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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해방과 분단 70년, 친일과 주류

by 한종호 2015. 8. 12.

한종호의 너른마당(29)

 

해방과 분단 70년, 친일과 주류

 

 

20세기의 전반기는 민족의 주권이 박탈당한 상황에서 제국주의 통치에 대한 여러 가지 저항이 있었고, 그것은 이후 해방된 조국에서 중요한 정치세력의 저력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미국의 군정에 의한 자주적 국가건설이 가로막히고, 친일잔재세력의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으로 해방된 나라는 식민지 유산의 연속이라는 기형적 역사전개의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민족에게 고통을 가했던 자들이 다시 권좌에 오르고, 외세에 빌붙어 민족에게 피를 흘리게 했던 자들이 득세하는 현실에서 해방정국은 들끓었다.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놓고, 친일잔재세력들과 민중들은 대립했으나 미군정의 지원과 친일잔재세력의 기득권이 결합하여 대세를 쥐게 되면서 사태는 민족사의 요구대로 되어가지 않았다.

 

이 당시 교회는 미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정치적 환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해방정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스스로 상실해버리고 만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독교는 정권과의 관계에서 정의롭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또한 미국의 원조물자의 배분과정에 끼어 들어간 개신교는 이 과정에서 타락과 부패의 사슬에 얽히게 되며 이후 교회를 병들게 한 물량주의의 시작을 경험하게 된다. 강대국을 등에 업고 권력에 충성하며 재물까지 손에 쥐는 기회를 갖게 된 교회는 민족의 진로보다 교회의 기득권을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를 놓고 이전투구를 벌였고, 이 와중에 뜻있는 목자들은 외롭고 고난에 찬 길을 걸어야 했다.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교회

 

교회는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고 정치사회적으로 유력한 지위를 확보할 가능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이러면서 한국사회는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에 대한 기대를 갖지 못하게 되었으며, 교회는 자신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데 열을 올리는 집단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었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힘이 있고 재력이 있는 이들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상품성이 점점 더 중요한 요구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해방이후에 노골화되기 시작했다기보다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점점 더 강해진 것이었다.

 

해방정국의 혼돈을 뚫고 좌와 우의 이념대립을 넘어 민족의 통합과 식민지시대의 아픔을 치유하고 미래의 전망을 내보여야 할 교회가 지위와 재물에 눈을 뜨니 교회의 내부는 시끄러워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고, 현실에 대한 교회의 당당한 발언은 들어보기가 어려워졌다. 민족의 분단이 현실로 다가왔으나 교회는 이에 대하여 치열하게 저항하지 않았으며, 이승만 정권이 구호로 부르짖었던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마저도 받아들이는 반평화적인 발상에 동조하고 만다.

 

그러나 이러한 분단정권이 이후 민족상잔이라는 비극적인 내전으로 나타나면서 기독교인들의 희생은 막대해진다. 북한정권은 기독교인들을 미국의 첩자정도로 인식하고 신앙인들을 탄압했고 신앙의 자유에 대하여 재갈을 물리기 시작했다. 전쟁의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인들은 북한의 공산주의에 의한 학살과 탄압으로 순교했고 이것은 이후 남북 대치상황에서 초기에 기독교가 민족화해보다는 반공과 반북적인 기치를 들어올리게 되는 상황을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아무튼, 민족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감당하면서 건국의 진로를 선택하지 못하고 미국에 의한 군정과 분단정권이라는 절름발이 해방으로 20세기 중반을 맞이한 끝에 치르게 된 전쟁은 20세기 민족사 전체를 걸쳐 가장 끔찍한 비극이었다. 무려 5백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하는 이 전쟁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같은 민족을 향한 증오를 배웠고, 용서할 수 없는 대립의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이 원수를 사랑하고 끝없이 용서하라고 가르쳤으나, 민족의 분단과 냉전 체제의 현실은 기독교 신앙의 한계선을 설정하는 환경을 만든 것이었다.

