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자신을 묶은 야훼, 그리고 너무나 약한 아브라함

by 한종호 2015. 5. 18.

곽건용의 짭조름한 구약 이야기(14)

 

자신을 묶은 야훼, 그리고 너무나 약한 아브라함

- 아브라함 이야기 2 -

 

 

1.

 

구약학자들은 창세기 15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 장이 창세기에서 가장 오래 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란다. 창세기는 다양한 저자들에 의해 여러 세대를 거쳐 작성됐는데 그 중에서 15장이 가장 오래 된 텍스트라는 거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짐승을 죽여서 그걸 둘로 쪼갠 다음 서로 마주 보게 놓고 언약을 맺은 게 원시적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이 텍스트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됐기 때문은 아니고 하느님과 아브라함(이름이 바뀌기 전이니 ‘아브람’) 사이에 ‘언약’(covenant)이 맺어진 얘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는 아브람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는 6절을 사도 바울에 의해 ‘믿음으로 의롭다고 일컬어진다’는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의 근거로 여기니 더욱 그렇다.

 

야훼가 ‘환상’ 가운데 아브람에게 말씀했다. 이런 일이 아브람에겐 드문데 여기선 야훼가 환상 가운데 나타나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거다. 뭔지 몰라도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 있었던 모양인데 좌우간 야훼는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야훼의 약속이 성취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을 가리키지 않나 싶은데 그것 역시 텍스트 상의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다. 야훼의 약속이 성취될 기미가 없었던 것은 물론 맞다. 그는 아직 땅도 갖지 못했고 후손 역시 생길 기미가 없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아브람이 “야훼 나의 하느님, 야훼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저에게는 자식이 아직 없습니다. 저의 재산을 상속받을 자식이라고는 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 뿐입니다. 주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으니 이제 저의 집에 있는 이 종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2-3절)라고 하소연한 건 이해할 만했다. 상속할 자식이 없을 때 종에게 상속하는 게 당시 관습이었다. 그것이 의무는 아니었지만 주인이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야훼는 고집스럽게도 상속자는 그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임기를 훨씬 넘긴 부부가 뭘 근거로 그 말을 믿으란 건가. 그걸 믿을 근거는 약속한 분이 야훼 하느님이란 사실뿐이었다. 야훼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이렇게 말했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자손이 저 별처럼 많아질 것이다”(5절).

 

다음 절은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적는다. 이 구절은 두 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말 성서는 모두 “아브람이 야훼를 믿으니 야훼께서는 아브람의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번역했는데 사실 이는 ‘번역’(translation)이 아니라 ‘해석’(interpretation)에 가깝다. 번역자의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얘기다.

 

영어성서는 히브리 원문을 그대로 옮겨서 “And he believed YHWH; and he reckoned it to him as righteousness”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he’라는 인칭대명사가 주격으로 두 번, 목적격으로 한 번, 모두 세 번 쓰였고 비인칭대명사 ‘it’가 한 번 쓰였다. 가장 먼저 나오는 ‘he’는 목적어가 야훼이므로 아브라함을 가리키는 게 분명하다. 등장인물은 아브라함과 야훼 둘뿐이니 말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he’는 야훼와 아브라함 둘 다 가능하다. 곧 “야훼는 그것을 자신(또는 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겼다.”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자신(또는 야훼)에게 의로 여겼다.”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또한 비인칭대명사 ‘it’가 뭘 가리키는지도 문제다. 우리말 성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이해했는데 그것은 명백히 의역이다. 그게 아니라 앞 문장 전체를 가리키는 걸로 보는 게 맞다. 곧 ‘아브라함이 야훼를 믿었다는 사실’을 의롭다고(또는 ‘옳다고’) 여겼다고 말이다. 그리스도교는 “야훼는 아브람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라고 이해한 반면 유대교는 “아브라함은 자손이 별같이 많아질 거라는 야훼의 약속을 옳다고 여겼다.”라고 이해했다. 문법으로나 의미로나 둘 다 가능하긴 한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는 서로 다른 신학을 갖고 있어서 이 문장을 달리 해석한 거다.

 

 

 

2.

 

야훼는 전에 했던 땅에 대한 약속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이 이뤄진다는 표징을 달라고 말한다. “야훼 나의 하느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야훼는 제물로 바칠 짐승들을 가져오라고 했고 이에 아브라함이 암송아지, 암염소, 숫양, 산비둘기, 집비둘기 등을 가져오자 그것들의 몸통 한 가운데를 쪼개서 그 가운데로 사람이 지나갈 정도 거리를 두고 서로 마주보게 차려 놓았다. 무척 엽기적인 장면이다. 안 그런가?

