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11)

 

영혼의 둔감을 경계하며 기다릴 뿐

 

 

교회 종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도 기독교를, 아니 기독교인들을 싫어했던 내가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다니. 그날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세상 밖으로 떠밀린 자의 고적감에 짓눌려 죽음을 생각하고 있던 내게 저녁 예배를 알리는 교회 종소리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근원으로부터의 부름이었다. 아니 어쩌면 유수지에 얼비치고 있었던 석양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잔잔한 물결 위에 드리운 부드러운 햇살은 비현실적인 평안함을 내게 안겨 주었다. 그때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고, 마침 어머니가 내 곁을 지나가고 계셨다. 문득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기독교와 맺은 인연의 시작이다.

 

나름대로 꽤 많은 월급을 받던 직장 생활을 그만둔 것은 모멸감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사직서를 던지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나의 무책임함과 성급함을 꾸짖으셨다. 할 말이 없었다. ‘이제는 뭐 할 거냐’는 질책에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했다. “대학에 들어갈 거예요.” 언간생심,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질 의무가 있는 것처럼 열심히 공부했고, 보기 좋게 낙방했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후기 시험은 볼 수 없었다. 내년을 기약하기로 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해도 좋은 대학에 들어갈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소속이 사라지자 돌연 세상은 다른 곳으로 변해 있었다. 어제까지도 총천연색으로 보였던 세상이 갑자기 흑백 화면으로 바뀐 것 같았다. 내 앞에 활짝 열려 있는 것처럼 보였던 문들이 일시에 닫혀 버린 것 같아 막막했다. 그때 그 종소리를 듣게 듣게 된 것이었다.

 

 

 

 

 

생전 처음 나간 교회에서 나는 ‘설 땅’을 되찾았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 준다는 사실이 참 좋았다. 그가 내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그들의 ‘있음’이 내게는 힘이었다. 장자는 쓸모없는 것의 쓸모 있음에 대해 말했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기 위해서는 불과 몇 촌(寸)의 땅만 있으면 되지만, 실제로 딛고 있지 않은 주위의 땅을 모두 파 없애면 바로 서 있을 수 없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사실이 고마움임을 나는 외로움을 통해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기독교인은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이라고 규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보아도 남을 도울 처지가 아닌데 어떻게든 더 어려운 사람을 돕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람들, 세상이 부러워할 만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사람들, 삶의 곤고함을 누구보다 많이 경험했으면서도 영혼에 미움과 원망의 그늘이 드리우지 않은 사람들……. 그들은 내게 낯선 이들이었다.

 

"대체 저분들 속에 무엇이 있길래 저리도 아름다운가?” 공통점은 예수였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위해 평생을 걸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내 눈에는 추한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자신의 영적인 부실함을 권위의 의상으로 가리는 사람들, 관심의 화살표가 오로지 자신만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특히 더 그랬다. 그들 속에서 나는 사랑의 능력도, 인간적 진실함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실망스러웠다. 예수의 핵심과 만나기도 전에 나는 개혁되어야 할 교회 현실에 먼저 눈을 뜨게 되었다. 뜨거운 소명이 아니라 기존의 교회에 대한 분노가 나로 하여금 신학교의 문을 두드리게 만들었다. 때로는 내가 길을 택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길이 나를 택할 때가 많다. 지금은 내가 그분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다.

 

신학교에 입학하던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내게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하셨다. “나는 막내아들이 주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14년 동안이나 기도했단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장병으로 죽음을 선고받았던 어머니는 1960년 대 초에 나의 고향 마을에서 열렸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기적적인 치유를 경험하셨다. 그 이후 어머니는 새벽마다 나를 위해 기도하셨던 것이다. 한 번도 내게 교회 가자는 말씀을 하진 않으셨지만 어머니는 부실한 당신의 아들을 하늘 아버지께 맡겨놓고 그렇게 홀가분하게 지내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신학교 시절은 참담했다. 신학의 언어는 진부했고, 시대의 짐을 지기에는 실존의 무게가 너무 컸다. 신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도 나는 주변인이었다. 채플을 빼먹는 것이 다반사였고, 도서관보다는 다방에 틀어박혀 전공과 무관한 책을 읽느라 하루해를 다 보내곤 했다. 내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목회를 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자리까지 왔다. 바다에 던져졌던 요나가 마침내 니느웨 바닷가에 당도했던 것처럼. “절망의 파도에 떠밀려도 희망의 해안에 당도한다”는 누군가의 노랫말처럼.

