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웅의 인문학 산책(25)

 

“우리의 인텔리겐차는 어디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나오는 “대심문관 대목”은 신앙으로 포장된 중세의 조작된 신화에 갇혀 있는 사회의 비극을 환상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지상에 내려온 그리스도를 도리어 귀찮게 여기고 배격하는 종교 지도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신들도 믿지 않은 교리를 대중들이 신봉하도록 하면서, 자신들만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성채를 수호하려는 자들의 위선적인 정체를 목격하게 됩니다.

 

이들이 정작 원했던 것은 평소에는 그토록 신실한 자세로 고백하고 있는 예수의 재림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세가 대중들의 뇌리에 영원히 뿌리내리는 것임을 우리는 대심문관의 발언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라는 깃발은 단지 이들의 영토를 성역(聖域)으로 만드는 상징에 불과할 뿐, 그 안에 담겨 있는 새로운 역사의 대안에 대한 열망은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고 차단하고 맙니다.

 

이것은 결국 대중들의 영혼을 장악하는 문제이자, 그로써 이들 성채의 주인들이 집행하는 명령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복종하도록 만드는 작업을 요구하게 마련입니다. 하여 대심문관은 그리스도 예수에게 괜히 이 지상에 얼쩡거리면서 대중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지 말라는 요지의 논고와 추방령을 내립니다. 대중이 진실을 깨우치는 순간, 이들의 그동안 잘 보존해온 중세는 순식간에 붕괴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곱추》에서도 마찬가지로 “성채의 신학”은 민중의 자유로운 생명을 질식시켜 나가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파리의 가장 가난한 민중 가운데도 끼지 못할 처지의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의 격렬하고도 육감적인 춤은, 이 모든 허위와 가식의 논리로 무장한 특권의 질서를 저 밑바닥에서부터 뒤흔드는 혁명의 벅찬 율동이었습니다.

 

시대의 질고로 등이 휘영청 굽어버린 채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콰지모도와, 세상의 모멸적 시선 앞에서도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에스메랄다의 만남은, 그래서 인류의 길을 가로막고 서 있는 장벽을 해체하는 시작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다수의 대중에게 비참한 인생을 아무런 반감도 없이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특권의 현실을 일시에 허무는 반란이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각성, 그 격정의 순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역사와 계급의식》을 썼던 게오르그 루카치는 인간의 영혼을 불구로 만들고 비인간화 시키는 일체의 주장과 교리, 그리고 사상과 체제에 대한 끊임없는 싸움이 결국 이 사회를 진실로 새롭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갈파합니다. 이는 “현실의 진상을 덮고 있는 베일을 벗겨내는 작업”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로써 인간은 자신에게 존재하는 진정한 능력의 비밀을 알아가게 됩니다.

 

말하자면, 인도의 식민지 현실을 담은 《킴》의 작가 러드야드 키플링이 말했던 “백인들의 짐(white men's burden)”, 즉 비서구 지역의 원주민들은 원래 열등하고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힘이 없어 서구 백인들이 이들을 도와야하는 사명이 있다는 식의 논리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고리를 잡아채서 우리 자신의 역사와 삶에서 진정한 주인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뛰어난 엘리트가 없이는 나라가 힘 있게 진보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일견 옳습니다. 그러나 그 엘리트가 특권층이 되는 순간, 이들을 위해 다수의 대중들은 차별과 희생의 굴레 속에 묶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엘리트는 다만 자신을 위한 이기적 목표를 향해 달릴 뿐, 이들에게 국가공동체 전체의 희망은 열정적 관심이 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이 특권구조가 대를 이어 세습되는 구조가 견고해지게 될 때 대중의 절망은 날이 갈수록 깊어져만 갈 것입니다.

 

강대국의 보호가 있지 않고서는 존립의 근거를 보장할 수 없게 된다고 여기는 나라는 누군가의 영원한 식민지가 되기로 작정한 것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논리를 전파하는데 앞장서는 것이 만일 이 나라의 엘리트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 엘리트 집단이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특히 능력을 인정받으면 아주 쉽게 성채의 하인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인텔리겐차”는 지금 모두 어디로 가고 말았는지 고뇌하게 됩니다. 대중은 특권의 질서 속에서 외롭게 생존투쟁의 볼모가 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김민웅/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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