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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다윗 이야기

광야에서의 다윗(3)

by 한종호 2015. 9. 3.

다윗 이야기(9)

 

광야에서의 다윗(3)

 

1.

 

이제 블레셋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다윗과 블레셋의 관계는 한 마디로 성격규정하기 어렵게 얽혀 있다. 양자관계는 다윗 초기엔 분명 적대적이었다.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스라엘 안에서 명성을 얻었다. 블레셋 입장에서 보면 그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원수였던 거다. 하지만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게 되면서 둘의 관계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과거엔 적대적이던 관계가 우호적으로 탈바꿈했던 거다. 그게 양쪽 모두에게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피신했다가 여의치 않아 미친 척 해서 빠져나왔다는 얘기(사무엘상 21:10-15)는 앞에서 했다. 그 후 다윗은 그일라와 십 광야의 산성 등을 전전하며 지냈다. 떠돌이 ‘하비루’답게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가 주로 머문 곳은 유다 동쪽 산지와 서쪽 해안평야 사이에 있는 저지대, 이른바 ‘세펠라 Shephelah’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이곳은 촌락이 발달하지도 않았고 인구밀도도 낮았다. ‘하비루’ 거주지로 적당했던 거다.

 

그 동안에도 사울은 지치지 않고 다윗을 추격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생긴 집착이라서 그렇게 질겼을까, 그는 다윗이 야훼의 선택을 받았음을 알면서도 그를 죽이려 했다. 기필코 죽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하지만 다윗이 자길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을 땐 사울도 감격해서 그를 ‘아들’이라 부르면서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하기도 했다. 얼마 안 가서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했지만 말이다. 이러니 다윗의 ‘선행’(?)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다윗이 다시 아기스에게 갔던 것은 사울을 피해서 갈 데가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혼자서 생각하였다 ‘이제 이러다가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순에 붙잡혀 죽을 것이다. 살아나는 길은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망명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사울이 다시 나를 찾으려고 이스라엘의 온 땅을 뒤지다가 포기할 것이며 나는 그의 손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사무엘상 27:1). 그는 가족들과 부하 6백 명을 거느리고 아기스에게 내려가 거기에 주저앉았다. “다윗이 가드로 도망갔다는 소식이 사울에게 전하여지니 그가 다시는 다윗을 찾지 않았다.”(4절).

 

다윗은 아기스를 찾아가서 이렇게 간청한다. “임금님이 나를 좋게 보신다면 지방 성읍들 가운데서 하나를 나에게 주셔서 내가 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종이 어떻게 감히 임금님과 함께 임금님이 계시는 도성에 살 수가 있겠습니까?”(5절). 이에 아기스는 시글락이란 성읍을 그에게 내줬다. 설화자는 시글락이 “이 날까지 유대 왕들의 소유가 되었다.”(6절)고 전했다. ‘이 날까지’란 말은 신명기 역사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다.

 

설화자가 그토록 떠받드는 다윗이 아기스에게 굴욕적이었으니 그의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블레셋에 머무는 동안 다윗이 아기스의 봉신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아기스가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야 하는 처지였다. 아마르나 서판은 가나안 도시국가 왕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봉신이었다고 말한다. 다윗은 봉신 아래 봉신이었으니 얼마나 초라한 처지였겠나!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출셋길로 들어선 다윗이 어떻게 그들에게 가서 몸을 의탁했는가 하는 점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다윗이 아기스에게 왔을 때 신하들이 그를 가리켜 “저 나라의 왕”이라고 부르며 절대 받아줘선 안 된다고 강조한 데서도 드러난다(21:11). ‘왕’이란 말은 시대착오적지만 그래도 원수 나라 장군임은 분명하니 그들 주장에 일리가 없다고는 못한다. 아기스도 신하들 말을 듣고 다윗을 잡아뒀다가 그가 미친 척하는 바람에 깜빡 속아서 그를 내쫓지 않았는가 말이다. 과거에 이런 일도 있었는데 다윗은 왜 다시 아기스에게 갔으며 아기스는 이번엔 왜 그를 받아줬을까?

