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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by 한종호 2015. 6. 21.

영화와 함께 읽는 십계명(2)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다신교는 미개하고 나쁜 종교?

 

나는 한 분인 하나님을 믿는다. 다신론자(多神論者, polytheist)가 아니라 유일신론자(唯一神論者, monotheist)라는 얘기다.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를 가리켜 3대 유일신 종교라고 부르는데 나는 그리스도인이고 개신교 목사이니 그게 당연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구약성서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그때는 신이 여럿이라고 믿는 게 당연했고 유일신 믿는 것은 지극히 ‘비정상’이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가톨릭 교인이든 개신교인이든 신앙에 입문(入門)할 때는 유일신교와 다신교의 차이를 알고 유일신을 믿겠다고 결심하진 않는다.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교는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종교다. 하느님은 오직 한 분뿐이고 그분은 우리가 믿는 성서의 하느님이다. 다른 종교의 신은 모두 가짜다. 다신교는 터무니없는 종교이고 그걸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 벌 받을 사람들이다.’라고 배웠다. 안 그런가?

 

내 경우는 다신교와 유일신교의 차이가 무엇인지, 왜 어떤 사람은 다신교를 믿고 또 다른 사람은 유일신교를 믿는지, 두 종교가 역사적,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발전해왔고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게 된 것은 신학생이 되어 구약성서 및 주변문화와 종교를 공부하면서부터였다. 다신교는 단순히 신이 여럿이라고 믿는 종교가 아니라 역사와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는 독특한 방식임을 알게 된 거다. 유일신교도 마찬가지다. 유일신교는 여러 신들 중에서 가짜 신들을 다 없앤 후(죽인 후?) 진짜 신 한 분만 믿는 종교가 아니다. 신이 하나라고 믿게 되면서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달라졌고 역사와 자연과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도 크게 달라진 것이다.

 

하지만 두 종교의 차이를 알게 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유일신론자다. 달라진 점은, 다신교가 우주와 자연과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앎으로써 내 신앙의 성격을 더 분명히 알게 됐고 다신교의 장점을 내 신앙에 적용할 방법을 찾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앙의 ‘순수성’이 훼손되지 않냐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네 신앙에 순수성이란 게 있긴 한가? 그리스도교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비그리스도교 사상과 종교적 내용들이 그리스도교 안으로 흘러들어와 재해석되고 변형되어 자리 잡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엇이 ‘순수하게’ 그리스도교적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구분하기조차 어렵게 됐다. 이걸 개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왜 신이 여럿이라고 믿었을까?

 

팔레스타인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라는 두 거대한 문명세계 사이에 끼어 있다. 거대 문명권 주변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이스라엘은 양쪽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두 문명권이 모두 다신교 사회였다. 신의 존재를 믿는 종교는 다신교와 일신교로 구분할 수 있다. 그것의 차이는 신과 인간, 그리고 세상을 인식하는 데서의 차이다. 단순히 신의 숫자의 차이가 아니란 얘기다.

 

신이 여럿이라고 믿는 게 자연스러울까, 아니면 하나라고 믿는 게 자연스러울까? 사람도 여럿이니 신도 여럿이라고 믿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까? 신이 하나라고 믿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을까? ‘왜 신이 여럿이라고 믿었을까?’라고 묻지 말고 ‘왜 신이 하나라고 믿었을까?’라고 물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날에는 유일신 종교의 교세가 워낙 커서 신이 하나라고 믿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고 당연해 보이고 다신교가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옛날엔 그렇지 않았다. 정반대였던 거다. 고대 중동지역(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지역)에선 다신교를 믿는 사람이 100%에 가까웠다. 유일신교는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와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아케나텐(Akhenaten) 시절에 잠시 있었던 아텐(Aten) 종교가 전부였다. 그나마 아텐 종교는 아케나텐이 죽자 곧 사라졌지만 말이다. 그러니 고대 중동지역은 거의 100% 다신교 사회였다고 봐도 무리가 없겠다.