 

 

 

 

군사정권의 지배, 저항과 자유의 함성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은 사람들에게 깊은 좌절을 주었고, 상실의 시대를 열었다. 창백한 모습의 실존주의적 허무감이 지배했고, 가난한 나라의 백성이라는 현실은 자신감을 실종하게 했다. 한국민족의 앞날은 희망이 없어 보였고, 이대로 가난하게 살다가 마는 나라처럼 생각되었다. 정치권은 모두를 실망하게 했고, 돌파구 없는 나라의 암담함으로 다가왔다.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교회는 침묵했고, 고난은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사회의 상층부는 미국의 원조물자를 뜯어먹느라고 정신이 없었으며, 권력은 흉폭해져갔다. 마침내 일어난 4·19는 잠시 자유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으나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나갈 정신적 원리의 분명한 수립을 하지 못하면서 정국은 다시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 들어갔다.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치유하려는 움직임이 이 시기에 일어났으나, 분단이라는 특수상황이 가한 이념 환경으로 인해 제동이 걸렸다. 좌파적 경향을 가진 이른바 혁신세력의 등장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분단을 극복하려는 목소리나, 빈곤에서의 정의로운 탈출이나 또는 사상적 자유를 부르짖는 움직임 등 역사를 개혁하려는 노력들이 잇따라 있었으나 시대적 전환점을 형성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른하늘에 벼락처럼 일어난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이 모든 상황을 일거에 바꾸어버리는 철권통치의 시대를 열었다. 식민지의 비극적 잔재와 분단의 고통, 전쟁의 후유증,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빈곤이라는 현실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은 젊은 군인들의 등장에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대를 건다. 기존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상에 질릴대로 질린 상황에서 이들 군인들의 정치참여는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그렇게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았다. 군사정권의 지배로 인해 이 나라는 단기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으나 그러한 공적을 뒤덮을 만큼의 무수한 역사적 질곡을 양산하는 시대를 경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현대사에서 박정희 체제의 등장 이상의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사건 또한 없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 또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제기될 정도로 그에 대한 애증의 교차는 극심하다. 무능하고 비효율적이었던 정치권의 현실에 비해 그의 등장은 국가권력을 매우 신속하게 조직화하고 이에 맞추어 국가발전의 추진력을 엄청나게 발휘하는 시대를 연 것이었다. 왕이 없어 혼란스러워하고 약자의 처지에 빠져 있다고 여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구했고, 이에 사울이 등극하면서 이스라엘이 강국의 현실로 갈 수 있었던 것과 비견되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사울의 등장은 이스라엘에게 좋은 일만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자유, 정의, 통일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치열한 논쟁을 야기 시켰으며 어떤 선택이 당시의 상황에서 가장 적절하고 마땅했는가에 대한 도전을 가해왔다.

 

경제성장의 프로그램은 한편으로는 빈곤한 국가의 백성으로서 자신감을 잃고 있었던 국민들에게 매우 조직화된 역량을 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반면에, 이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가치와 사람들이 있음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빵을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 위에 소수의 부가 축적되는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과 움직임은 권력으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뼈저린 체험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일부는 여전히 침묵하거나 권력의 입장에 동조했고, 다른 일부는 저항의 깃발을 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민주화 투쟁의 시대가 우리의 현대사에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교회는 현실참여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고, 일부 교회는 반체제 운동의 근거지가 되어갔다. 산업현장의 핍박 또한 교회의 참여를 요구, 도시산업선교라는 형태로 교회는 강도 높은 자본축적과정에서 희생당하는 이들의 삶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냉전체제의 경직된 이념체계하에서 ‘빨갱이’로 몰렸으며, 현실에 안주하던 교회는 물량성장의 길로 일로매진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한국사회 성장의 방식을 놓고 두 가지 길이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쪽에서는 경제성장의 기회를 놓치지 말고 협력해야 하며 이것은 교회성장의 원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교회내부의 교권주의가 강해졌고, 권력의 권위주의적 체제와 유사한 당회장의 권위주의적 교회정치가 당연한 것으로 용납되어갔다. 이와 함께, 교회는 경제성장의 과실을 축복의 구체적인 증거로 가르쳤고, 소외되고 약한 자들의 삶을 외면하는 현실에 빠져 들어갔다.

 

반면에, 이러한 경제성장의 정의롭지 못한 측면에 눈을 뜬 일부 교회는 권력과 사회를 향해 더 이상 이러한 방식으로 가다가는 인간의 생명이 짓밟힐 뿐이며 하나님의 진노를 산다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외로운 광야의 소리였다. 하지만 자유의 함성이 그로써 그친 것이 아니었다. 군사정권의 시대는 역설적으로 자유에 대한 깊은 각성을 하게 했으며,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현실상에 대한 생각을 심화시켜 나갔다. 고난의 연대가 이루어졌고, 권력과 재물로부터 버려진 이들의 삶에 대한 관심을 길러나가고 훈련하는 귀중한 역사의 은총을 체험하게 된 것이었다.