 

월터 브뤼그만은 “설화자 눈에 다윗은 모든 관습적인 기준을 뛰어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철천지원수와 동맹 맺을 용기를 가진 사람은 다윗뿐이었다. 그는 미래를 펼치는 데 있어서 적극적이고 관습적인 것을 뛰어넘는 방법 취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야훼가 자기편임을 알고 있었고 자신이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는데(W. Brueggemann, First and Second Samuel [Interpretation Series], 189) 나는 그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다. 다윗의 개인적인 신앙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지 않을까?

 

아기스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받아줬다. 그는 사울과 다윗 사이를 이어줬던 정치적이고 가족적인 끈이 끊어져서 이젠 원수 사이가 됐다고 여겼던 거다. 정치적으로 둘은 더 이상 한 편이 아니었고 미갈이 남의 아내가 됐으니 더 이상은 가족도 아니었다. 다윗은 떠돌이 무법자 ‘하비루’ 대장이었을 따름이다. 이런 다윗을 아기스는 ‘봉신’이나 ‘용병’으로 받아들인 거였다. 조공을 받는 봉신이 아니면 급료를 줘서 전쟁에서 써먹는 직업군인 말이다.

 

과거 다윗에게 블레셋은 죽이고 죽는 적이었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그 전쟁은 다윗의 전쟁이 아닌 사울의 전쟁이었다. 사울은 이스라엘 베냐민 지파 사람이고 다윗은 유다 사람이다. 흔히 이스라엘과 유다는 같은 조상에게서 비롯되어 혈연으로 맺어진 ‘동족’이요 ‘한 핏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구약성서의 역사성을 부정하지 않는 학자들 중에도 이스라엘이 혈연적으로 아브라함이라는 한 조상에게서 유래됐다고 생각하는 학자는 극히 드물다. 이스라엘에 연합군주국(united monarchy)이란 게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나는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 ‘연합’이 불과 두 세대 후에 붕괴된 것만 봐도 그게 별로 견고하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사울 시대에 유다는 이스라엘 영토 안에 포함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약한 유대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함으로써 깨져버렸다. 그래서 다윗은 아기스에게 몸을 의탁했고 아기스는 그를 받아줬던 거다. 아기스는 다윗이 사울을 배신했다고 본 모양이다. ‘배신자’ 다윗을 이용해서 사울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봤을 수도 있다. 그 기대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됨으로써 물거품이 됐지만 말이다.

 

다윗은 아기스에게서 시글락을 하사받아 거기서 16개월 동안 거주하면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다. 그 동안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들을 습격하곤 했단다. 그럴 때마다 다윗은 그곳 사람들을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다 죽였고 짐승들과 옷 같은 것들만 약탈해서 아기스에게 바쳤단다. 그에게는 유다 남쪽 지역의 지명을 대며 거기서 약탈했다고 대답했다는 거다. 설화자는 다윗이 사람을 살려두지 않은 이유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다윗이 남녀를 가리지 않고 죽이고 가드로 데려가지 않은 것은 그들이 다윗의 정체를 알아 다윗이 그런 일을 하였다고 폭로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의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언제나 이런 식으로 처신하였다. 아기스는 다윗의 말만 믿고서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서 그토록 미움 받을 짓을 하였으니 그가 영영 자기의 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7:10-12).

 

일종의 이중변명이다. 아기스에게는 자기 동족을 해침으로써 다윗이 동족의 적이 됐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기스는 다윗이 ‘영영’ 자기 종이 됐다고 여겼단다. 아무리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만 아기스가 다윗을 이렇게 몰랐을까? 또한 유다 사람들에게는 비록 자기가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곤 있지만 여전히 동족임을 보여줬다. 곧 아기스에게나 유다 사람들에게나 자기가 한편임를 주지시켰던 거다. 이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윗이 아기스 허락 하에 블레셋에 머물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유다와 이스라엘 입장에선 배신자도 이런 배신자가 없는데 설화자는 이걸 어떻게든 잘 포장해서 다윗을 우호적으로 묘사해야 했다. 그래서 동원한 논리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줄기차게 쫓아다녔기 때문에 다윗은 블레셋에게 갈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와 이스라엘에 피해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는 거다. 아무리 그렇다지만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들은 남김없이 몰살해도 되는 걸까? 다윗이 저지른 행위도 그렇거니와 설화자 역시 ‘그들’을 몰살한 걸 이처럼 ‘쿨하게’ 말해도 되나? 그들은 그렇게 의미 없이 죽어도 되는 존재였을까?

