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17)

 

목사들의 참회록인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이해서 광화문의 풍경은 살벌했다. 경찰은 시민들을 완전히 봉쇄하고, 유가족들은 범법자들처럼 끌고 갔다. 인륜의 바닥을 보인 정권이다. 자식을 잃고 그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요구하는 이들을 잡아가는 권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러는 걸까?

 

교회도 별로 다를 바 없다. 어느새 “세월호”는 입에 담기 쉽지 않은 부담스러운 용어가 되어버렸나 보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권력에 대한 비판, 정치적 발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더 나가서는 지겹다고 하는 자들도 있으니, 이건 인간 이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1주기를 맞아 글을 올린 김동호 목사의 페이스 북이 난리도 아니었다. 노란리본을 다네마네 가지고 자신의 생각을 적은 글인데, 문제는 세월호 참사의 본질에는 단 하나도 다가가지 않고 노란리본 타령만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세월호 1주기.

노란 리본을 단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띈다.

특히 정치인들. 정치인들이라고 다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별로 진실성은 없어 보인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거리에 서서 기도하던 바리새인 같은 느낌이 든다.”

 

노란리본 뒤에 숨은 위선과 가식을 꼬집는다. 이게 문제가 될 리는 없다. 그러면 무엇이 그의 페이스북을 소란스럽게 한 것일까? 김동호 목사는 “진실성”의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진실성은 무엇일까? 이게 문제의 핵심이 된다.

 

김동호 목사는 자신이 노란리본을 선뜻 달지 못하는 것은 혹여 자신이 남들에게 보이려고 그러지는 않은가 하고 돌아보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내게도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내가 안다. 그래서 나는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리본을 다는 건 비겁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쉽게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 다는 것이 옳다.

 

그의 막내아들은 아버지에게 추도예배를 가자고 권한다.

 

“막내아들이 광화문에서 열리는 세월호 추도예배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난 함께 가지 못했다. 추도예배 하나 가 놓고 나를 변명할까봐 그것이 싫었다.

혹시 우리 막내아들 녀석 내가 추도예배 같이 안 갔다고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생각도, 의식도 없는 애비라고 오해하지는 않았을까 조금은 걱정된다. 그건 아닌데…”

 

추도예배를 가지 않은 까닭은 그것 하나로 세월호에 대한 의무를 다한 것은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고백이다. 그는 그 나름의 추도방식과 슬픔의 예를 다하려는 것이라는 의지를 여기서 이미 읽게 된다. 그는 노란리본을 달았냐, 아니냐로 그 사람의 마음을 구분 짓고 갈라놓지 말라는 뜻으로 다음 글을 잇는다.

 

“노란 리본을 달면 종북좌파로 몰리기 십상이다. 높은 뜻 정의교회 오대식 목사의 페이스 북을 보았다. 큰 일 할 목사가 노란 리본 달고 다니면 안 된다고 누가 충고했다는… 개의치 않고 당당하게 노란 리본을 단 오대식 목사가 나는 좋다.

그래도 난 선뜻 노란 리본을 달지 못하고 있다. 큰 일 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종북좌파로 몰릴까봐도 아니다.

누군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군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하고.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안 달 수도 없지만,

누가 뭐란다고 노란 리본 달 수도 없지 않은가?

노란 리본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되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뭐라 그래도 안 된다.

노란 리본 달았다고 다 바리새인도 아니고,

노란 리본 안 달았다고 모두 다 보수 꼴통도 아니다.

우리 높은 뜻 교회에는 노란 리본 단 목사도 있고,

나처럼 노란 리본 안 단, 아니 못 단 목사도 있다.

노란 리본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고,

노란 리본 못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다.

너는 네 식대로 아파하고,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좀 아파 하자.”

 

맞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방식과 선택으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나누고 기린다. 그러니 김동호 목사의 선택은 그의 선택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뭔가 그의 글을 읽고 난 뒤 마음이 깔끔하지 못하다.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는 노란리본 달지 않은 자신의 마음도 아프니, 그 아픔을 그대로 인정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물어보자. 그러면 되는가? 유가족들이 지난 1년 동안 길거리 시위와 집회, 투쟁을 해온 시간에 담긴 내용을 제대로 알고 이러는 것일까? 특별법을 뭉개고, 시행령도 무력화시키는 정부권력에 대해 그는 분노 한번 제대로 느껴본 것일까? 노란리본 단 정치인들의 진실성 문제는 바로 이 대목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위선의 정체는 진상규명을 가로막으면서 마치 진상규명하는 듯 하는 거짓에 있는데 그는 이에 대해 단 한마디도 없다.