 

다신교와 유일신교의 차이를 몇 가지만 살펴보면 우선 다신교는 기원을 ‘역사’가 아닌 ‘신화’에 두고 있다. 그것은 형태가 없고 무질서한 우주가 형태를 갖추고 질서를 이루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다신교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에는 원리와 질서가 있어서 그에 따라 움직이고 삼라만상은 법칙에 따라 돌아간다. 우주와 인간의 역사는 예측 가능한 법칙이 적용되는 통합된 체계란 말이다. 그래서 다신교에서 지식과 종교적 영성(다신교에서 이 둘은 크게 다르지 않다)의 궁극적 목적은 역사와 자연, 우주질서의 내적, 합리적인 법칙을 발견하고 깨닫는 데 있다. 별자리나 양(羊)의 내장 주름을 살펴보고 거기서 신의 뜻을 알려 했던 메소포타미아 종교전문가들이 했던 일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별자리나 양의 주름을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그들의 변화 형태와 역사적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해서 통계적인 법칙을 발견하려 했던 것이다.

 

반면 구약성서의 야훼 유일신종교는 ‘역사적 사건’에 기원을 두고 있다. 야훼종교의 기원은 야훼라는 신이 갈대아 우르(Ur)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냈고 그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한 사건이다. 야훼는 아브라함에게 고향을 떠나 야훼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했다는 거다. 구약성서에는 창조이야기를 비롯해서 아브라함 이전 시기 얘기도 많지만 역사성(historicity)이란 면에서 보면 아브라함 얘기와 성격이 다르고 시기적으로도 아브라함 이후에 형성된 얘기들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야훼종교의 기원을 아브라함, 또는 더 후대인 출애굽사건에 둔다.

 

야훼 유일신종교의 궁극적 목적은 우주의 조화와 질서, 그리고 그 안에서 예측 가능한 합리적인 법칙을 발견하고 거기 순응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유일신 야훼의 ‘의지’와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다. 유일신은 의지를 갖고 뭔가를 이루려는 신이다. 그런데 유일신을 믿는 사람은 신의 의지를 자신의 힘만으론 알 수 없다. 유일신은 우주법칙과 질서에 자신을 드러내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별자리나 양의 내장을 아무리 살펴봐도 거기서 신의 의지를 발견할 수 없다. 신의 의지가 알려지는 것은 전적으로 신에게 달려 있다. 신이 알려주지 않으면 사람은 그걸 알 도리가 없다. 신이 자신의 의지를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 그것을 신의 입장에선 ‘계시’(revelation)라고 부른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에겐 예측불가능한 일이란 없었다. 능력이 부족해서 예측하지 못할 수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예측불가능한 일이란 없었다. 신은 질서 및 법칙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이스라엘에서 신은 근본적으로 예측불가능하다. 신이 의지를 갖고 하는 모든 일은 예측불가능하다. 유일신은 자신의 의지를 사람에게 설명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 야훼가 왜 아브라함을 불러서 자기가 알려줄 땅으로 가라고 지시했는지는 아브라함도 모르고 우리도 모른다. 그가 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는지도 마찬가지다. 야훼에게도 굳이 설명할 의무가 없다. 유일신이란 이런 존재다. ‘믿음’은 신의 의지를 받아들이고 그대로 실행하는 일이고 ‘죄’는 신의 의지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다신교에서 ‘믿음’은 우주와 역사에서 신들의 법칙과 질서를 발견하고 거기 순응하는 것이고 죄는 그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는 행위가 되겠다.

 

 

 

 

어느 운명에 관한 이야기

 

크리스토프는 열두 살짜리 아들 파벨과 둘이 산다. 그는 과학을 가르치는 대학교수이고 파벨은 아빠에게 컴퓨터를 배워서 어려운 수학문제도 혼자 푸는 영특한 아이다. 파벨의 고모 이레나는 합리적인 사고로 무장한 무신론자인 아버지와는 달리 파벨의 신앙과 영적인 성장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독실한 가톨릭교인이다. 그녀는 파벨을 가톨릭 학교에 보내고 싶어 한다.