 

 

 

2.

 

사무엘상 28장은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가는 얘기로 시작된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같이 출정하자고 했다. 아뿔싸, 이걸 어쩌나! 그 동안은 이스라엘과의 싸움을 용케 피했지만 이번엔 피할 수 없게 됐다. 봉신 또는 용병 주제에 받드는 왕이 직접 명령하는데 무슨 수로 피한단 말인가. 다윗은 일단 그러겠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얘기를 그렇게 시작해놓고 사울이 엔돌의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얘기가 중간에 끼어들고(사무엘상 28:3-25)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얘기는 29장 1절에 이어진다. 전쟁 얘기를 하다가 무당 얘기를 중간에 끼워 넣은 셈이다.

 

사울이 나라 안에서 모든 무당과 박수를 쫓아낸 후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수넴에 진을 쳤고 이에 이스라엘도 길보아 산에 진을 쳤다고 했다. 블레셋이 두려운 사울은 야훼에게 할 바를 물었지만 야훼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를 통해서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여자 무당을 찾아갔던 거다. 신명기의 금령은 관두고라도 바로 앞에서 자기가 무당과 박수들을 쫓아냈는데도 말이다. 이 무당은 그 와중에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브뤼그만은 사울의 행위를 이 의사 저 의사 찾아가서 병을 고치려다 성과가 없어서 민간요법이나 불법시술이라도 해보려는 환자의 절박한 심정에 비유했다(W. Brueggemann, First and Second Samuel, 192).

 

사울도 체면이 안 섰던지 감쪽같이 변장하고 그녀를 찾아가서 망령 하나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무당은 누군지 모른 채로 사울의 명령을 언급하며 피하려 했지만 사울은 ‘야훼’ 이름을 들먹이며 벌 받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며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자 사무엘의 망령이 지하에서 올라오더란다. 그때서야 무당은 그가 누군지 알고 항의했지만 사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훼께서는 이미 당신에게서 떠나 당신의 원수가 되셨는데 나에게 더 묻는 이유가 무엇이오? 야훼께서는 나를 시켜 전하신 말씀 그대로 당신에게 하셔서 이미 이 나라의 왕위를 당신의 손에서 빼앗아 당신의 가까이에 있는 다윗에게 주셨소. 당신은 야훼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야훼의 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소. 그렇기 때문에 야훼께서 오늘 당신에게 이렇게 하셨소. 야훼께서는 이제 당신과 함께 이스라엘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실 터인데 당신은 내일 당신 자식들과 함께 내가 있는 이곳으로 오게 될 것이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 군대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실 것이오.”(16-19절).

 

사무엘의 말은 단호하고 최종적이고 절대적이다. 질문이나 항의를 허락하지 않을 만큼 단호하다. 이미 모든 게 결정됐다는 거다. 이를 돌이킬 방법은 없다. 사무엘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사무엘의 말에 새로운 점은 없지만 일곱 번이나 나오는 ‘야훼’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건 인상적이고 말에 무게감을 준다(W. Brueggemann, First and Second Samuel, 195).

 

사무엘의 말을 듣고 사울은 땅바닥에 벌렁 넘어졌다. 불행 중 다행으로 엘리 제사장처럼 죽진 않았지만 말이다. 무당이 보기에도 안 됐던지 음식을 준비하겠다고 하자 사울은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신하들이 하도 권하는 바람에 무당이 차린 음식을 먹고 밤에 거길 떠났다. 사울이 왕으로 누린 최후의 만찬이 무당이 준비한 것이었다니, 이를 후대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설화자는 무슨 생각으로 이 얘길 이토록 자세하게 전했을까?