 

이게 엽기의 끝은 아니다. 해 질 무렵 아브라함이 잠들자 깊은 어둠과 공포가 그를 짓눌렀단다. 가위에 눌리는 것처럼 말이다. 해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자 갑자기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고 했다. ‘어둠’은 야훼를 직접 보지 못하게 하는 방편이고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은 야훼의 임재를 상징한다. 곧 야훼가 친히 아브라함이 놓아둔 짐승들 사이를 지나갔다는 거다.

 

이렇게 해서 야훼와 아브라함은 언약을 맺었다. 쪼개놓은 짐승은 언약 당사자 어느 편이든 언약을 어길 땐 그런 신세가 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로만 언약을 맺은 게 아니라 짐승을 죽여 반을 갈라놓고서 어기면 그런 신세가 됨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언약을 맺은 거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운데 말이다.

 

우리는 이 텍스트를 언약의 하위당사자 아브라함이 언약을 깨면 쪼개진 짐승 신세가 된다고 이해해왔다. 안 그런가? 하지만 언약은 쌍방이 맺는 것으로서 그게 지켜지면 쌍방 모두에 혜택이 돌아가고 어기면 쌍방 모두 타격을 입게 되어 있다. 언약 당사자 중엔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편이 있고 낮은 자리에 놓이는 편이 있지만 어겼을 때 처벌받는 것은 양편이 같다. 높다고 해서 처벌이 면제되진 않는다는 거다. 따라서 언약을 어겼을 때 쪼개진 짐승의 처지가 되는 건 아브라함만이 아니다. 야훼도 마찬가지다. 야훼라고 처벌이 면제된다면 그게 어떻게 정당한 언약이겠나.

 

우리는 야훼가 언약을 어기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고 가정해왔다. 하지만 텍스트를 잘 읽어보면 그 반대의 경우가 문제가 되고 있다. 언약이 왜, 무엇 때문에 맺어졌는지를 기억하시라. 그것은 야훼의 약속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징표를 요청했기 때문에 맺어졌다. 초점은 아브라함의 신실함이 아니라 야훼의 신실함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땅과 후손의 약속에는 아브라함이 해야 할 의무가 없다. 아브라함은 땅이든 후손이든 달라고 야훼에게 요청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그걸 주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아브라함은 그 약속이 지켜진다는 징표를 달라고 했던 거다. 따라서 언약을 어겼을 때 쪼개진 짐승 신세가 되는 편은 야훼다. 물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만 텍스트의 관심은 아브라함이 아닌 야훼에게 놓여 있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6절에 대한 유대교식 해석에도 일리가 있다.

 

남과 관계를 맺고 뭔가를 약속하고 맹세하는 것은 스스로를 구속하는 일이다. 그건 자신을 묶는 일이다. 관계를 맺지 않고 약속하지 않으면 굳이 안 해도 될 걸 약속했기 때문에 해야 하니 그건 자신을 구속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구약성서에서 언약은 ‘맹세를 동반한 관계 맺기’라고 할 수 있다. 야훼와 노아가, 야훼와 아브라함이, 야훼와 모세를 중재자로 한 이스라엘이, 야훼와 다윗이 언약을 맺었다는 말은 언약 당사자 모두가 자신을 묶고 스스로를 구속했다는 뜻에 다름 아니다. 흔히 ‘하느님’ 하면 힘, 권능, 무한한 지식, 전지전능, 무소부재, 주권 등을 떠올린다. 하느님은 그것들을 모두 갖고 있는 존재라고 믿어진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근본은 하느님의 ‘절대자유’다. 하느님이 절대적으로 자유롭지 않으면 힘도 권능도 지식도 의미 없다. 야훼가 무언가에 매여 있어서 권능과 주권을 자유롭게 쓸 수 없다면 그게 무슨 하느님인가 말이다. 그래서 하느님 하면 무엇도 거리끼지 않고 아무데도 속박되지 않은 절대자유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대자유한 야훼가 언약관계에 스스로를 묶었다는 거다. 굳이 맺지 않아도 될 언약을 맺음으로써 자신을 부자유한 상태로 몰아넣은 거다. 이제부터 야훼는 당신 맘대로 할 수 없다! 스스로 맹세했으니 그걸 어기지 못한다. 야훼는 절대적으로 자유롭지 않다. 아브라함이 애걸한 것도 아니고 야훼 자신이 주도적 언약을 맺었으니 그걸 어떻게 먼저 깨겠나. 그러면 쪼개진 짐승 꼴이 될 텐데…. 구약성서에서 야훼에 대한 생각이 틀을 갖추고 구체화되기 시작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절대자유’인 야훼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관계’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 스스로 묶인 상태가 되는 바로 그 지점이 구약신학의 출발점이다.

