다. 조봉암에게는 국보법 외에도 간첩죄와 무기불법소지죄 등이 병합되었다.

 

 


<재판중인 조봉암 - 위키미디어 >

 

 

자유당은 1958년 24파동을 일으켜 국보법을 개정하였다. 언론탄압과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탄압하려는 목적이었다. 구속되기 전 측근들이 조봉암을 찾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하고 해외망명을 권하였다. 조봉암은 “나도 진보당 탄압의 정보를 들었지만 혼자 편하자고 망명이나 도주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조봉암을 죽이기로 한 이승만 정부의 음모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첩자 양명산을 내세워 불순자금을 조봉암에게 전달했다는 모략 속에서도 1심은 징역 5년을 선고하는데 그쳤다. 용공판사를 죽이라는 따위의 관제시위가 벌어지고,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은 세 차례나 조봉암 문제를 언급하였다. 마침내 고등법원은 사형을 선고하고 대법원도 그대로 따랐다. 짜여진 각본대로였다.

 

조봉암에 대한 재심청구도 기각되었다. 대법원의 주심 판사였던 김갑수가 재심의 주심이 된 것도 상식과는 거리가 먼 처사였다. 일반적으로 사형수는 몇 차례 재심청구를 하고 확정판결 뒤에도 한 두 해 정도는 형의 집행이 연기되는 것이 관례였다.

 

7월 30일 하오 3시, 재심청구 기각통보를 받은 대검은 긴급회의를 열어 이튿날 상오에 조봉암의 사형을 집행할 것을 결정,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 날이 밝아 7월 31일 오전 10시 30분, 대기중인 대검검사실에 전화로 “집행하라”는 법무장관 홍진기의 서명이 떨어졌다.

 

집행관은 의례적인 절차에 이어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 박사는 소수가 잘살기 위한 정치를 하였고 나와 나의 동지들은 국민 대다수를 고루 잘 살리기 위한 민주주의 투쟁을 했소.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런데 나는 이 박사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2011년 1월 20일 사법부는 재심에서 5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죽은 조봉암은 살아나지 못하고, 그의 평화통일론과 진보정치는 이어지지 못했다.

 

김삼웅/전 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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