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유철의 음악정담(22)

 

두 명의 프란체스코와 백건우

- 프란츠 리스트(2)

 

 

세월호 참사 100일이 되던 지난해 7월 24일,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영혼의 소나타’란 제목으로 제주항 특설무대에서 추모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연주회 10여 일 전에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백건우는, ‘부다페스트 공연을 준비하다가 세월호 소식을 접한 뒤 할 말을 잃었고, 살릴 수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어 화가 났었다’고 느리게 말했습니다. 추모 콘서트 제안을 받았을 때 백건우는 자신의 연주회 일정을 변경했고, 파리-서울 왕복 항공료는 물론 출연료까지 포기했습니다. 곁에서 지켜 본 윤정희는 수십 년 연주 생활 중에서 남편이 레퍼토리 선정을 놓고 이번처럼 심혈을 기울인 적은 없었다고 거들었습니다. 백건우는 죽음, 상처, 치유란 주제로 각 두곡씩을 선정했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추모 콘서트를 놓고 백건우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백건우는 ‘영혼의 소나타’ 콘서트를 네 명의 작품으로 구성했습니다. 베토벤․라벨․바그너를 한 곡씩 골랐고,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에서는 세 곡이 뽑혔습니다. 산책길에 나섰다가 병으로 죽은 자식을 앞에 놓고 슬퍼하는 여성을 위해 베토벤이 연주했던 자작곡 ‘비창’ 소나타 2악장과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그리고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죽음’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백건우가 세 곡을 고른 작곡가는 뜻밖입니다. 추모 음악회와 쉽게 매치가 되지 않아 보이는 프란츠 리스트의 곡을 집중적으로 골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고른 리스트 작품은 '잠 못 이루는 밤, 질문과 대답', 친구이자 사위였던 바그너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한 '침울한 곤돌라 2번', 그리고 <순례의 해> 제3년 가운데 ‘힘을 내라’였습니다. 참고로 바그너의 ‘사랑의 죽음’은 원곡이 아니라 프란츠 리스트 편곡이었습니다.

 

추모 콘서트에서 리스트의 비중이 이렇게 높을 것이란 사실은 누구도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클래식 추모 콘서트에서 리스트의 곡이 절반을 넘어 2/3를 채운 경우가 세계 클래식 음악사에서 몇 차례나 있었을까요.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얼른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추모 음악회는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선박들과 비행기 소음으로 최악의 조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백건우는 제주항 추모 콘서트를 통해 자신이 어떤 음악가인지를 선명하게 각인시켰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과연 누가 리스트로 도배하다시피 한 추모 음악회를 열었겠습니까.

 

리스트가 음악사에서 최고의 비르투오조 피아니스트란 사실엔 별로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영혼이 없다느니, 기교에 치중하느라 메시지가 약하다느니 하는 낙인이 찍힌 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리스트는 그의 평전을 쓴 대다수 전기 작가들조차 ‘러블레이스’라 불렀던 인물입니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18세기 영국 소설가 사무엘 리처드슨의 『클라리사』란 소설 속 주인공에 빗대어 천하의 난봉꾼을 ‘러블레이스’라 불렀습니다. 많은 당대 사람들에게 리스트는 그 시대의 ‘러블레이스’였던 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리스트는 16살 때의 첫 사랑을 시작으로 두 딸과 아들을 낳아 준 마리 다구 백작 부인, 전 유럽을 상대로 순회 연주로 눈코 뜰 새 없었던 리스트를 설득하여 위대한 작곡가로 만든 러시아 공주 카롤리네 자인 비트겐슈타인 공작 부인이외에도 아델르 라프뤼나레드 백작부인, 마리 뒤플레시스, 댄서 롤라 몽테즈, 마리 플레이엘, 삭소니 대공의 부인 마리아 파블로프나, 그의 마지막 추문상대였던 코사크 백작의 부인 올가 쟈니냐와의 염문이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졌습니다.

 

때문에 예나 지금, 또는 서양이나 동양을 가릴 것 없이 리스트는 슬픔보다는 환희, 내면보다는 밖으로 드러나는 초절정 테크닉이 더 잘 어울리는 음악가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세계 여러 콘서트 장에서 빈번하게 연주되는 그의 곡들도 현란함을 앞세운 초, 중기의 비르투오적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리스트의 종교성과 실험정신이 빛나는 말기 작품들은 예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나 지금도 여전히 콘서트에서 듣기 힘듭니다. 이런 클래식 음악계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백건우가 세월호 추모 콘서트 레퍼토리를 리스트 중심으로 구성했다는 점은 그래서 충격입니다.

 

한반도를 삼켜버린 슬픔 앞에서 백건우의 내면을 사로잡았던 피아노 작곡가가 바흐, 브람스, 슈만,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메시앙의 피아노 작품이 아니라 악마에게 영혼을 판 메피스토펠레스란 오해를 시달린 리스트였다는 사실은 그래서 놀랍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백건우가 작년 8월 16일 있었던 가톨릭 제266대 교황이 집전하는 순교자 124위 시복식 미사 때도 리스트를 들고 나왔다는 점입니다. 50여 만 명이 운집했던 광화문 광장의 식전 행사에서 백건우는, 성 프란체스코를 주제로 쓴 리스트의 ‘두 개의 전설’ 중 ‘새들에게 설교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연주했습니다.