 

마침내 고통스러웠던 군사적 권력의 지배도 끝나고 민간정부가 들어서면서 교회는 새로운 진로를 선택하는 일에 고뇌해야 했다. 시대는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요구와 필요 또한 이전에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다양해져갔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이전의 가치관으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긴장도 사라지고, 민간정권 수립의 흥분도 가라앉은 상황에서 이른바 포스트모던의 다채로운 실존적 사회적 요구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사회 또한 과거에 볼 수 있었던 획일적인 사고체계나 가치관은 더 이상 존재이유를 갖지 못한 반면에, 그러다 보니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카오스적 상태에 처하고 말았다. 당장에 교육현장의 붕괴로부터 시작해서 성문화의 혼란스러운 양태, 정치윤리의 파산, 원로의 부재, 기준을 갖지 못한 표류하는 사회 등 우리의 20세기 말은 (지금도 혼란의 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지만) 종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가고 있는 것을 뚜렷하게 체험했다.

 

이와 함께 그간 은폐되어 있던 역사의 정체를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있게 됨으로써 우리의 민족적 자화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결과로 인해 발생한 20%에 이르는 빈곤층의 문제에 직면하면서 ‘정의로운 공동체’의 건설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에 다시 부딪히고 있는 중이다. 이른바 “20대 80의 사회”라는 극단적인 사회적 양극화의 비극도 통과하고 있다. 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이 끝난 줄로 알았으나 아니었던 것이다. 지금도 상위 5%의 사람이 무려 80%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는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한국사회에 어떤 좌표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인지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모두 우리 사회에 해방과 분단 70년의 역사가 무엇을 만들어 놓았으며 무엇을 남겨놓았고 무엇을 가능하도록 해주고 있는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우리의 20세기는 주체적인 발전의 가능성을 상실하면서 시작되었고, 그 결과를 혹독한 시련으로 감당해내었다. 그리고 이후 우리의 현실은 나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권력층과 사회 상층부의 부정과 부패, 가치관의 혼란과 민족적 자주성의 약화, 빈부격차와 불신의 극대화, 잘못된 과거 청산의 미비, 은폐된 역사의 비극 등의 질곡을 안고 있다. 그리고 이 질곡을 풀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는 일에 대한 공동체적 의지와 순수한 열정조차 날이 갈수록 약해지고 식어가고 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역사의 전환을 기대하고 환호했지만 그 환호에 걸맞는 전망과 대책이 없는 현실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실 70여년 전 우리민족이 겪어야 했던 역사적 비극의 반복을 예감하게 하는 사태이다. 세계는 모두 자신의 발전을 위한 나름의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건만 우리는 지금 낭비적인 파쟁과 미래적 가치의 중심이 서있지 못한 혼란과 환멸에 절은 무력감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준비된 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기회가 와도 소용이 없게 된다. 등불을 준비하지 않은 처녀들처럼 문이 닫히고 어두운 밤의 시대를 문 밖에서 이를 갈며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시간을 보내는 자에게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소득이 없는 세월만 있을 뿐이며 그마저 있던 달란트도 사라지고 만다. 우리민족이 지금 자칫 그럴 위기에 처해 있다.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이라는 슬로건에 휩싸여 팡파르를 아무리 울려도, 이는 마치 “피리를 불지만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 백성들”에게 하는 것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해방과 분단 60년의 역사가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는 바를 바로 보지 못하면 우리는 파선(破船)의 고통을 또다시 겪게 될지 모른다. 파도가 배를 향해 덮치고 있는데 요나는 기도하지 않고 있으며, 돛을 올려 가야할 바를 가르키는 믿음의 담력이 없는 현실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일제시대·미국 지배체제 소산물이 결합해 만들어낸 기득권층

 

한때 정가에서는 ‘주류론’으로 시끄러웠다. 정적(政敵)을 향해 그런 식으로는 이 나라의 주류, 메인 스트림에게 거부당할 것이라는 정치 공세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나라 이 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는 메인 스트림은 과연 누구인가? 불행하게도 이 나라의 주류로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세력은 민족사의 정통성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이 땅에 등장한 정치경제적 주류 세력은 일제시대 일본제국주의 세력에게 부역했던 자들이었으며, 이들은 미국 군정의 배경을 뒤로 하고 다시 자신들의 권세를 보호하면서 주류 행세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봉건시대의 잔재와 맥이 닿아 있으며, 이러한 연고로 해서 해방 이후 남한에 세워진 국가를 장악한 주류 세력들은 이 땅의 민족적 열망을 배반한 자들이었다.