 

이 얘기는 뭘 말하려는 걸까? 죽은 사무엘의 망령이 사울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나? 이런 짓을 한 사울은 왕 자격이 없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사울은 왜 이스라엘에서 무당과 박수를 내쫓았을까? 뒤늦게 ‘정통신앙’으로 복귀하려 했나? ‘정통신앙’으로 회귀했지만 야훼가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으니 그것도 허사였지만 말이다. 그가 벌어질 전투에서 죽을 운명임을 미리 보여주려 했던 걸까? 좌우간 사울은 이렇게 해서 최종적으로 야훼에게 버려졌다.

 

이스라엘 왕이 무당을 찾아가서 죽은 자의 혼령을 불러냈다는 얘기는 이후 세대 사람들도 당황하게 했을 거다. 그땐 혼령을 불러내는 일이 가능했었나? 고고학 덕분에 이스라엘에서 공식 종교와 민간 종교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음이 이젠 제법 널리 알려졌다. 예컨대 공식 종교에선 야훼에게 배우자가 있다는 생각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지만 민간종교에선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근래 고고학이 확인한 성과다. 이에 대해선 William G. Dever, Did God Have a Wife? Archaeology and Folk Religion in Ancient Israel [Grand Rapids: Eerdmans, 2005]를 참조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민간신앙에 초혼의식이 유행했는지 모르지만 공식적인 야훼종교(official YHWH religion)에서는 절대 용납될 수 없었다. 구약성서가 전하는 공식 종교가 이스라엘 종교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정말 무당이 죽은 자의 혼령을 불러낼 수 있는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걸 믿었는지 여부에 관심을 갖겠지만 이 얘기의 초점은 거기에 놓여있지 않다. 실로(Shiloh) 성소를 중심으로 한때 이스라엘 여러 지파를 이끌었던 전통적 야훼 신앙의 대표자인 사무엘의 입을 통해 사울이 최종적으로 야훼에게 버림받았고 다윗이 선택됐음이 선언하는 데 초점이 있다. 이를 위해서 공식 종교에선 금지됐던 초혼의식까지 동원됐다고 볼 수 있겠다. 설화자도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을지 모른다.

 

3.

 

사울과 사무엘의 혼령이 만난 얘기는 사무엘상 28장 마지막 절에서 끝나고 29장 1절은 28장 2절과 연결된다. <사무엘하>에 얘기가 진행되다가 엉뚱한 얘기가 중간에 끼어들어 잠시 중단되는 경우가 또 나오는데 다윗과 밧세바 사건이 그거다. 그 얘긴 나중에 다루겠다.

 

다윗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함께 출정하자는 아기스의 명령을 받고 그러마고 대답했다. 다윗으로선 큰 위기였지만 봉신 또는 용병 주제에 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블레셋은 군대를 아벡에 집결시켰고 이스라엘은 이스르엘 샘가에 집결해 있었다. 블레셋 군대는 규모가 대단했던 모양이다. 여러 명의 지도자들이 수백, 수천 명씩 거느리고 있었다니 말이다. 다윗은 후방에 있는 아기스와 함께 있었는데 블레셋 지휘관들이 그를 보고 항의했다.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여기에 와 있습니까?”라고 말이다(3절). 과거에 벌어졌던 일이 반복됐던 거다. 그땐 미친 척해서 위기를 벗어났지만 이번엔 그럴 수도 없었다.

 

다행히 아기스가 다윗을 변호했다. “귀관들도 알다시피 이 사람은 이스라엘 왕 사울의 종이었던 다윗이오. 그가 나와 함께 지낸 지가 이미 한두 해가 지났지만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하였소.”라고 말이다(3절). 아기스는 여기서 왕으로서의 명성을 건 거나 마찬가지다. 순진한 걸까 어리석은 걸까, 아니면 둘 다일까? 다윗이 ‘위장취업’ 한 거라면 그에게서 허물을 찾아내지 못했다는 말은 치명적인 실수다. 따라서 아무리 왕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했다. 지휘관들은 왕의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았다. 다윗이 싸움터에서 자기들을 배신하여 적으로 돌변하면 어떻게 하냐는 거다. 과거에 자기들 양피를 잘라 사울에게 바쳤듯이 이번엔 머리를 바칠지 누가 아냐는 얘기다. 그들은 아기스를 설득하려고 이스라엘 여인들이 부른 노래,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를 다시 인용하기까지 했다(5절). 이에 아기스도 지휘관들 말을 따라야 했다. 그는 다윗을 블레셋 땅으로 돌려보냈던 거다. 독자들은 아기스가 모르는 걸 알고 있다. 다윗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결국 블레셋 지휘관들이 옳았다.