 

이게 그가 아파하는 그 자신 나름의 방식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방식의 차이 문제가 아니라 ‘가짜’일 뿐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아파하는 것은 다만 자식을 졸지에 잃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진상을 알고자 하는 일에도 권력의 기만과 탄압이 이어지고 있기에 더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고통에 함께 하려면,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세력과 맞서야 옳다. 그건 노란리본을 달았느냐 달지 않았느냐의 문제를 넘어선다.

 

“노란 리본 못 단 사람도 세월호가 마음 아프다.”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다.

 

‘그래요? 어떻게 아프신데요? 아파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이 질문에 대해 그가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진성성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진짜로 대면해야 할 문제를 피하고 있을 뿐이라는 의심을 굳히게 될 수밖에 없다.

 

 

 

 

선한목자 교회 유기성 목사의 글 또한 그 글을 읽는 이들을 가슴 아프게 한다. 그는 세월호 참사 당시 이스라엘에 안식년으로 있었다면서, 그 충격적인 소식에 며칠을 울고 지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는 그 때 썼던 일기를 공개한다.

 

“자꾸 눈물이 납니다. 하루 종일 마음이 너무나 눌리고 너무나 우울하였습니다. 이처럼 속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이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분노와 슬픔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고난주간, 예루살렘에서 이런 마음의 아픔을 경험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어디가서 소리질러 울고 싶을 뿐입니다.

밤에 겟세마네 교회와 베드로의 통곡교회에 다녀왔습니다. 겟세마네 교회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따라 베드로 통곡 교회까지 걸어갔습니다.

마음은 끝이 없는 심연으로 빠져듭니다. 눈에도, 코에도, 입에도 깊은 어둠이 덮혔습니다.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허우적거려 보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을 묵상하는데 ‘너 자신을 위하여 울라’(눅 23:28) 하셨습니다.

자꾸 세월 호의 선장 생각이 났습니다. 세월 호 선장이 꼭 저 같습니다. 저 자신이야말로 ‘준비되지 못한 미숙하고 무책임한 선장’ 같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 생각을 하면 자꾸 눈물이 납니다. ‘나는 잘 하고 있나?’ 두려운 마음뿐입니다. 담임목사의 자리에서 내려 서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려설 수도 없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 옵니다. 저는 계속 나아가야만 합니다. ‘나는 잘하고 있나?’”

 

그는 무엇에 분노한 것일까? 왜 자신이 세월호 선장과 같다고 한 것일까? 담임목사의 자리에서 내려서고 싶지만 많은 이들이 뒤 따라 오기에 내려설 수도 없다고 하는데, 그러면 어디로 계속 나가고 싶다는 말일까? 도무지 행간이 읽히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깊게 슬퍼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고 있다는 회개와 겸손의 은근한 과시라고만 읽힌다.

 

그 1년 동안 유기성 목사는 무엇을 했던 것일까? 유가족들이 길거리에서 모멸을 겪을 때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하려 했던 것일까? 그는 난데없이 박노해의 시 <감사한 죄>를 인용하면서 자신을 질타한다. 마무리 지으면서 감사한 것조차 죄가 되는 세월에 대해 그의 심정을 토로한다. 무슨 감사를 했기에 죄의식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 죄를 더는 짓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 무언가 위선이 느껴지는 글이라고 한다면 왜곡일까?

 

자식을 잃고 몸부림치는 이들 앞에서 감사하는 삶조차 죄처럼 느껴졌다면, 그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해야 하는 것이 당연치 않은가? 그러나 그의 글에는 그 뒤가 없다. 그냥 거기서 끝이다. 이걸로 그의 처신을 변호하고 있을 뿐이다. 유가족들은 오늘도 정부권력의 강제연행과 봉쇄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있어도 그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다. 그게 ‘죄’ 아닌가.

 

오늘날 예수께서 한국교회의 이런 행태를 보시면 뭐라 하실까? 위장된 슬픔, 악과의 대면을 피하는 교활함, 진실을 요구하지 않는 비겁함, 우는 자를 내버리며 자신의 감사에만 취하는 이기심, 그리고 정작은 권력과 짝하면서 성채의 기득권을 누리는 탐욕을 정면에서 치고 나서지 않으시겠는가?

 

참회록을 가장한 기만을 중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은폐되고 있어도 분노하지 않고, 유가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어도 슬픔 어쩌구로 대충 때우고 가는 교회, 목사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기독교, 한국교회에 염증을 내고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아, 그 죄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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