 

3.

 

아브라함에 대해 마지막으로 살펴볼 얘기는 그가 거짓말을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 일행이 가나안에 도착한 후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 벌어졌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 아브라함 일행이 이집트로 내려갔다. 가나안은 전적으로 비에 의존해서 농사짓는 곳이므로 가뭄이 치명적이었고 이집트는 나일강의 거대한 수자원을 이용해서 농사짓는 지역이므로 가뭄이 덜 치명적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은 가뭄이 닥치면 식량을 구하러 이집트로 내려갔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아브람 일행도 기근이 들자 이집트로 내려갔는데 이집트에 가까이 갔을 때 아내 사래(‘사라’로 바뀌기 전이다)에게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해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라고 말했단다. 이게 무슨 말인가? 아내 사래가 무척 아름다워서 이집트 사람들이 자길 죽이고 그녀를 차지하려 할 테니 누이라고 속여서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얘기다. 요즘 같으면 ‘겁쟁이’ 소릴 들을 발언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야훼의 약속을 믿고 고향을 떠나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가나안까지 온 사람에겐 어울리지 않는 말 아닌가. 이런 아브람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자기만 살겠다고 아내를 남에게 넘겨주려 한 행위는 그가 ‘믿음의 조상’일지라도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그들이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에 우려대로 이집트인들이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녀를 곧장 바로의 궁전으로 데려 갔단다. 바로는 그녀가 맘에 들었는지 아브라함을 잘 대접했고 큰 재산까지 안겨줬다. 하지만 야훼는 이 일로 인해 파라오 집에 무서운 재앙을 내렸고 파라오는 어떻게 알았는지 아브라함이 재앙의 이유임을 알고 그를 불러 심하게 꾸짖었다. “어찌하여 너는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저 여인이 너의 아내라고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너는 저 여인이 네 누이라고 해서 나를 속이고 내가 저 여인을 아내로 데려오게 하였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다. 데리고 나가거라.” 이 말로 미루어보면 재앙은 바로와 사라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런 일이 벌어진 후에 닥친 것 같다. 고대해석자들은 그게 아니라고 사라를 적극 방어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얘기는 파라오가 아브라함 일행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는 걸로 마무리된다.

 

똑같은 얘기가 창세기 20장에도 나온다. 다른 점이라고는 이번엔 상대방이 이집트 왕 파라오가 아니라 그랄 왕 아비멜렉이란 점이다. 그런데 이번엔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말한 게 거짓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12절에서 아브라함은 “사실을 말씀드리면 나의 아내가 나의 누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내는 나와는 어머니는 다르지만 아버지는 같은 이복누이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이다.

 

이게 사실일까? 우리에겐 확인할 길이 없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왜 이집트에선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까? 거기선 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었는가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 20장 12절을 아브라함이 거짓말한 게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후대에 삽입된 구절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그러면 문제가 더 커진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근친상간한 게 되니 말이다. 그 정도가 아니라 남매가 혼인한 셈이니 이는 일회성 근친상간보다 더 중한 문제가 된다. 혹 떼려다 혹 붙인 셈이 되는 거다.

 

말이 나온 김에 근친상간에 대해 좀 살펴보자. 레위기 18장 6절서는 근친상간을 엄격히 금지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누구도 가까운 살붙이에게 접근하여 그 몸을 범하면 안 된다. 나는 야훼다. 너는 네 아버지의 몸이나 마찬가지인 네 어머니의 몸을 범하면 안 된다. 그는 네 어머니인 만큼 너는 그의 몸을 범하면 안 된다. 너는 네 아버지가 데리고 사는 여자의 몸을 범하면 안 된다. 그 여자는 네 아버지의 몸이기 때문이다. 너는 네 누이의 몸을 범하면 안 된다. 네 아버지의 딸이든지 네 어머니의 딸이든지 집에서 낳았든지 낳아서 데리고 왔든지 그 여자의 몸을 범하면 안 된다.”(6-9절) 그 다음에도 동침하면 안 되는 친척 목록이 한참 이어진다.