 

이에 다윗이 보인 반응은 이상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하다. 그는 아기스에게 “내가 잘못한 일이 무엇입니까? 임금님을 섬기기 시작한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임금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종에게서 아무런 허물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왜 이 종이 이제 나의 상전이신 임금님의 원수들과 싸우러 나갈 수가 없습니까?”(8절)라고 항의했단다. 대단한 연기 아닌가! 연기상 감의 연기다. 아기스는 다윗의 반응에 만족해서 그를 시글락으로 돌려보냈다. 해가 뜨는 대로 떠나라고 했지만 다윗 일행은 아마 그 전에 떠났을 게다. 아기스가 맘을 바꾸면 큰일이니 말이다.

 

이젠 독자들도 이런 전개에 익숙할 때가 됐다. 안 그런가? 설화자는 다윗을 이스라엘의 적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쓴다. 곧 벌어질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투에서 사울과 요나단을 비롯한 그의 아들들은 장렬하게 전사하는데 만일 다윗이 그 전투에 이스라엘의 적으로 참전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설화자는 지휘관들의 입을 빌려 다윗을 전쟁터에서 끌어냈던 셈이다. 기발하지 않은가? 이게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벌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얘기의 전개가 상당히 작위적이란 생각이 들지 않나? 어떻게 사건이 이토록 다윗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 말이다. 야훼의 영이 그와 함께 했기에 가능했을까?

 

다윗 일행이 돌아와 보니 시글락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성읍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빠짐없이 붙잡아 갔다는 거다(사무엘상 30:1-3). 다윗 가족들까지 말이다. 다윗과 부하들은 목 놓아 울었는데 다 울고 나서 참사가 다윗 때문이라는 듯 군인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어 돌로 치려고 했단다(6절). 여기서 설화자는 “그러나 다윗은 자기가 믿는 하느님을 더욱 굳게 의지하였다.”라는 언급을 슬쩍 끼워 넣어(6절) 그의 믿음을 강조하는 걸 잊지 않는다. 다윗이 과거 언제 어떻게 하느님을 의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야훼는 다윗이 에봇을 통해 “제가 이 강도들을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네가 틀림없이 따라잡고 또 틀림없이 되찾을 것이니 추격하라!”고 긍정적인 답을 줬다(7-8절). 그는 여기서 절대부정사(infinitive absolute)를 사용함으로써 야훼가 확실히 보장했음을 강조한다. 다윗이 야훼에게 이런 식으로 질문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야훼가 즉각 단호하게 대답한 것도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다윗은 6백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아말렉 사람들을 추격했다. 중간에 낙오자들이 생겨서 2백 명을 브솔 시냇가에 머무르게 했다니 상당히 오랫동안 추격했음에 분명하다(9-10절). 도중에 한 이집트인을 만나서 아말렉 사람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서 가보니 그들은 신나게 잔치를 벌이고 있더라는 거다. 다윗 일행은 그들을 습격해서 낙타 타고 도망친 4백 명 젊은이를 제외하고(왜 죄다 4백 명일까?) 모두 몰살했단다. 잡혀있던 사람들과 약탈당했던 물건들을 되찾은 건 물론이다.

 

