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유철의 음악정담(26)

 

표절의 시궁창에 핀 장미

- 진회숙,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

 

 

저는 술을 못합니다. 최근에는 예의 차원에서 맥주 한 잔 정도는 사양하지 않습니다만, 이때까지 살아오며 한 번도 술에 취해 보지 못했습니다. 학창 시절을 불량 청소년 소굴인 밴드부에서 보냈고, 박정희의 피살과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을 자행한 그 어간에 군에 입대해 최전방 부대에서 만기 제대했지만 누구의 회유나 압력에 굴해 술을 입에 댄 적이 없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것이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두들겨 맞든 고문관 취급을 당하든 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고, 그것이 은근한 제 자존심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근본주의 신앙과 결별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수십 년 동안 술을 멀리했습니다. 술을 먹는 게 죄라서가 아니라, 술을 먹지 않는 것에 익숙해진 라이프스타일을 굳이 허물어야 할 이유를 못 찾았기 때문입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주변에서 “아직도 너는 근본주의 신앙을 못 버렸느냐?”는 투로 술을 자유롭게 먹는 것으로 ‘착한 크리스천’과 자신을 차별화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술이나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교회 안에서 꼭꼭 숨기고 사는 좌파 내지 진보적 크리스천 목사나 지식인들의 위선이 싫었습니다. 또한 원하는 사람들끼리 폭탄주를 제조해 마시는 거야 내 간섭할 일 아니나, 직장이나 단체 술자리에서 여성이나 약자들에게 술을 퍼 먹여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 사회의 야만적 음주문화를 혐오했기에 술을 입에 대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술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느냐 하면, 그건 아닙니다. 한 동안은 술에 취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추적해 보고 싶은 호기심으로 살았습니다. 잠드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그와 유사한, 사람의 몸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술에 취하는지, 각 단계마다 어떤 증상이나 상황이 벌어지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 문학 작품 가운데 술을 취하는 과정을 면밀하게 묘사한 작품이 궁금했습니다. 인터뷰로 만났던 이명원 교수에게도 그 질문을 했던 순간이 생각납니다. 아직 그런 작품을 소개받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어떻게 술에 정복(?) 당하는지를 추적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술, 특히 동양의 옛 사람들에게 술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리고 음악 작품에서 드러나는 서양 사람들의 술에 대한 이해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술의 철학을 제게 알려 준 그녀의 주량이 얼마인지, 주사가 있는지, 어떤 술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녀를 만나기는커녕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녀가 술의 종류를 꿰고 있는지, 예를 들어 와인은 어떤 브랜드가 좋은지를 아는 지 여부도 모릅니다. 어쩌면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으니 저처럼 술을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글을 읽은 술꾼들은 술을 전혀 못하는 제가 선정한 술꾼에 대해 기대가 전혀 없겠지만, 상관치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제가 아는 최고의 술꾼입니다.

 

고대로부터 술은 신이 내려주신 최고의 선물이란 이야기를 여기게 길게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술에 대한 예찬은 어느 분야에나 다 있겠지만 클래식 음악도 예외는 아닙니다. 저는 별로 즐기지 않지만 오페라에도 유명한 술노래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에 나오는 ‘샴페인의 노래’, 베르디 <라 트라비아타>의 ‘축배의 노래’,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의 ‘권주가’, 그리고 베르디의 <오텔로>에서 악의 화신인 이아고가 부르는 ‘건배의 노래’를 대표적인 오페라의 술노래로 꼽나 봅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서 클래식 음악의 최고 술노래는 구스타프 말러의 <대지의 노래> 중 5번째 곡인 ‘봄에 술 취한 사내’입니다.

 

저는 진회숙의 《클래식 오디세이》에 나오는,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대지의 노래>를 주제로 쓴 ‘나를 취하게 내버려 두게’란 에세이보다 빼어난 술 이야기가 있는지 모릅니다. 불과 몇 쪽 분량이지만, 그녀의 글을 읽으며 바로 취한 것 같았거든요. 이래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술에 미치는구나 싶었습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그 에세이를 다시 읽었더니 그때처럼 취기가 오르는 느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은 이태백의 ‘달 아래서 홀로 마심’이란 시와 그 시에 흠뻑 젖어 빼어난 곡을 쓴 말러, 그리고 그의 인생 황혼에 겪었던 슬픔과 고독을 주제로 빚어낸 최고의 술 예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토록 빼어난 술에 대한 노래를 교향곡으로 작곡한 말러도 술에 대해 매우 엄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주량은 맥주 한 잔이나 소량의 와인을 마시는 정도였습니다. 역시 술을 질펀하게 마셔대야 술에 관한 좋은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닌가 봅니다. 이 글을 알고 난 뒤에는 보도를 통해 술로 인한 이런저런 눈살 찌푸리는 만드는 사건 사고를 보더라도 이 글을 떠올리며 성난 가슴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학위 논문에서 음악만큼 표절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는 영역이 또 있을까 싶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대개 그런 비판은 밖에서 안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나오는 고백일 경우가 많으니 틀림없는 사실일 겁니다. 꼭 학위 논문이 아니더라도 서점에 나가서 작곡가나 음악사 관련 책을 몇 시간만 훑어보아도 그런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됩니다. 최근 들어 일부 음악도들이 믿을 만한 책을 직접 쓰거나 번역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음악 서적들의 베끼기는 여전하되 그 정도가 심각합니다. 그나마 내용이라도 사실에 부합하면 좋겠는데 무비판적으로 베끼다 보니 오류가 자주 눈에 띕니다. 견디기 힘든 것은 오류가 저마다 다를 수 있는 의견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작곡가나 작품에 대한 펙트일 때가 많다는 점입니다. 만약 국내 음악 박사 학위 소지자가 장관 청문회에 나오거나 유력 국회의원이 되어서 언론에서 음악계의 논문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면 난리가 나지 싶습니다.

