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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두런두런'

더 기다리지 못한 죄

by 한종호 2015. 6. 11.

한희철의 두런두런(11)

 

더 기다리지 못한 죄

 

 

나직한 건 할머니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손을 들 때부터 그랬다. 아주 먼 곳, 아득히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듯 조심스레 손을 드는 할머니의 모습은 눈에 띄게 고요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할머니의 삶이 그 작은 몸짓 하나에 오롯이 담긴 듯도 싶었다.

 

여러 해 전 춘천노인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일제며 난리며 보릿고개며 유난스러운 생의 고개를 숱하게 넘어오신 연로하신 분들, 그것이 아픔이든 기쁨이든 지나온 세월은 보석과 같은 시간이니 쓸모없다 여기시지 말고 내 이야기를 시작해 보시라고, 학생으로 참석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이야기를 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가장 큰 아픔으로 남아 있는 일은 무엇인지, 어릴 적에 할머니나 할아버지께 들었던 재미난 말이나 이야기가 있는지, 이 세상 떠나며 자녀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등의 이야기를 서로들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할머니가 손을 든 것은 가슴에 묻고 살아온 마음 아픈 일들을 이야기할 때였다.

 

“6, 25때 남편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 가장 마음이 아파요.”

 

할머니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는데, 그 한 마디를 하시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셨다. 마음속에 꽁꽁 쟁여두었던 회한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걸 견디시는 듯 했다. 사연이 더욱 궁금해졌다.

 

“난리가 나자 남편이 피난을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갈 수가 없었어요. 집에 늙으신 시어머니가 계셨거든요. 병까지 얻으신 어머니를 혼자 내버려두고 가는 일이 죄짓는 일 같아 떠날 수가 없었어요. 남편은 혼자 떠났는데 피난 갔던 남편이 사흘 만에 다시 돌아와선 제발 같이 가자 팔을 잡아끌었지만 어머니를 혼자 놔두고는 떠날 수가 없었어요. 결국은 남편 혼자 떠났지요.”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눈에선 언제부턴지 눈물이 흘러내렸고, 낮고 차분했지만 할머니의 목소리는 내내 눈물에 젖어 있었다. 당시 할머니 나이가 스물 셋, 세 살 난 딸이 하나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스물 셋이란 나이가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여전히 고운 할머니의 얼굴 속엔 꽃다운 새댁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끝내 부인을 설득하지 못한 남편은 결국 혼자서 피난을 떠났고, 그렇게 떠난 남편은 그 뒤로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듣던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다 같이 눈물을 훔쳤다.

 

“지금도 남편을 생각하면 죄 지은 마음이에요.”

 

혼자 떠난 남편이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웠을까만 할머니는 오히려 당신이 죄스럽다고 했다. 떠난 아들이 돌아오기는커녕 십 년이 다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자 오히려 시어머니가 나서 혼처를 알아보고 재가를 시켰는데, 어머님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어 다시 결혼을 하면서도 할머니의 마음은 오히려 죄스러웠노라 했다.

 

쉽게 만나 쉽게 사랑하고 그러다가 또 쉽게 헤어지고 마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으로 알았던 세상이 있었다지만 어느 샌지 ‘옷깃만 스치는’ 인연으로 전락한 이 가벼운 시대엔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극한 아픔이었다.

 

무심하게 떠난 남편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해 평생토록 아픔을 안고 살아온 할머니의 죄스러운 눈물은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잃어버린 죄스러움이 무엇인지를 일러주기에 충분하지 싶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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