 

한 추운 겨울날 파벨은 아빠가 낸 수학문제를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푼 후에 밖에 나갔다가 우연히 죽은 개를 보고 갑자기 슬픔에 빠져 죽음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빠져 혼란스러워한다. 그는 아빠에게 죽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아빠는 죽음이란 숨이 멎고 신진대사가 멈추는 것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어느 날 이레나가 파벨에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사진을 보여주자 그는 “이 분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대답해줄까요?”라고 묻는다. 같은 질문에 대해 아빠는 후손들이 더 잘 살게 만들어주는 게 삶의 목적이라고 대답했단다. 고모는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고 그들을 도울 수 있으며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하다면 인생은 훨씬 밝아질 것이라고 말하고 살아있는 건 선물 같은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 대답에 파벨은 미소를 짓는다. 아빠와 고모는 남매지만 다르다는 파벨의 말에 고모는 “네 아빠는 어렸을 때부터 많은 걸 계산해낼 수 있음을 알았고 그게 다양한 일에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어. 하지만 그래도 하느님을 배제할 수는 없단다. 아무리 네 아빠라도 말이다.”라고 대답한다.

 

하루는 파벨이 “엄마는 지금 무슨 꿈을 꿀까?”라고 컴퓨터에게 묻는다. 영화는 파벨의 엄마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죽었거나 따로 사는 모양이다. 이 물음에 컴퓨터는 모른다고 대답하는데 같은 질문을 고모에게 하니 고모는 주저하지 않고 “지금 엄마는 네 꿈을 꾸고 있단다.”라고 대답해준다. 파벨이 신을 믿느냐고 묻자 고모는 그를 안아주며 “지금 느낌이 어떠니?”라고 묻는다. 파벨이 “고모를 사랑해요.”라고 대답하자 고모는 “바로 그거야. 그분은 바로 거기 계신단다.”라고 대답해준다.

 

어느 날 부자(父子)가 외출했다 돌아오니 컴퓨터가 저절로 켜져 있는 게 아닌가. 아빠는 잠시 의아해 했지만 곧 잊어버린다. 두 사람은 스케이트를 타도 될 정도로 연못의 얼음이 두껍게 얼었는지를 컴퓨터로 계산하는데 컴퓨터는 충분히 얼었다는 대답을 준다. 그래도 아빠는 연못에 나가서 뛰어보고 잘 얼었음을 확인한 후에 비로소 안심한다.

 

다음날 크리스토프가 글을 쓰는데 갑자기 잉크병이 깨진다. 느낌이 안 좋았는데 그때 누군가가 벨을 눌러 나가보니 어린 소녀가 파벨이 집에 있냐고 묻는데 마침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호수로 몰려가는 걸 본다. 크리스토프는 연못 얼음이 깨졌다는 얘기를 듣지만 믿지 않는다. 자기의 계산에 의하면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연못에 가 보니 경찰이 시신 몇 구를 건져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못하고 바라보고 있는데 이네나가 곁에 와서 어깨에 손을 얹는다. 얼마 후에 크리스토프는 성당에 들어가 촛불이 켜져 있는 작은 제단을 부숴버린다. 그 바람에 촛농이 성모 마리아의 얼굴에 튀어 마치 마리아가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는 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키는 계명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와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은 십계명의 근본이면서 동시에 가장 크게 논란이 되는 계명이다. 한 사회 안에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에서 야훼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은 다른 종교에 대한 무시와 공격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불상에 절하는 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불교에 어떤 형상에도 절하지 말라는 계명은 공격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개신교인들이 부처님 상을 부수거나 단군 상의 목을 자르는 사건도 있지 않았나. 그들은 십계명을 지켰다고 주장할 텐데 그때마다 이 계명은 논쟁거리가 됐고 배타적이고 독단적인 ‘몹쓸 계명’이라고 욕을 먹었다.

