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최명덕의 '유대인 이야기'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1)

by 한종호 2015. 4. 20.

최명덕의 유대인 이야기(10)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1)

 

 

제2 성전이 로마에 의해 파괴되기 전,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은 그곳에 살고 있는 시민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순례객들, 전 세계의 디아스포아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성지 순례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요셰푸스에 의하면, 주후 65년경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적어도 삼백만 명의 순례객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셰푸스의 이 기록을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 인구를 십만 명 정도로 추정하여, 유월절에는 그 두 배에 가까운 이십만 명 정도의 인구가 몰려들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당시 예루살렘의 크기를 오늘날의 옛 성 전체의 크기로 본다고 해도 이십만 명이면 이미 포화상태다.

 

유월절 스케치

 

전 세계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최소한 일생에 한 번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겼다. 또한 명절 중 제일 큰 명절인 유월절이야말로 그들이 가장 원하는 순례의 시기였다. 유월절은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겨우내 내린 비로 온 들과 산은 녹색으로 물들고 각종 꽃들이 만발하는 시기다. 일 녈 중 예루살렘이 가장 붐비는 시기가 이때였다.

 

모든 여관은 순례객들로 만원을 이루었고, 집집마다 순례객들로 가득 메워질 뿐 아니라, 빈 터마다 순례객들이 친 텐트들로 인해, 온 예루살렘은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민박을 하는 경우 어느 누구도 숙박비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희생제물로 바친 양의 가죽을 집주인에게 주는 정도였다. 양가죽은 양피지나 물주머니, 포도주 주머니를 만드는 등 여러 가지로 유용했으나 여행중에 있는 사람이 가공하기에는 너무나 번거롭고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텐트에 숙소를 정한 사람들은 유월절 기간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좁은 예루살렘에, 그렇게 많은 순례객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유월절 기간 동안 머물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탈무드에 서는 기적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순례하러 온 유대인들의 모습도 각양각색이었다. 시리아, 소아시아, 싸이프러스, 그리스, 바벨론, 로마, 이집트 등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마다 그 지방 특유의 복장과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어도 다양하였다.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서는 아람어, 헬라어, 히브리어 등이 혼용되었다. 유월절이 가까워 오면 예루살렘에서는 양, 소, 향료 등의 거래가 활발하였다. 양이나 소는 이스라엘 내에서 공급되었으나 향료는 멀리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부터 수입되었다. 향료를 실은 낙타의 대열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하는 모습은 유월절 전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유월절이 가까워져 예루살렘이 인파로 북적거리면 로마의 병사들도 바빠졌다. 지중해 해변의 시세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총독은 유월절이 되면 시세리아 본부로부터 군인들을 파병, 예루살렘에 있던 군대와 합류시켜 유대인들의 동태를 감시하게 하였다. 연중 가장 낳은 사람들이 성전에 모여드는 이때야말로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당시 헤롯의 궁 옆에 있던 로마 군대의 요새는 성전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위치에 높게 건축되어 있었다. 로마 군인들은 높은 요새 위에서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오늘날도 예루살렘에 가면 옛 성의 욥바 문과 다윗의 탑 사이에 남아 있는 당시 로마의 요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24반열로 조직되어, 돌아가며 한 반열씩 성전의 일을 돕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레위인들은 고향에 머무르며 가사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유월절이 되면 24반열 모두가 성전에 나가 봉사하였다. 따라서 유월절이 되면 수천 명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성전의 일을 도왔다.

 

유월절 전날

 

유대 전통에 따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월절 하루 전에 자기 집에 남아 있는 모든 빵과 빵 반죽을 없애야만 하였다. 유월절에는 절대로 누룩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월절 전야가 되면 모든 유대인들은 올리브 램프에 불을 켜고, 흑 빵 부스러기라도 집안에 남아 있지는 않은지 샅샅이 뒤졌다. 찾아 낸 빵이나 빵 부스러기, 반죽 등은 한 곳에 모아 놓고 성전에서 보내는 신호를 기다렸다. 모든 사람이 동시에 유교병(누룩이 들어 있는 모든 빵이나 반죽)을 불에 태워 없애야했기 때문이다. 신호는 감사 제물로 바쳤던 유교병 두 덩어리로 하였다. 유월절 전날 제사장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화목제의 감사 예물로 드렸던 빵(유교병) 두 덩어리를 성전 바깥에 회랑 꼭대기에 올려놓았다. 빵(유교병) 두 덩어리가 회랑 꼭대기에 보이는 동안에는 유교병을 먹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제사장이 한 덩어리의 빵을 치워 버려 단지 한 덩어리의 빵만 보이면 그 시간부터 유교병(빵)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제사장이 두 번째 빵마저 치워버리면 그것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은 유교병을 불에 태워야 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예루살렘 온 시가지에 정확한 시각을 알릴 수 없었다. 성전이 잘 보이지 않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보조 수단이 강구되었다. 제사장들은 감람산 꼭대기에 두 마리 암소를 데려다가 쟁기질하게 하였다.