 

백건우가 이 곡을 선택한 것은 평생 겸손하게 무소유를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신한 성 프란체스코를 자기 이름으로 선택한 교황에 대한 고마움과 화답의 차원이었습니다. 이때도 언론은 백건우가 공연에 필요한 제반 경비를 스스로 부담하고, 사전에 잡혀있던 연주 일정을 변경한 사실을 보도하였습니다.

 

백건우는 1982년 파리와 런던에서 당시까지 거의 연주가 안 되던 리스트의 후기 작품 50여 곡을 6주간 연속으로 연주하여 세계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리스트 탄생 200주년이던 2011년 6월에도 그는 서울에서 이틀 동안 그의 곡만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백건우는 세월호와 교황 축하라는 단 두 번의 공연으로 “‘초절정 테크닉’, ‘음악계의 카사노바’란 자극적인 수식어”에 가려졌던 리스트의 “‘철학적 심오함’, ‘종교적 경건함’, ‘음악적 혁신’”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백건우는 왜 리스트의 작품으로 세월호의 아픔과 프란체스코 교황의 역사적 방한을 축하한 것일까요. 슬픔과 기쁨 모두로 빼어난 작품을 쓴 작곡가가 리스트였던 게 첫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는 리스트의 세례명이 프란체스코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그의 세례명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리스트는 젊은 시절의 2년 동안을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했던 교황처럼 프란츠 리스트도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를 흠모하였고, 그래서 그를 주제로 두 곡의 작품을 남겼던 것입니다.

 

 

 

 

 

《위대한 음악가들의 영적 생활》을 쓴 패트릭 카바노프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과장한 게 아니라면, “리스트는 평생 동안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6살 때 이미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즐겨 읽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자들, 그리고 사도들의 생애에 대한 관심이 많아 어려서부터 부모를 성가시게 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를 들으며 종종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사제가 되고 싶으니 신학교를 보내달라고 부모님을 자주 조르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친 아담 리스트는 아들을 이렇게 설득했습니다.

 

너는 음악에 속해 있지, 종교에 속해 있지 않다. 하나님을 사랑해라. 선하고 정직한 사람이 되어라. 그러면 너는 음악에 있어서 최고의 정상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음악은 하나님이 너에게 부여하신 은사이고 네가 담당하도록 예정하신 소명이다.

 

17살 때도 리스트는 다시 한 번 파리 신학교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이 “성자들의 삶을 살도록 해주고 어쩌면 순교자들의 죽음을 죽게 해 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리스트는 “하늘나라처럼 자명한 것은 아무 데도 없”다고 생각했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하심과 같이 그렇게 진실하고 풍요로운 것” 또한 없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리스트는 1859년에 20살 된 아들 다니엘을, 1862년 9월에는 장녀를 잃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51살이던 리스트가 그 무렵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저의 모든 허물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삶을 믿는 나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만한 것은 아무도, 그리고 아무 것도 없었”다는 내용으로 말입니다.

 

몇 년 뒤에는 그는 그란(Gran) 대성당 봉헌식을 위해 <장엄미사>를 썼습니다. 바그너에게 쓴 편지에서 리스트는, “나는 이 미사곡을 작곡했다기보다는 기도드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에 <시편 13편>의 작곡이 마무리되자 리스트는 이 곡을 ‘울부짖는 피’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리스트의 작품은 더욱 진지하고 심오해졌던 것입니다.

 

그의 대표적인 종교음악 중 하나이고, 연주 시간이 3시간이나 걸리는 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가사를 리스트는 직접 썼습니다. 당시 리스트는 가장 빼어난 피아니스트와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40여 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고, 바흐와 베토벤을 비롯한 이전 시대의 음악가는 물론 바그너와 베를리오즈 등 당대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한 실력 있는 지휘자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리스트는 최초로 쇼팽의 전기를 썼고, 젊은 시절부터 교회 음악과 당시 음악가들의 신분 보장에 대하여 의미 있는 글을 발표한 글쟁이이기도 했습니다. 리스트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언젠가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열정적인 갈망, 그리고 십자가를 높이는 것이 언제나 나의 진실하고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소명이었다.

 

이제까지 거칠게 살폈듯 리스트는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쉽지 않은 사람입니다. 생의 대부분을 숱한 여성에 둘러싸여 살았으나 어려서부터 깊은 신앙의 체험을 경험한 그였습니다. 무신론이 대세였던 시대를 살면서 평생 기독교 신앙을 떠나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리스트는 모순덩어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천재의 허영심과 관대함, 호색, 종교성, 속물근성, 서민기질, 그리고 문학적 갈망과 환상”이 자연스럽게 공존했으며, 그의 인품은 바이런적이자 카사노바였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메피스토펠레스 같다가 또 다른 순간엔 성 프란치스코였습니다. 낭만주의 시대의 특징을 “예술, 정치, 종교에 있어서 많은 모순들을 양산”한 시대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측면에서 리스트에 필적할 인물은 없지 싶습니다.

 

때문에 리스트는 우릴 고민에 빠트립니다. 선택을 강요합니다. 가장 쉬운 길은 리스트를 천하의 바람둥이라고 욕하며 그의 음악을 쓰레기통에 처박는 것입니다. 아니면 대다수 사람들처럼 그가 연주자에게 요구하는 현란한 테크닉을 즐기며 골치 아픈 그의 인생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제3의 길은 그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대신 꼭꼭 숨겨둔 자신의 편견과 고집과 독선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모순덩어리인 리스트의 삶에 손을 내밀 수 있겠고, 포옹을 위해 두 팔을 벌릴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가 그랬듯 아직도 문제 가운데 있는 리스트의 친구가 되고, 그로부터 배우며 그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다음에 계속)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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