 

구약시대 현실은 오늘날과 정반대였다. 그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할 것 없이 죄다 다신교 사회였고 자기들이 섬기는 신의 형상 만드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도시마다 수호신이 있었고 도시들 간에 전쟁이 벌어지면 승리한 도시의 신이 패한 도시의 신을 흡수해서 하위에 뒀다. 신도 늙어서 힘을 잃으면 은퇴해야 했고 젊은 신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였다. 바빌론의 신 마르둑(Marduk)과 아시리아의 신 앗수르(Assur)가 수메르의 신 엔릴(Enlil)을 대체한 게 바로 이런 경우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는 계명은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내치기 전에 몇 가지를 따져보자. 우선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라는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문제다. 유일신 종교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자기가 섬기는 신이 최고인 한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교(영어로 henotheism)가 있고,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자기들은 한 신만 섬기겠다는 유일신교(영어로 monolatry)도 있으며, 아예 다른 신들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고 오직 한 신만을 인정하고 그 신만 믿는 유일신교(monotheism)도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종교가 어디에 속하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우선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고 했으니 이 계명은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거다. ‘다른 신’이 있지만 그들은 야훼 앞에서 그들을 인정하지 말란 뜻이다. 훗날 바벨론 포로기와 그 이후엔 야훼 이외의 모든 신들은 가짜나 우상일 뿐이고 참된 신은 야훼밖에 없다는 유일신 신앙(이것이 진짜 monotheism)이 자리 잡았지만 그 전에는 다른 신들도 존재를 인정했다는 얘기다. 물론 그들은 야훼를 믿고 섬기고 따르겠다고 했지만 말이다. 이스라엘의 야훼종교는 ‘monolatry’에서 ‘monotheism’으로 발전해나갔다고 보면 되겠다.

 

‘야훼만 섬긴다는 말

 

왜 야훼는 자기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했을까? 왜 이스라엘은 그 명령을 받아들였을까? 유일신 종교가 낯설지 않은 오늘도 이 계명이 논란이 되는데 하물며 유일신 종교의 유례가 없던 상황에서 야훼는 왜 그런 명령을 내렸으며 왜 이스라엘은 그 ‘이상한’ 명령을 덥석 받았는가 말이다.

 

가나안 정착 이후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대표 신 바알(Baal)의 강력한 유혹을 받았다. 그럼 이 계명은 야훼와 바알을 앞에 놓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명령이었을까?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근본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이 계명엔 담겨있다. 키에슬롭스키의 영화가 던져주는 문제의식이 바로 이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야훼냐 바알이냐의 문제는 단순히 신의 이름과 관련된 문제도 아니고 어느 편이 힘이 더 센가를 가리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것은 각각의 자길 섬기는 사람에게 무엇을 약속하는가의 문제였고, 신을 섬기면서 어떤 사회체제를 이루는가의 문제였으며, 더 나아가서 가치관, 세계관, 우주관이 걸려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곧 한 공동체가 추구하는 기본적인 가치와 사회구조 및 체제에 관한 문제였다는 얘기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이 야훼를 택한 게 아니라 야훼가 이스라엘을 택했다고 말한다. 야훼가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의 속박에서 해방시킨 목적은 그들이 예속되지 않고 자유롭게 살게 하려는 데 그치지 않고 야훼만 섬기고 예배하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데 있었다. 곧 파라오와 그 배후에 있는 신들을 중심으로 해서 철저하게 계층화된 이집트와는 달리 왕 없이 오로지 야훼만 섬기고 예배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던 거다. 십계명은 이와 같은 자유와 평등 공동체의 기본헌장 같은 것이었는데 그 중 첫째 계명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었다.