10여 권의 음악 에세이집을 펴낸 진회숙은 진중권의 누나이자 세계적인 현대 음악 작곡가인 진은숙의 언니입니다. 이화여대와 서울대 음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을 거쳐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 프레시안 인문학습원 '오페라 학교'와 '클래식 학교', 그리고 평화방송 <FM 음악공감-진회숙의 일요 스페셜'> 등을 진행하고 있는 음악평론가입니다.

진회숙의 ‘피타고라스부터 슈톡하우젠까지 음악의 역사를 만든 사람들’이란 부제가 딸린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 권쯤 머리맡에 가지고 있을 만한 책입니다. 688쪽이나 되는 적지 않은 분량인데 진회숙이 이제까지 낸 저서 중 부피가 가장 두껍습니다. 자신의 색깔을 최대한 억누르고 작곡가의 면면을 충실하게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의 주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진회숙이 저의 이런 생각에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녀의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이 나오기 전까지 저는 웬디 톰슨이 쓴 《위대한 작곡가의 생애와 예술》을 사전처럼 늘 곁에 두고 참고했습니다. 웬디 톰슨은, 중요하지 않은 작곡가들은 200자 원고지 10여 매 내외로, 중요한 작곡가는 20매로,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초특급 음악가는 30여 매로, 그리고 알아두면 좋겠다 싶은 작곡가들은 시대별로 묶어서 간단히 설명하는 방식으로 160여 명을 소개하였습니다. 놀라운 점은, 짧은 서술임에도 불구하고 꼭 필요한 이야기는 다 들어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2000년대 초반에 열풍을 일으킨 웬디 수녀의 미술 에세이집처럼 말입니다. 

 

진회숙의《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은 웬디 톰슨의 책과 더불어 음악 애호가들의 좋은 반려가 될 것 같습니다. 두 책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잘 보완하여 준다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진회숙이 서술한 몇몇 작곡가를 찾아 읽어 보았더니 그의 성실성이 눈에 들어옵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충분히 숙성시켜서 자신의 톤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이 좋습니다. 분량 면에서 웬디보다 곱절은 더 썼기 때문에 풍만감도 그만입니다. 선정한 그림이나 사진이나 악보나 초연 당시의 포스터 등에서 꼼꼼함과 세심함이 느껴집니다. 음악을 공부하지 않은 클래식 에세이스트들의 책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꼭 필요한 음악적 팁도 덤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바흐의 평균율, 평균율에 대해 이야기는 많이 쓰는데 정작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것의 반대인 순정률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한 눈에 보여주는 책은 많지 않거든요.

 

 

 

 

선정한 100명의 음악가에 대해서도 대체로 만족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음악 에세이스트들이 쓴 음악가에 대한 책들이 잘 알려진 몇몇 작곡가 위주인데 반해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은 딱딱한 음악사 교과서처럼 어려운 악보나 전문 용어로 기를 죽이지 않으면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비인기 음악가들에 대해서도 균형 있게 다룹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윌리엄 버드, 바로크 시대의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와 페르골레시, 낭만주의의 카를 닐센 등이 빠진 것이 아쉽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러나 21세기가 주목하는 작곡가 진은숙이 친동생이기 때문에 빠진 것은 이해되지만 100명의 음악가에 윤이상이 없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수준이 안 되거나 안익태처럼 우리나라에서도 평가가 양분된 작곡가를 무리하게 올려달라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각주까진 바라지 않지만 참고문헌이 있었다면 더 좋았지 싶습니다.

 

그러나 《음악사를 움직인 100인》에서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믿을만한 내용이나 다른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없는 진귀한 사진이나 그림 등이 아니었습니다. 이제까지 낸 10여 권의 음악 에세이들과는 볼륨감이 다른 책을 내놓으면서 진회숙은 저자의 자리를 스스로 사양했습니다. 자신의 노고에 대해 엮은이로 만족한 것입니다. 700여 쪽에 가까운 책을 세상에 내어놓으면서 자신은 여러 자료를 잘 정리해 놓은 것일 뿐 독창적인 연구를 한 것이 아니란 점을 행간을 통해 고백한 것입니다.

 

진회숙의 음악 에세이집을 다 읽긴 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열혈 독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성실하고 좋은 음악도란 건 뭔가 2프로 부족했습니다. 가끔은 글이 맥락에서 탈선도 좀 하고, 때로는 독자가 놀랄 만큼 속내를 털어놓고, 속이 상하면 욕지기도 좀 하고, 언제나 그런 건 문제가 되겠지만 문장 또한 몸이 원할 때는 탐미적 글쓰기에 매달리면 좋겠는데 제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진회숙의 열혈 독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50대 후반에 700여 쪽에 가까운 책을 내면서, 그것도 어느 정도 음악에세이스트로 이름을 얻었음에도 그녀가 자신의 역할을 엮은이로 자리매김하는 걸 기분이 좋습니다. 작가로부터 이게 얼마 만에 느껴 보는 감동인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의 더 많은 글쟁이들이 가끔은 엮은이의 역할에 만족할 줄 안다면, 그렇게 소박한 자유와 행복에 눈뜰 수 있다면 표절 따위와는 사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도 너무 낭만적인가 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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