 

이렇듯 구약성서는 근친상간을 단호히 금하지만 실제론 행해진 경우가 제법 된다. 소돔과 고모라 멸망 후 간신히 살아남은 롯의 딸들이 후손을 만들려고 아버지와 동침한 것(창세기 19:30-38)은 태곳적 일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이전 글에서 다뤘던 유다와 다말의 경우(창세기 38장), 다윗의 아들 암논과 이복누이 다말의 경우(사무엘하 13장), 그리고 자기 입으로 근친관계임을 자백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 등이 그것이다. 유다와 다말은 다말의 계획에 따라 유다가 다말을 성매수한 경우이고 암논과 다말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경우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지극히 정상적인 관계인 줄 알았는데 창세기 20장에 와서 그들이 근친임이 알려진 경우다.

 

구약성서 신명기 22장 28-9절은 남자가 처녀를 강간했을 경우 남자는 여자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하고 그녀와 결혼하라고 규정한다(“어떤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처녀에게 욕을 보이다가 두 사람이 다 붙잡혔을 때에는 그 남자는 그 처녀의 아버지에게 은 오십 세겔을 지불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욕을 보인 대가로 그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고 그는 평생 동안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의 눈에는 강간범에 대한 처벌이 지나치게 관대해 보이지만 이 규정엔 분명한 목적이 있다. 강간당한 여자는 강간한 남자 이외에 다른 남자와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은 싫어도 강간범과 결혼하는 것밖에 없었다. 자기를 강간한 남자와 제대로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유다와 다말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이니 우리 상식으론 결혼할 수 없는 사이지만 고대 중동에선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집트, 특히 이집트 왕실에서는 아버지와 딸이 결혼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근친이란 게 큰 문제는 아니었던 거다. 물론 유다와 다말이 결혼했다는 얘기는 없다. 암논과 다말은 경우가 좀 다르다.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려 하자 그녀는 그건 이스라엘에서 매우 수치스런 일이라 저항하면서 아버지 다윗 왕에게 둘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청하라고 애원한다. 여기서 다말은 위에 인용한 신명기 22장의 규정을 따르고 있다. 둘의 결혼을 아버지에게 허락받자는 거였다. 물론 알다시피 암논은 다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를 강간하고 나니까 바로 그녀가 싫어졌기 때문이란 거다. 그가 이복동생이자 다말의 오라비인 압살롬에게 살해됐을 때도 별 동정심이 일어나지 않는 게 이 때문일까? 나만 그런가?

 

다시 아브라함과 사라 얘기로 돌아오면, 아브라함은 자기가 살겠다고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아비멜렉이 분노하자 사실은 아내가 이복누이라고 변명하는데 이로 인해 그는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근친상간을 금하는 레위기 18장 6절 이하의 규정을 어겼으니 말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학자들에 따르면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고대 중동지역에선 근친상간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다고 한다. 레위기 18장은 상당히 후대의 규정이란 거다. 함무라비 법전은 아버지와 딸이 동침하면 사형에 처하라고 규정하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들에선 신들과 여신들이 자기 자식들과 동침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이집트에선 이시스(Isis)와 오시리스(Osiris) 신화를 따랐는지 파라오가 자기 누이와 결혼하는 경우가 흔했다. 이스라엘은 예외였을까? 그렇진 않았다고 본다. 학자들이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후리족(the Hurrians)은 아내를 누이라고 불렀단다. 아브라함은 이를 따랐을 뿐이란 거다. 요약하면, 구약성서가 근친상간을 금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금령은 후대에 나온 것이고 적어도 아브라함 시대엔 그게 엄격하게 지켜지진 않았다고 하겠다.

 

4.

