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5)

 

하나님의 뜻, 사랑

- 전집 3권 『성서 개요』 호세아 편 -

 

 

“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저 사람이 하나님이 준비해주신 나의 짝이 맞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요?” 지방에서 열린 한 청년 모임에서 받은 질문이다. ‘교회를 교회되게’라는 주제로 진행했던 특강 시간 말미에 받을 것이라고 예상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 내 특강 논지를 열심히 들은 뒤의 질문인 것은 맞았다. 그리스도인 두 사람이 이룬 가정이라면 가정도 ‘교회의 최소단위’이기에 이미 교회의 작동 원리나 관계 방식이 그 안에서 적용되어야 한다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진지하고 순수한 청년에게 되물었다. 가장 이상적인 두 사람의 만남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생각하는지. 그녀는 ‘서로 사랑하는, 건강한 두 사람이 만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반드시 둘 다 건강해야할까요?” 내 질문에 청년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참석자들이 모두 당황한 눈치였다.

 

물론 결혼은 ‘자선사업’이 아니다. 불쌍해서, 저 사람은 나 없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결혼’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결혼하여 이룬 가정 공동체가 ‘교회’라면, 예수께서 가르치셨고 사도 바울이 누누이 설교했던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라면, 결혼이 ‘손해는 보지 않고 이익은 극대화하는 무역활동’이 아니어야하는 것은 분명하다. 성서에서 가장 ‘불공정한’ 결혼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호세아가 탑 랭킹에 들 것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아내 ‘고멜’의 외도는 호세아를 고통스런 결혼생활로 이끌었다. 김교신이 호세아와 감정이입하여 풀이한 부분은 호세아의 애통함을 생생하게 전한다.

 

일찍이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이라는 여성과 결혼하였다. 열정적인 호세아의 성격으로 보아서 저가 그 신부에 대한 사랑은 꿀송이보다 더 달큼하였을 것이며, 저의 경건한 생애로 보아서 저는 그 신처(新妻)의 영혼이 날로 더욱 성결하여지기를 아침저녁에 쉬지 않고 기원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결혼생활 중에서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서 3남매까지 낳았다. 그러나 호세아의 가정에는 명랑한 행복이 오기보다 침울한 의운(疑雲)이 가리우기 시작하였다. 의심을 금하고자 힘쓰면 힘쓸수록 처의 행동은 이상하였다. … 호세아에게는 날로 이 괴로움이 더하여 갈뿐더러 드디어 최후의 날이 왔다. 고멜은 … 남편을 버리고 가출하여 버렸다. 순정열애의 사람 호세아의 흉중이 어떠하였으랴. … 저는 광인처럼 분하였고 절망자처럼 사나워져 배반한 처가 나간 문을 바라보면서 마음의 잡을 바를 못 얻었고 몸의 둘 곳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김교신이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했던가? 「호세아」 서두를 읽으면서 나 역시 어려서부터 늘 의문이 들었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2절)는 구절이 쉽게 지나쳐지지 않았다. 물론 예언자들이야 제 임의로 생각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預)’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었으니, ‘가서 음란한 여자랑 결혼하라’는 계시를 내리신다면 황당하고 고통스런 일이나 ‘아멘’으로 받아야할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자주’ 인간의 상식을 넘어 있다는 것 또한 신앙의 사람이라면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십분 이해심을 발휘하여 ‘공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징적 행위로서의 결혼’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어린 시절의 내게 하나님의 이 계시는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전혀 인격적 끌림이 없는 여자를, 그것도 앞으로 음행할 것이 예언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지만 김교신의 저 놀라운 상상력은 내가 막연하게나마 ‘그랬을 거야’라고 생각해왔던 행간 사이의 간격들을 멋지게 채워주었다.

 

한 여자를 사랑하여 결혼하고, 신앙의 경건함을 함께 누리고자 했던 열망이 컸던 남편의 마음을, 그리고 그런 기대들이 ‘배반’당했을 때의 분노와 애통함을 절절한 언어로 담아내었다. 그래. 그랬을 거야. 호세아는 고멜을 사랑했을 거야. 그래서 결혼했고 그녀와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그의 이상이 어그러지지 시작했을 거야. 그녀를 사랑한 만큼 버림받은 분노가 컸을 거야. 필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었을 거야. 왜냐고,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느냐고.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의 계시는 그 때 받았을 거야. 여전히 몸은 분노하고 있는데도, 자복하고 엎드려 온전히 자신의 실존을 주 앞에 내어놓은 호세아에게로 ‘하나님의 뜻’이 스며들어 왔을 거야.

