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유철의 음악정담(21)

 

음악사에 등장한 원조 오빠 부대

- 프란츠 리스트(1) -

 

 

음악가 평전을 쓸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고민하지 않고 프란츠 리스트(1811-1868)를 선 선택하겠습니다. 리스트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나 닮고 싶은 음악가가 아닙니다. 그를 좋아하지만 바흐처럼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구스타프 말러처럼 리스트가 제 취향인 건 맞지만 그는 좀처럼 저를 미치게 만들진 않습니다. 그러니 리스트는 제게 최고일 순 없습니다. 미치게 만들지 못하는 음악이라면 2프로 부족하다는 것이 제 생각이니 말입니다. 음식에 비유하자면 리스트는 외식에 가깝지 외국에 오래 체류할 때 너무도 먹고 싶은 김치나 쌀밥이나 짜장면 같은 주식(主食)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쓰고 싶은 음악가 평전은 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바흐나 좋아하는 베토벤이나 브람스나 말러가 아니라 프란츠 리스트입니다.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우선 바흐, 베토벤, 브람스, 말러의 평전은 많습니다. 한국인 저자의 평전도 여러 권이 나와 있습니다. 앞으로도 바흐, 베토벤, 브람스, 말러 평전은 틀림없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저까지 나설 이유가 없습니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구요. 그러나 리스트는 다릅니다. 1990년대 초반에 Humphrey Searle이 쓴리스트의 음악세계가 번역되긴 했지만 오래 전에 절판되었습니다.

 

리스트 평전을 쓰고 싶은 두 번째 이유는 그를 통해 그 시대와 음악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몸이 그 시대 음악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리스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와 교류했던 바그너, 베를리오즈, 쇼팽은 물론 그와 음악적 입장이 달랐던 브람스, 슈만, 한슬리크도 알아야 합니다. 그의 음악에 상당할 정도로 영향을 준 괴테, 바이런, 실러, 조르주 상드, 빅토르 위고, 들라크루아, 하인리히 하이네, 생시몽, 뮈세 등의 작가나 화가, 1830년과 1848년의 혁명, 그리고 민족주의가 당시 유럽 음악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도 필수입니다.

 

물론 어느 시대 어떤 음악가도 시대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해 모르고 한 사람의 평전을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19세기에 유럽을 근거로 활동했던 인물일 경우는 그가 음악가이든 문인이든 화가이든 관계없이 시대와 여타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이해가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빠르게 시대가 변하면서 그로 인해 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생겼고, 문학, 미술, 음악가들 사이의 교류가 그 이전이나 이후 시대와는 비교불가였기 때문입니다.

 

 

 

 

 

리스트 평전을 쓰고 싶은 마지막 이유는 오늘의 한국 사회, 특히 한국교회가 리스트로부터 들어야 할 말이 많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이 땅에서 태어난 개신교인이 아니었다면 굳이 리스트 평전을 쓰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리스트가 나와 동시대를 살고 있는 개신교인이었다면 어땠을까를 떠올리면 그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집니다. 나와 신앙생활을 함께 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이 그에게 드러낼 적의나 비난이 눈에 선하기 때문입니다.

 

리스트를 가장 좋아하거나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평전을 쓰고 싶은 이유는 그가 받는 부당한 오해와 비난에 대한 연민 때문입니다. 그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박근혜 빠가 되어 그가 무슨 짓을 하든 무조건 옹호하는 리스트의 가스통 할배를 자처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10을 잘못했는데 100을 잘못한 것처럼 비판하는 것을 바로잡지는 못하더라고 그게 부당하다는 점을 알리고 싶은 것입니다.

 

리스트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양 음악사를 새롭게 쓰게 만든 인물입니다. 그는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의미의 피아노 독주회를 처음 시작한 인물이었습니다. 리사이틀이란 표현의 원조 내지 원작자도 리스트였고, 몰려드는 관객 때문에 피아노 뚜껑(lid)을 열고 연주를 시작한 것도 리스트였습니다. 당시까지의 관행은 관객석에서 보았을 때 오른쪽에 피아노를 배치하였지만 리스트는 피아노를 왼쪽으로 옮겼습니다. 옆모습에 자신이 있었고, 어느 도시에서 연주회를 열거나 주관객은 돈 많은 여성 팬들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얼굴 옆선이 잘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리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진이나 미술 작품의 십중팔구는 그의 옆모습을 그렸습니다.

 

리스트가 시작한 또 하나의 관행은 마스터 클래스, 즉 공개레슨을 처음 시작한 마에스트로였다는 점입니다. 그는 레슨으로 돈을 버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연주회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리스트는 무료 레슨을 장기간에 걸쳐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렇게 그가 길러낸 제자가 400명이라고 음악사가들은 적고 있습니다. 때문에 리스트는 피아노 레슨으로 떼돈을 번 테오도어 쿨라크의 아들들에게,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을 가난한 음악가들을 위해 기탁하라는 공개서한을 쓰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로 인해 생긴 또 하나의 현상은 음악사상 처음으로 오빠 부대가 등장한 것입니다. 리스트는 모든 연주 프로그램 악보를 전부 외워서 연주한 첫 음악가였습니다. 자기 곡만 외워서 친 것도 아닙니다. 그는 바흐에서부터 자기 시대의 음악가들 작품까지 레퍼토리가 당시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폭이 넓었습니다. 바로크와 고전 시대의 피아노 작품 뿐 아니라 베토벤의 교향곡 전곡, 슈베르트의 가곡, 자신이 결혼식 증인을 서 준 친구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하였습니다. 모차르트나 벨리니 등의 유명 오페라 아리아도 편곡하여 연주했습니다. 19세기 중반에 많은 사람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을 오케스트라를 통해서보다는 리스트의 연주를 통해 더 자주 접했습니다.