 

모든 ‘선택’에는 ‘포기’가 따른다. 선택과 포기는 동전의 양면이다. 무슨 일에든 양다리 걸치는 건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스라엘에게 유일신 야훼를 선택한다는 말은 곧 야훼 이외에 다른 신들은 포기한다는 뜻이다. 자유, 평등, 형제/자매애가 기본이 되는 공동체를 싫어할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구성원의 모든 필요와 욕망을 채워주면서 동시에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광야에서 유랑할 때 배가 고프면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고기 가마 옆에서 배불리 먹었다면서 모세와 야훼에게 불평을 늘어놨다. 이집트의 고기 가마는 그들의 욕망을 상징한다. 자유와 해방과 형제/자매애가 충만한 공동체의 건설은 고기 가마 옆에서 배불리 먹으려는 욕망의 실현과 양립할 수 없다. 그걸 포기하지 않으면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한 경건한 유대인에게 “당신에게 신을 믿는다는 것은 뭘 의미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나는 신이 필요해서 믿지 않는다. 나는 다만 신을 예배하려고 믿는다.”고 대답했단다. 오늘날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체로 신은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는 존재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돈이나 집값 상승이나 지역개발에 대한 정보 같은 물질적인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명예나 마음의 평화나 구원이나 영생처럼 비물질적인 것이란 차이는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신은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존재다. 끝없이 다양한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신은 전지전능해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니까 이게 올바른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는 형편이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에선 그렇지 않았다. 야훼는 이스라엘이 달라고 하기도 전에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면서 야훼만 섬기고 자유와 해방과 형제/자매애가 충만한 공동체를 만들라고 했다. 이스라엘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 약속을 지키려면 이집트의 고기 가마에 대한 미련은 포기해야 했다. 이게 시내 산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covenant)이다. “나는 네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현대인은 옛 신을 죽이고 새로운 신을 만들어냈다

 

크리스토프는 어떤 사람일까? 신실한 가톨릭교인인 이레나와 달리 그는 합리성으로 무장한 무신론자였다. 하지만 무신론로서의 그의 오만함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영화를 읽는다면 그건 감독의 의도가 아닐 게다. 신자는 겸손하고 불신자는 오만하다는 식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영화는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말하는 얘기가 아니라 철저하게 십계명의 첫째 계명에 관한 얘기다. 첫째 계명은 유신론이나 무신론에 대한 계명이 아니다. 유신론자라고 해서 첫째 계명을 지키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고 크리스토프의 잘못을 찾아내려 할 거라 생각한다. 그가 잘못했기에 아들이 죽는 비극이 벌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지나친 합리성이 잘못이었나? 교회를 안 다니는 게 잘못이었나? 아들을 가톨릭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게 잘못이었나? 그럴 리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잘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가 도대체 뭘 잘못했기에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렸나 말이다.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닫는 데 한참 걸렸다. 영화는 크리스토프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합리적이고 철저하게 계산적인 사람이란 게 잘못일 수는 없다. 영화가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닌데 나는 그걸 찾으려 했으니…. 내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거다. 십계명이 잘못을 밝혀내서 처벌하는 ‘법률’이 아니란 사실 말이다.

 

파벨은 ‘사고’(事故)로 죽었다. 사고에는 ‘원인’은 있을지언정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따질 수는 있지만 왜 일어났는지는 따질 수 없다. 안 그런가? 쓰나미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그것을 종교적으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된다. 동성애자나 회교도가 많아서라는 식으로 설명하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파벨이 크리스토프의 아들이 아니라 이레나의 아들이라 해도, 호수에 가기 전에 온가족이 밤새워 기도했다 해도 죽음이 그를 피해가지는 않았을 거다. 영화는 ‘만일 이랬다면 파벨이 죽지 않았을 거다’라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것과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거다.

 

‘자율’(autonomy)은 현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현상 중 하나다. ‘자율’은 ‘스스로(auto) 법/규범이 된다(nomy)’는 뜻이다. ‘자율’이란 그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고 스스로 선다는 의미다. 당연히 속박이나 지배도 거부한다. 현대인은 자율적이 되기 위해 오랫동안 자기들을 지배해온 신(神)을 죽였다. 세상은 “신은 죽었다!”라는 니체의 선언대로 됐다. 현대인은 분명히 신을 죽였다.