 

때에 노도와 같이 저의 가슴에 일조(一照)의 광명이 비추이며 가늘고 고요한 소리가 들리기를 “호세아야, 네가 배반한 아내로 인하여 분하냐. 발광할 듯하냐. 당연한 일이다. 진정 사랑하는 까닭에 노할 것이다, 분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라. 배반한 아내를 사랑하라, 사랑하라.” 아직 호세아의 수족은 분노의 경련을 금치 못하였을 때이나 저의 양심에는 ‘아멘’의 응답이 생겼다.

 

그리고 ‘아마도’ 호세아는 이 불행한 개인의 결혼사를 체험하면서 고통가운데 받았던 계시를 통해 ‘비로소’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가지셨을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으리라. ‘사랑하는 아내’ 이스라엘과의 황홀한 밀월에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자꾸 곁을 떠나는 그들을 보며 ‘남편’되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고통스러우실까? 얼마나 아프실까? 또 얼마나 분하실까? 그 고통만큼, 그 아픔만큼, 그 분노만큼 우리 이스라엘에게 갚으신다면, 우리가 어찌 이 땅에서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호세아의 삶이 ‘불행한 남편’으로 끝나지 않고 ‘사랑의 선지자’로서 우리에게 계속 이야기될 수 있는 까닭은 자신의 개인적 아픔을 승화시켜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로 읽어내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읽고 나니 비로소 마음 가운데 자유함과 기쁨이 넘쳐났다. ‘내’ 하나님이 그러실 리 없었을 거라는 어린 시절의 막연한 소망에 확신을 가져다 준 풀이었기 때문이다. 호세아 한 사람의 삶 역시 아끼시고 사랑하는 하나님이신데, 설마 ‘공동체적 교훈’을 주시려고 호세아의 자유의지와 선택과 사랑의 관계성을 몽땅 희생하셨을 리가.

 

호세아가 고멜과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 것은 여느 남녀가 그러하듯 자연스런 일이었을 터이다. 그가 깨달은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그 이후에, 그리고 오직 호세아‘만’이 받아 전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호세아가 여전히 고통 가운데 힘겨워하고 있는데도, 만일 옆에서 누군가가 제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훈계한다면(설사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는 ‘정답’을 먼저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그건 ‘폭력’이다. 호세아 스스로, 호세아의 자유 영혼으로, 그의 산 신앙으로 하나님과 씨름하듯 기도하다 받은 계시의 말씀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그 말씀은 비로소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었다.

 

간통죄 폐지가 결정된 이후 신문사나 지인들로부터 질문을 많이 받았다. 기독교사회윤리학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고. 찬성이냐고, 반대냐고. 그들에게 되물었다. 만일, 그동안 간통이 위법행위였기 때문에 외도를 못했던 커플이라면, 꾹꾹 참았던 커플이라면 그 둘은 과연 바른 관계 안에 있는 커플이겠느냐고. 구약시절처럼 ‘돌로 칠 것인가’ 모세의 법처럼 ‘이혼 증서를 써 줄 것인가’ 아니면 현대사회의 개신교 윤리처럼 ‘합법적이고 신앙적인 결혼은 한 번에 한 사람만!’(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방식으로)을 적용할 것인가는, 이 놀라운 사랑의 관계적 혁명을 체험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호세아의 선포에 직면하여 모두 무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 감사하게도 특강에서 이런 해석을 나누는 동안 청년들의 눈빛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죽기까지 ‘타인을 위한 나’이셨던 그리스도를 ‘가장’ 삼아, 두 사람은 존재와 삶을 나누며 서로를 건설해가고자(오이코도메인) 끊임없이 ‘너’를 부르고 기다리고 섬기는 ‘공동체’를 꾸려가고 싶다고.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