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의 '덤벙덤벙한 야그'(22)



나에게 여행은, 약일까 독일까?



20대 때는 해외여행에 편견을 갖고 있었다. 대학생 때는, 금수저 물고 태어나 공부할 시간 많은 아이들이 장학금 받아 해외여행을 가고, 아르바이트 하며 생계비와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가난한 학생들 사이의 양극화 때문이었다. 부자 학생들은 장학금 받아 해외여행 다니고, 가난한 학생들은 뼈 빠지게 일하는 현실이 싫어, 괜히 화살을 그 부자 학생들에게 돌린 것이다.


그즈음 만났던 10살 많은 교회 형은 어느 날 나에게 “2백만 원만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꿔달라”고 했다. 부모님 생신인데 돈이 급하게 필요하다고. 형 이름으로 정직하게 대출받으라고 거절했더니, ‘대학생 대출이 이자가 싸니까’ 등등 핑계를 대다가 안 통하니까, 한다는 말이. “내가 20대 때 해외여행을 다니느라 이젠 더는 대출을 받을 수가 없다. 난 여행 다니면서 수천만 원 빚을 졌지만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너도 해외여행을 꼭 가봐라.”


어이가 없었다. 빚내서 세계여행 다닌 사람의 미래가 결국은 열 살 어린 동생한테 대출을 대신 받아달라는 거라니. 해외여행, 참 몹쓸 짓이구만…. 대출 받아 여행갈 용기도 없었지만, 내가 20대 내내 해외여행을 가지 않은 이유였다. 그러다가 3년 전, 서른한 살이 되어서 일 때문에 미국에 가면서 인식이 바뀌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느낌적 느낌’이었다. 낯선 땅에 착륙하는 순간, 내 지난날들의 고집, 내 20대 시절의 아집이 후회스러웠다. 미국 내 탈북자들, 남미 노동자들과 미소를 주고받으며 “지구에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약자들의 연대”라는 ‘진리’를 체득하였다.



첫 해외여행 중 LA에서 만난 갈매기. ⓒ이범진



온전히 관광으로만 해외를 나간 것은, 6개월 전 신혼여행이 처음이었다. 나가면 나갈수록 ‘빚을 지고서라도 20대 때 많이 다닐 걸’ 아쉬움이 깊어진다. 그때 그랬다면, 내 현재의 인생이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가만히, 15년 전부터- 빚을 내거나, 혹은 집이 부자라서 마음껏 해외여행을 다닌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았다.


대부분은 평범하게 살고 있었다. 몇몇은 ‘큰 결심’으로 자기의 부와 권력을 가난한 이웃에게 쏟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몇몇은, 10년 전 철없던 시절에 먹던 욕을 그대로 먹을 정도로 삶의 태도가 변하지 않고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계속 빚만 불려가고 있었다. 돈이 많아 그러는 건 그렇다 치고, 가난한 사람이 왜 계속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까 안타깝다. 입으로는 뭔가 ‘거창한 이야기’를 하면서 뒤로는 교회동생에게 대출을 받아달라던 10년 전의 교회형이 떠올랐다.


해외여행이 ‘독’인지 ‘약’인지, 구분하는 방법의 하나는 여행 후 그 사람이 ‘꿈’과 ‘현실’을 구분하는지, 그중에서도 현실을 ‘회피’하는지 ‘직면’하는지에 달렸다. 현실을 벗어나 꿈같던 여행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구질구질한 현실과 구역질나는 나의 악함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모든 여행자는, 다시 ‘꿈’으로 회피하는가 vs. 꿈의 ‘환희’를 현실 직면의 용기로 통합시키는가, 갈림길에 선다.


직면하는 사람의 인생은 달라진다. 그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낙엽이 떨어지는 건, 지구 한끝에서 누군가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기 때문”[각주:1]이라는 진리에 한 발짝씩 다가간다. 내가 누리는 자유가, 뭇사람들이 온갖 굴욕을 겪으며 역사에 직면한 덕이라는 걸 깨달아간다. 그래서 남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몰입하지 않고, 그저 남을 위하여 살아간다. 거창하고 고상한 ‘뜻’을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당장 내 옆의 가족과 친구를 위해 살아간다.


9월 중순에 친척을 만나러 2주간 미국에 간다. 인생 네 번째 해외여행이다. 나 역시 꿈(여행)으로의 회피는 쉽지만, 현실에 직면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고약한 나의 내면과 마주하는 일에 거듭 실패한다. 이러다간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게 처음이자 마지막 ‘직면’일까봐 두렵다. 그때 하나님께 “왜 너의 달란트(인생)를 땅에만 묻어놓았느냐!” 호통을 들을까 두렵다.


그래서 여행에 다녀왔을 때, 주변인들이 두 눈 부릅뜨고 ‘저놈이 회피하는 지, 직면하는지’ 나를 감시해줬으면 좋겠다. 벌거벗은 채 하나님 앞에 서는 영적 동지들의 적극적 개입(도움) 없이는, ‘여행 할아버지’가 와도 인생은 늘 회피의 늪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이범진/ <복음과상황> 기자








각주)

  1. 공지영, 『별들의 들판』, 34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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