 

자연 이들은 자신의 권세를 사리사욕적으로 이용했고, 역대 정권에 붙어서 그 기득권을 지켜내는데 혈안이 되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들 기득권 세력들은 이후 군사정권의 보호 아래 성장해 왔고, 그로써 자신의 기반을 방어해냈다. 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불의한 기득권을 지켜내려는 보수 세력일 뿐만 아니라 역사의 진전을 가로막은 수구 세력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그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동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기조차 한 것이다.

 

이른바 메인 스트림은 이 나라의 정치·경제·언론·교육·문화·군사 각 분야에서 인사와 물질을 좌우하고 있으며 그들의 기득권을 의문시하는 존재나 세력을 이념적으로 매도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이들의 매도에는 반드시 '빨갱이'라는 단어가 위력을 발휘했고 그로써 무수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어온 역사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 나라의 교육이나 가치관은 메인 스트림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정당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거나 도전하면 그것은 곧 도발 행위로 진단되었고 파문의 대상으로 정리되는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었다. 친일 경찰이 해방된 나라의 경찰 수뇌부가 되었고, 일본군에 부역하여 독립운동을 탄압했던 자들이 모자만 바꾸어 국군의 기강을 세웠으며 친일 지식인들이 이 나라 교육의 토대를 감당했으니 그런 나라의 메인 스트림이 가진 본질적 성격이 무엇인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분명하다.

 

이후 미국이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다시피 하는 시기가 오면서 한국의 메인 스트림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된다. 알아서 미국의 이익을 챙겨주고, 알아서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알아서 미국의 정책을 지지하는 세력으로서 이들은 친일세력 이후의 신주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수한 미국 유학생들이 이러한 친미 주류 세력의 구성 요소가 되었고 그로써 한국 사회의 메인 스트림은 이들의 향배에 따라 이루어지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이렇게 보자면, 우리 사회의 메인 스트림은 일제시대 식민지 상황의 소산물과 미국의 압도적인 지배체제 하의 산물이 하나로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이 나라의 메인 스트림이란 국가와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헌신적으로 자신을 바친 이들이 아니라 일신의 영달을 위해 강대국의 손에서 사육된 세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여 오늘날 한국의 언론들이 자주적이지 못하고, 강대국의 논리를 그대로 베껴 전달하는 까닭을 알게 된다. 태생적 한계와 출신의 본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이들 메인 스트림은 이제 역사의 극복과 청산의 대상이며, 그로써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일에 장애가 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역사의 시기에, 우리는 해방이라는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담고 만 결과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주류는 권력이다. 그래서 주류 ‘바깥에’ 있는 이들은 누구나 한 번쯤 주류이기를 갈망한다. 주류들도 주류 권력의 단맛을 계속 즐기고 싶어한다. 그래서 ‘주류 콤플렉스’는 주류는 물론 비주류 모두에게 강요되는 것이다.

 

정계·재계·관계 등에서 이른바 TK·PK·MK 등으로 상징되는 많은 파벌과 인맥, 혈연을 중심으로 한 족벌과 혼맥, 동문 등으로 맺어진 학맥.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로 얽힌 잡다한 인맥과 파벌이 할거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어쩌면 주류 콤플렉스에 깊이 빠진 사회의 다양한 군상들의 모습이 아닐까. 주류론이 의미 있는 바는 어쩌면 이런 권력지향적인 헐벗은 군상들의 구체적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70년의 민족사 속에 담아놓으신 그분의 음성과 메시지

 

지난 1세기에 우리 민족이 흘린 눈물과 피로써 이미 우리는 민족사의 새로운 진로를 깨닫는 일에 족한 체험을 하지 않았는가? 이제 할 일은 그 눈물을 닦아주고 흘린 피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나가는 일에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해방과 분단이라는 역사의 질곡을 제대로 짚어나갈 때 그 역사가 제기한 과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것을 풀 힘을 얻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난 700년의 민족사 속에 담아놓으신 그분의 음성과 메시지를 발견하라는 숙제 앞에 우리는 서있다. 시련을 겪고도 여전히 광야에서 방황하는 민족은 어리석다. 언젠가는 그 광야의 방랑이 끝나는 시간이 와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갈 바를 몰라 헤매는 우리 민족의 앞날에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어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희망의 길’을 뚫어내는 일이다. 그러자면 먼저, 우리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리대로 미완성의 해방과 분단의 아픔으로 빚어진 70년의 절망과 간구를 우리의 것으로 삼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할 때 민족사의 미래는 또다시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휘둘리게 될 것이다. 민족사의 축복을 구하는 길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는 말씀에 있다. 우리들 손에 쥐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이상 낭비하는 민족이 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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