 

이 얘기는 뭘 말하려는 걸까? 이렇게 ‘사소한’ 얘기에선 존재 이유나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게다가 창세기에는 똑같은 얘기가 세 개나 있다(12장, 20장은 아브라함과 사라, 26장은 이삭과 리브가). 똑같은 사건이 세 번이나 일어나진 않았을 거다. 이런 얘기가 민간에 널리 퍼져있었는데 설화자가 그걸 아브라함과 이삭이 겪을 걸로 썼다고 본다. 이 주장을 축자영감을 믿는 근본주의자가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말이다. 좌우간 이 얘기는 대체 왜 여기 있는지, 뭘 말하려고 후대에 전했는지 궁금하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 겪은 게 기근이었다는 점이 우선 눈이 띤다.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불리지만 거기 무슨 젖이 있고 어디 꿀이 흐른단 말인가. 가나안은 기근에 극도로 취약한 척박한 땅일 뿐이다. 나일강이 흐르는 이집트나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흐르는 메소포타미아에 비해서 훨씬 척박한 땅이란 얘기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기근을 만난 것은 가나안에선 흔한 일이었다.

 

그가 기근을 만난 일이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일이라고 말하면 끝나겠지만 내게 이 사건은 가나안이 단순히 지리적 장소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을 의미함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곧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중동 어딘가에 있는 물리적 공간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하느님 안에 있는 가나안’(Canaan in God)을 넌지시 지시한다고 말이다. 내 보기엔 아브라함이 도착한 가나안은 ‘진정한’ 가나안이 아니다. 그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상관없이 말이다.

 

아브라함은 이집트에서 곤혹스런 일을 겪었다. 아내와 자기 목숨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이게 그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었을까? 창세기 22장처럼 명백하게 ‘시험’이란 말을 쓰진 않았지만 이것도 시험이라면 시험이겠다. 무슨 시험을 이렇게 많이 봐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긴 하지만 말이다. 안 그런가?

 

얘기의 전개상 이때까진 하나님이나 아브라함이나 할 것 없이 상대에 대해 별로 아는 게 없었다. ‘탐색’이 필요한 때였다. 권투로 치면 양편 모두 잽을 던지며 탐색하던 때였다. 이렇듯 하느님이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난 건 엄청난 모험이었다.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이 어떻게, 얼마나 야훼를 알았겠나. 그의 행위가 높이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을 불렀을 때 하느님도 그를 알지 못했다. 설화자는 이 전제 위에서 얘길 풀어간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야 했던 이유가 여기 있다. 그의 됨됨이를 알아야 했으니 말이다. 만일 이집트에서의 사건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 일이었다면 하느님은 이를 통해서 아브라함을 더 많이 알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전지전능한 하느님 운운하는 말은 제발 하지 말자. 그 전제론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브라함은 불합격했다고 보인다. 그가 벌을 받진 않았지만 이집트에 내린 재앙이 간접적으로 이를 보여준다. 그가 어떻게 행동했어야 하는지는 모른다. 사라가 아내임을 당당히 밝혔다면 하느님이 그를 지켜줬을까? 누가 그걸 알겠나. 역사에만 ‘만약’이 없는 게 아니라 이야기에도 ‘만약’은 없다.

그가 불합격했다 해도 소득이 전혀 없진 않았다.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서로를 더 잘 알게 됐으니 말이다. 앞으로 긴 여정을 함께 걸어가야 할 동반자가 서로를 더 잘 알게 됐으니 그건 작지 않은 소득이라 하겠다. 아브라함이 매사에 성공했다면 그는 현실감 없는 인물에 그쳤을 터이다. 실제로 우린 살면서 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그게 우릴 괴롭히지만 그 실패가 최종적인 게 아니기에 좌절해선 안 된다. 다음 기회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아브라함은 같은 실패를 한 번 더 겪었지만 그것도 마지막은 아니지 않았던가. 신앙도 삶도 단판승부가 아니다. 그것은 길고 긴 여정이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어떤 맘으로 이 얘길 후손들에게 전했을까를 생각해보자. 이 얘기는 약자’의 얘기다. 패자의 얘기다. 생존하기 위해서 아내까지 포기해야 했던 사람은 분명 약자요 패자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의 신세가 딱 그랬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아내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을 받았다고 현실이 곧 파라다이스로 변하지는 않았다.

 

이 변변치 않은 얘기를 왜 후손에게 전했을까? 얘기의 전달자가 개천에서 나서 용이 된 자였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처럼 결국엔 크게 성공했다고 말하고 싶어서 이 얘기를 전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가 용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약자로 남은 자였다면 생존을 위해서 아내까지 포기해야 했던 자기 삶의 적나라한 실상을 후대에 알리려고 이 얘길 전했을 것이다. 전자는 비올 때 우산을 씌워주려는 사람이고 후자는 같이 비를 맞아주려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