 

두 마리가 다 쟁기질하고 있으면 아직은 유교병을 먹을 수 있다는 표시였고, 한 마리만 쟁기질을 하고 있으면 그 시간부터 유교병을 먹을 수 없다는 표시였다. 나머지 한 마리마저 보이지 않으면 즉시 유교병을 불에 태워 없애라는 표시였다. 시계가 없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동시에 유교병을 없앨 수 있었다.

 

 

 

 

유월절 첫째 날

 

유월절 첫날 점심 무렵이 되면 모든 유대인들은 양이나 염소를 어깨에 메고 성전으로 나아갔다. 오후가 되면 평소보다 한 시간 이른 오후 3시경에 제사가 시작되었다. 제사는 세 차례 반복되었다. 첫 번째 들어온 예배자들이 성전 뜰을 가득 채우면 레위인들은 성전문을 닫았다. 성전문이 닫히면 쇼파(양각나팔)를 불어 희생제사가 시작됨을 알렸다. 양이 도살되는 동안 레위인들은 주악에 맞춰 감사 찬송을 불렀다.

 

첫 번째 예배자들이 희생제사가 끝나면 두 번째 예배자들이 희생제물을 갖고 성전에 들어왔다.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 예배자들이 성전에 들어온다. 당시 세 번째 예배자들은 ‘게으름뱅이들’이라고 불렸다. 한번은 힐렐 시대에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늙은이 한 사람이 사람들에게 깔려 죽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 이후 크게 걱정한 유대인들은 유월절 희생 제사를 엄숙하고도 질서 있게 진행하였고, 그 결과 예수님 당시에는 두 시간 정도에 모든 유월절 희생 제사를 질서 있게 마칠 수 있었다.

 

희생 제사를 끝낸 유대인들은 각각 자기의 희생제물을 어깨에 메고 성전에서 나와 자기의 처소로 돌아가 유월절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유월절 첫날밤인 ‘구속의 밤’을 준비하였다. 예루살렘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양과 염소를 나무꼬치에 꿰어 굽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하였다. 화로는 흙으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는데,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이었다. 활로는 흙으로 만든 것을 사용하였는데,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이었다. 만일 비가 오면 집 안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무리지어 함께 양고기를 먹으며 유월절의 첫날밤을 축하였다.

 

이날 밤 모든 사람들은 흰색 옷을 입었고, 이 시간은 친척, 친구, 노인, 아이, 가난한 사람, 부자 할 것 없이 모두가 하나 되는 시간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부잣집에 초대받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밤이기도 하였다. 이날 밤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있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그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들을 함께 나누었다. 온 예루살렘은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의 기적을 노래하며, 출애굽의 역사를 재현하는 거대한 민족적 축제로 밤을 새웠다.

 

유대인의 절기는 음력을 따른다. 따라서 니싼월 14일 전야를 절기로 지키는 유월절은 보름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 예루살렘 이곳저곳에 모여 앉아 양고기를 먹으며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유대인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마짜와 쓴 나물을 먹으며 과거의 고통을 기억하였고, 포도주와 양, 염소고기를 먹으며 자유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포도주를 마시며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왜 이 밤이 다른 날 밤과 다릅니까?”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는지 이야기하고 희생양, 마짜, 쓴 나물 등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하였다.

 

설명을 마치면 다 함께 할렐송(감사 찬송)을 부르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찬송이 끝나면 축도로 모든 순서가 마쳐진다. 당시 축도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적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과 로마 군인으로부터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을 구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유월절 식사가 끝나면 밤이 깊어 새벽 1시 혹은 2시 정도가 되었는데, 이때부터는 자유롭게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린이들은 잠자리에 들어가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또 다시 모여 출애굽에 관한 성경 말씀에 대하여 계속 토론하였다. 한밤중에 성전문이 다시 열리면 많은 사람들이 다시 성전으로 돌아가 기도와 찬송을 밤을 새웠다.

 

최명덕/건국대학교 교수, 조치원성결교회 목사

'최명덕의 '유대인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대인의 장막절(1)  (0) 2015.06.09
예수님 당시의 유월절(2)  (0) 2015.05.04
유대인의 유월절(2)  (0) 2015.04.03
유대인의 유월절(1)  (0) 2015.03.23
유대인의 안식일(4)  (0) 2015.02.2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