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웅의 인문학 산책(19)

 

“세상은 아름다운가, 추악한가?”

 

 

“세상은 아름다운가, 추악한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우리는 어떻게 내릴 수 있을까요? 불교는 “인생은 고해(苦海)다”라고 선언했고 기독교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이라고 외칩니다. 인류에게 주어진 큰 가르침 가운데 두 흐름이 따지고 보면 모두 현실의 삶은 고되고 힘겨운 것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 고단함이 곧 세상의 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힘겨움이 또한 세상이 절망스러움을 단정 짓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인생사가 어려운가, 쉬운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안에 들어차 있는 내용물이 어떠한가에 따라 미와 추는 결정되지 않을까 합니다.

 

“세상이 왜 이리 추할까?”라는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경우는 우리가 지니고 있던 순수한 기대가 어이없이 깨어지거나 이기적인 쟁투로 의리가 저버림을 당하든지 아니면 조잡한 이유들로 해서 싸움의 강도가 점점 더 깊어갈 때가 포함될 것입니다. 그런 순간, 우리는 온 세상을 모두 잿빛으로 색칠을 해 버리고 세상에 대한 모든 것을 결국 다 알아버리고 말았다는 식으로 여기곤 합니다.

 

 

 

 

아직도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순진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이상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조롱이 쌓여 가면 그는 아마도 세상은 본래 아름답지 못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라는 견해를 굳혀가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해하는 행위에 몰두하고 마는 것입니다.

 

상처가 깊으면 어느새 인간은 자신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사는 목표를 왜소하게 만드는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왜소함은 그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가는 것을 모르는 채 인간은 그것이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전부의 영역인 줄로 자기를 세뇌시켜가게 됩니다. 그 감옥 밖을 나서는 것은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없을 것이라는 미망으로 지내게 되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그래서 우리는 세상이 지어주거나 자신이 건설한 감옥에서 수인(囚人) 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시간을 낭비한 채, 아니 자신의 꿈을 허비해버린 채 수인의 지침을 지켜가면서 일상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름다움은 드물거나 없는 거야 하는 식의 확신을 되풀이 자신에게 일깨우면서 꿈을 갖는 일은 위험하거나 자신을 세상의 추악함에 함께 빠지게 하는 섣부른 짓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애초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세상은 아름다운가, 추한가?” 그 답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에게 실망과 좌절을 주기 쉽습니다. 꿈을 안고 들판에 나간 나비는 생각지도 못한 폭풍우 앞에서 몸을 떨고 집으로 가는 길을 서두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상처를 보듬으면서 다시는 세상을 향해 날아가지 않을 거야 하고 다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때로 우울해보여도 그 우울함의 그림자를 거두어 나가면 여전히 예기치 않았던 아름다움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걸 알지 못한 채 자기가 만든 감옥의 안전함에 기대어 살면 우리의 시간은 아무리 풍요해도 가난해질 것입니다. 상처 없는 인생이 없고, 절망을 체험해보지 못한 시간들이 없을 리 없겠지만, 결국 나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은 우리가 가진 꿈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고 끝까지 부여잡고 가는 것일 겁니다. 그 때 필요한 말은 “꿈을 버리지 않는 자는 아름답다”가 아닐까 합니다.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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