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14)

 

하늘은 빛을 잃고 땅은 흔들리고

 

 

내가 땅을 본즉 혼돈(混沌)하고 공허(空虛)하며 하늘들을 우러른즉 거기 빛이 없으며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震動)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搖動)하며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空中)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荒蕪地)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城邑)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猛烈)한 진노(震怒) 앞에 무너졌으니(예레미야 4:23~26).

 

 

멸망으로 기울어진 절망의 시대, 예언자가 세상을 둘러본다. 어둠의 시대, 그나마 어둠 속에서 잠들지 않고 어둠을 응시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일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데, 보이느니 어둠 밖에 없는데 하릴없이 어둠을 바라보느냐며 절망하지 않는 사람, 절망의 시대엔 절망하지 않는 사람이 그나마 희망이다.

 

땅을 바라보니 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 섞을 혼(), 어두울 돈(), 빌 공(), 빌 허(),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창조 이전의 모습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도 그랬다(창세기 1:2).

 

혼돈과 공허한 세상을 하나님은 말씀으로 아름답게 바꾸신다. 좋은 목수에겐 버리는 나무가 없듯이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까지도 아름다움을 위한 질료로 삼으신다. 혼돈과 공허에 말씀을 섞자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그런데 다시 혼돈과 공허,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잃어버리자 세상은 도로 혼돈과 공허에 빠진다. 말씀에서 벗어난 삶은 그 자체가 혼돈과 공허이다. 아무리 세게 돌려도, 채질을 열심히 해도 중심축이 없는 팽이가 설 없듯이.

 

 

 

 

하늘을 보니 빛이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창조 전의 세상, 어둠이 깊음 위에 있었다(창세기 1:2). 말씀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어둠이다. 말씀을 떠나 서서히 어둠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떠나는 순간 어둠에 속한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나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 119:105, 새번역)의 뜻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산들도 진동을 하고, 작은 산(언덕)들도 요동을 한다. 세상이 다 흔들려도 그 중 제자리를 지킬 것 같은 산들도 언덕들도 흔들린다. 산들이 흔들리고 언덕들이 요동을 치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을 것은 없다. 모든 것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땅에 퍼져 번성하라 하셨던 사람은 보이지를 않고, 좋은 땅은 황무지가 되었다. 견고해 보이던 성읍도 다 무너지고 말았다. 죄의 결과는 황폐화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텅 비고 만다.

 

심지어는 공중의 새도 다 날아간다. 하늘은 빛을 잃고 땅은 흔들리고, 그렇게 모든 것이 황폐화되자 결국은 새들도 떠나고 만다. 황폐화된 땅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어서 날개 달린 새들도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날아간다는 말은 도망한다는 뜻이다. 먹이를 구하러 짝을 찾으러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쫓겨 서둘러 도망을 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혼돈과 공허의 세상이 또렷해진다. 공중의 새를 만드시기 전의 상태 또한 혼돈과 공허였다. 하나님께서 혼돈과 공허를 지우셨던 방법 중의 하나는 그 한 가운데를 새가 날게 하신 것이었다.

 

새가 사라진 곳엔 노래도 사라진다.

노래가 사라진 곳, 그곳은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땅이다.

새마저 다 날아간 세상, 노래마저 들리지 않는 세상, 이제 누가 깨어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땅을 눈물로 바라볼지.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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