 

목사 안수를 받은 지 6년이 지난 1990년 초 나는 일터였던 학교를 떠난 후 임지를 찾지 못한 채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부과한 휴식의 시간은 내게 두 가지 선물을 안겨주었다. 시간은 남아돌아가고, 정신은 치열했다. 뭔가 방향을 정해야 할 때였다. 스스로에게 부과한 휴가가 내게 준 첫 번째 선물은 글쓰기였다. 그 무렵 창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잡지에서 내게 소설을 소개하고 비평하는 글의 연재를 부탁해왔다. 잡다한 독서 편력이 글쓰기의 형태로 수렴되는 순간이었다. 글쓰기는 나 자신을 응시하는 기회가 되었다. 무형의 형태로 내 속에 들어있던 지난 세월의 의미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특히 텅 빈 원고지를 앞에 두고 글을 기다릴 때의 그 긴장감은 오히려 내 정신을 각성시키곤 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는 여행처럼 글은 나를 늘 예기치 않은 곳으로 데려가곤 했다.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일은 늘 부담스럽지만,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설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에게 부과한 휴가의 두 번째 선물은 우리나라에서 열린 제1회 ‘정의․평화․창조질서의 보전’(JPIC) 대회였다. 마땅히 할 일도 없던 차에 나는 그 대회에 참여했고, 그 대회는 나와 나의 목회가 지향해야 할 이정표가 되었다. “홍수와 무지개 사이”라는 대회의 초안 문서는 나로 하여금 평화가 깨진 현실 세계의 아픔에 눈뜨게 만들었고, 생태계의 파괴가 위험 수위에 달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부터 나의 신학과 목회의 주제는 ‘평화와 생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목회에 결합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평화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오랜 분단의 세월을 살아온 이들에게 평화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평화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생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로 환원되곤 했다. 교회 안에 있는 회중들의 정치적인 스펙트럼은 참으로 다양했고, 진실을 선포하면서도 그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영적인 넓이와 깊이가 내게는 부족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우리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평화와 생명’이라고 명토 박아 놓았다.

 

생태계의 문제를 교인들의 가슴에 각인시키는 데도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죽어가는 생태계를 회복시킬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에 사람들은 공감했지만, 그것을 촌각을 다투는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날이 갈수록 지구가 한 몸 공동체라는 생각에 내 마음은 급하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시적인 수사가 아니라, 실상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하지만 창조 세계의 보전이라는 문제는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풍요의 환상과 늘 대립된다. 생명을 노래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풍요를 찬미하는 이들의 음성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는다. 물론 상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기는 하다.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자연 재해가 사실은 자연 재해가 아니라 인재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두려움으로 깨닫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변혁으로 이어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일이 아니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생태학적으로 개종시킬 수 있다면 나는 기쁘게 그 길을 갈 것이다.

 

문제는 나의 길이 그분이 가리키는 길과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생의 모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영혼의 성숙임을 깨달았던 시간부터 나는 교우들을 일사분란한 교리의 체계 속으로 인도하지 않았다. “만물은 흔들리면서/흔들리는 만큼 튼튼한 줄기를 얻는다”는 오규원 시인의 시구를 성구처럼 암송하며 교우들 스스로가 삶에 대한 신앙적 성찰을 하며 살기를 요구했다. 노자는 “하늘 그물은 성기어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다”(天網恢匯 疎而不失)고 말했다. 나의 스승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내게 주신 사람을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리는 일”(요6:39)이라 하셨다. 하지만 나의 그물은 성기기만 할 뿐이어서 많은 이들을 잃어버리고 있다. 이 죄를 어찌할 것인가?

 

예수의 중심을 잡고 싶었고, 예수 정신이 질식하고 있던 교회를 바로잡고 싶었던 젊은 날의 내 꿈은 오그라들었다. 바로잡아야 할 것은 나의 마음이고 태도임을 절감할 뿐이다. 기세 좋게 배낭에 많은 짐을 챙겨 넣었다가, 산을 오르면서 이것저것 내던져버리고 숨이 턱에 찬 채 허위허위 오르는 초보 산꾼처럼 소중한 것들을 너무 많이 내던지며 여기까지 왔다. 내가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중심을 향한 순례의 여정이 되기를 꿈꾼다. 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스스로 길을 만들며 걷기보다는 이미 남들이 다져놓은 길로만 걸어온 나날이었다. 이제는 빚을 갚는 마음으로 새로운 길을 걷고 싶다. 새벽이슬이 맺힌 풀밭을 앞서 걸어가며 길을 여는 이슬떨이처럼. 하지만 반드시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분량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그분이 지금까지 나를 이끄신 것과 마찬가지로 나를 이끄실 것이다. 하여 나는 영혼의 둔감을 경계하며 기다릴 뿐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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