 

리스트는 평생 1300여 곡을 작곡했다고 하는데 그 중에 400곡이 피아노 편곡일 정도로 그의 음악에 있어서 편곡의 비중은 매우 컸습니다. 대부분이 자신의 연주를 차별화하고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략이었겠지만 애정이 없이는 그 긴 세월 동안 이렇게 많은 작품을 편곡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은 그의 연주를 보며 실신하고, 꽃 대신 보석을 던지고, 연주 도중 피아노 와이어가 끊어지면 그걸 쟁취해서 목걸이를 만들어 걸고 다녔습니다. 연주가 끝나면 그를 만지기 위해 몰려들었고, 어떤 여성은 리스트가 피우다 버린 궐련을 죽을 때까지 간직하기도 했습니다. 리스트가 얼마나 빼어난 연주를 했고,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로 하늘을 찔렀는지는 몇몇 기록이 입증합니다.

 

 

 

 

리스트는 1839-1847년 사이에 서쪽 포르투칼에서 아일랜드까지, 동쪽으로는 터키에서 루마니아를 거쳐 러시아까지 유럽에서 총 1000여 회의 독주회를 개최했습니다. 리스트를 가장 열렬하게 환영하였던 러시아의 모스크바 연주회 때는 일주일 만에 4만 프랑을 벌었고, 1840년대의 7년 동안 그가 순회 연주로 벌어들인 돈은 22만 프랑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베토벤 탄생 75주년을 기념해서 베토벤 기념상을 독일 본에 세울 때나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선 음악회를 많이 열었고, 거기서 생긴 수입을 통 크게 쾌척했습니다. 리스트가 가는 곳마다 여성들의 집단적 히스테리가 얼마나 심했으면 하인이리 하이네가 리스토마니아란 신조어를 만들어냈겠습니까.

 

음악사가들은 역사상 가장 피아노를 잘 친 연주자로 리스트를 꼽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남긴 피아노 작품들의 테크닉은 당시 대다수 피아니스트들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고, 그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대연습곡>이나 <초절기교 연습곡> <B단조 소나타> 등은 현대의 피아니스트들에게도 쉽지 않은 난곡입니다. 1830124, 그러니까 그가 19살 때 리스트는 파리에서 파가니니의 연주를 보고 충격에 빠집니다. 그 이후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작심하고 하루에 14시간씩 피아노를 치면서 초절기교를 완성했습니다.

 

모차르트가 1781년 크리스마스 전야 때 프란츠 요제프 2세 앞에서 클레멘티와 피아노 대결을 펼쳤듯 리스트도 탈베르크(1812-1871)라는 당대의 빼어난 비르투오조와 연주 대결을 펼쳤습니다. 지금은 거의 아무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에드바르트 그리그(1843-1907)가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 악보를 들고 말년의 리스트를 찾아 온 일이 있습니다. 존경하는 선생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평가를 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리스트는 초견(初見)으로 즉석에서 그 곡을 연주했습니다. 요즘처럼 인쇄된 악보가 아니고 손으로 그린, 때문에 그의 필적에 익숙하지 않으면 금방 잘 안 읽히지 않는 악보였는데 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리스트가 피아노 반주는 물론 그 위의 바이올린 파트까지 빼놓지 않고 다 연주했다는 사실입니다. 훗날 그리그는 넋이 나갔던 당시 상황을 단 한 줄로 요약했습니다.

 

나는 어린애처럼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스트는 75살에 딸도 만나고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트리스탄 이졸데>를 보기 위해 바이로이트로 갔다가 폐렴에 걸려 타계했습니다. 죽기 11일 전 룩셈부르크의 콜파흐에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졌는데요. 당시 연주회에 참석했던 사람은 언뜻 보기에 움직이기도 힘들어 보이던 노인 리스트는 일단 무대에 올라서자 기적처럼 청년으로 변해버렸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그의 조국 헝가리 부다페스트 6구 뵈뢰스마르티가 35번지 2층에 있는 리스트 박물관에는 베토벤이 말년에 사용했던 브로드우드 피아노(에스파냐의 출판업자 갈 리가 소장하고 있다가 리스트에게 선물한)와 그리그와 그의 친구들이 선물한 은으로 만든 보면대가 놓여있다고 합니다. 그토록 베토벤이 되고 싶었던 리스트가 애지중지하던 피아노가 궁금합니다. 베토벤과 리스트의 손때가 뭍은 그 피아노를 볼 수 있는 날이 제게도 올까요? 그러면 좋겠습니다. (다음에 계속)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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