 

그렇다고 현대인은 ‘자율’에 성공했나? 자율적인 존재가 됐을까?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스스로 다스리고 스스로 규범/법이 되는 데 성공했나? 내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다. 현대인은 옛 신을 죽이고 수많은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냈다. 많은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하나의 신을 죽였다. 자기가 ‘섬기고 싶은’ 많은 신들을 만들어 자유롭게 섬기기 위해 자기를 ‘섬기라고 명하는’ 신을 죽였던 거다.

 

그래서 유신론자나 무신론자 모두에게 똑같이 신은 존재한다.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 신은 절대가치인데 반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가치가 곧 신이다. 사람이 자기 존재와 삶을 무엇인가에 종속시킬 때 그게 바로 신이 아닌가. 신이 인격인가 아닌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인격이든 아니든 나를 그 아래 종속시키는 존재가 바로 나의 신이다.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신

 

이와 같은 현대적 상황에서 첫째 계명은 매우 충격적인 선언을 한다. “어떤 모양이든 그 모양을 본 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형상 금지 계명(개신교 셈법으론 둘째 계명)은 어떤 모양이든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놓고 그걸 섬기지 말라고 한다. 당시 종교상황에 비춰보면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당시엔 모든 종교가 신을 상징하는 형상을 만들어놓고 입히고 먹이고 노래하고 춤추며 예배하는 게 당연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신을 기분 좋게 만들어서 섬기는 자의 소원을 들어주도록 하는 게 제사장의 일이었다.

 

신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놓으면 그것은 고정된 존재가 되게 마련이고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야훼는 어떤 모양으로든 자기를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고 명했다. 형상을 만들지 않으니 거기 절을 하거나 그걸 섬길 수도 없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야훼가 불길 속에서 계명을 줬을 때 백성들은 야훼가 말하는 소리만 들었지 아무런 모습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란다(신명기 4:12). 야훼는 소리로 전달된 자신의 의지(will)를 실행하라고 명한 거다. 자기를 보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자길 보면 죽는다고도 했다. 모세처럼 야훼를 보고도 안 죽은 사람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좌우간 백성들은 십계명을 받았을 때뿐 아니라 그 후에도 야훼를 본 적이 없다. 다만 야훼의 목소리를 들었을 뿐이다(이에 대해선 졸저 《하느님 몸 보기 만지기 느끼기》 참조). 그렇다면 고대인의 관점에서 야훼는 ‘사라진 신’이거나 ‘없는 신’이 아니었을까? 눈에 보이는 형상이 없으니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은 고정되지 않는다. 오로지 목소리로만 존재하는 신은 사람에게 좌지우지되지도 않는다. 야훼의 계시는 오로지 목소리로만 전달되고 사람은 영감(inspiration)으로 그걸 받아들인다. 목소리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신은 늘 새롭게 다가오는 신이다. 절망에 빠져 있던 엘리야에게 미세한 음성으로 다가왔던 것처럼 말이다(열왕기하 19:9-18). 야훼는 상황에 따라서 늘 새롭게 말한다. 야훼에게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훼를 믿고 섬기겠다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늘 새롭게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야훼를 여느 신들과 똑같이 섬긴다면 그건 첫째 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형상은 만들지는 않았더라도 야훼를 나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신으로 여긴다면 그 역시 계명을 어기는 거다. 목소리로만 다가오는 야훼이외에 무엇이든 신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그것 역시 계명을 어기는 게 된다. 눈에 보이든지 보이지 않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종교적 가치든 세속적 가치든 상관없이 야훼의 자리에 올려놓으면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게 된다.

 

첫째 계명을 어기는 게 ‘죄’일까? 그걸 ‘죄’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게다. 크리스토프의 문제는 합리성과 과학을 도구 이상의 가치로 여겼던 게 아닐까? 그게 죄는 아니지만 첫째 계명과 어긋나는 태도인 건 분명하다. 이런 태도가 삶에서 지속된다면 죄 이상의 문제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건 기본적인 가치관의 문제이고 우리는 그 토대 위에 살아가는 것이니 말이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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