별 생각 없이 <사무엘서>를 읽어온 사람이면 그냥 지나치겠지만 신경 써서 읽었다면 ‘어? 이게 무슨 말이야…’ 할 내용이 여기 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설화자는 사울이 아말렉 사람들을 ‘모조리’ 몰살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사울이 아각을 산채로 잡아왔다고 사무엘에게 꾸중 듣지 않았나. 그렇다면 여기서 다윗에게 몰살당했다는 아말렉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 온 누구란 말인가? 앞에서 분명히 사울에게 몰살당했다고 했는데 말이다. 누군가 살아남아서 후손을 퍼뜨리기엔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하긴 성서에는 이보다 더 심각한 불일치가 많으니까 이 정도는 별 거 아닐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가 ‘뭐, 그런 거까지 따지냐? 그게 신앙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라며 핀잔을 주면 할 말 없지만 어쨌든 다윗 얘기에 다양한 자료가 섞여 있음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좌우간 아말렉 군인들이 시글락 주민들을 죽이지 않고 모두 사로잡아 간 것은 당시에는 드문 조치였다. 성은 불태웠는데 왜 사람은 안 죽였을까? 만일 그들이 주민들을 모두 죽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러지 않아 군인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 했다는데(6절) 주민들이 다 죽었다면 다윗은 살아남지 못했겠다. 그럼 아말렉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다윗을 살리려고 주민들을 산채로 끌고 갔나? 반면 다윗은 도망친 4백 명을 제외하고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보다 덜 인도적이어서 그랬을까? 설마…. 과거 사울은 아말렉 사람들에게 ‘헤렘의 법’을 정용하지 않았다고 꾸중 들었는데 다윗이 그걸 실행했다는 뜻일까? 낙타 타고 도망친 4백 명이 있었으니 그 말도 맞지 않는다. 브뤼그만은 다윗 일행이 오랫동안 약탈당하고 살육당한 ‘한’을 여기서 풀었다고 설명했는데(W. Brueggemann, First and Second Samuel, 203) 정말 그랬을까? 나는 브뤼그만의 설명에서 구약학자가 겪는 딜레마를 본다. 모든 걸 해석해야 하고,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억지로라도 그렇게 하려는 거 말이다. 나도 다윗이 과도한 보복을 행한 걸로 보인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4.

 

얘기가 여기서 끝날 법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다윗 일행은 시글락으로 돌아가는 길에 브솔 개울가에 남아있던 2백 명의 낙오자와 재회했다. 그들은 다윗 일행을 환영했지만 다윗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군인들 중에는 낙오자들을 버리고 가자고 주장한 자들이 있었다. 공짜로 전리품을 차지하는 꼴이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이에 다윗은 “동지들, 야훼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우리에게 쳐들어온 습격자들을 우리의 손에 넘겨주셨소. 야훼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렇게 처리해서는 안 되오. 또 동지들이 제안한 이 말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전쟁에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남아서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똑같아야 하오.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하오.”(23-24절)라는 말로 그들을 설득했단다. 그래서 이 방식이 “율례와 규례가 되어 그 때부터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고 했다(25절). ‘오늘날’은 이 얘기가 쓰인 때를 가리키니 신명기 역사가의 시대를 의미하겠다.

 

이 에피소드는 뭘 말하려는 걸까? 살아 있는 다윗이 곧 죽을(혹은 이미 죽은) 사울과 대조되고 있는 게 흥미롭다. 아말렉과 싸웠을 때 사울은 ‘헤렘의 법’을 어기고 아각을 사로잡아 왔고 짐승들도 가장 좋은 것들을 죽이지 않고 챙겨왔다. 사무엘이 이를 추궁하자 사울은 야훼에게 제물로 바치려고 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실제 그것들을 제물로 바쳤다는 얘기는 어디에도 없다. 반면 다윗은 아말렉 사람들에게 뺏은 짐승들을 병사들에게 나눠줬다. 전투에 불참했던 사람들에게까지 똑같이 나눠줬단다. 본문에는 제사 얘긴 일절 없다. 왜 다윗은 야훼에게 제물로 바치지 않았을까?

이 얘기는 다윗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전적으로 새로운 인물이란 점을 보여주고 있다. 사울은 ‘헤렘의 법’을 어겨서 죽었는데 다윗은 짐승들을 죽이지 않고 병사들에게 나눠주는 ‘실용주의’ 정책을 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지 않았고 야훼에게 꾸중을 듣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율례와 규례’가 되어 ‘오늘날까지’ 지켜지게 됐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헤렘이 법’이 더 이상 철칙이 아닌가?

 

다음으로 전리품을 전투에 참가한 자나 참가하지 않은 자나 똑같이 나눠준 데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다윗은 여기서 용병이나 이끄는 떠돌이 ‘하비루’ 두목이 아니라 ‘정치가’나 ‘전략가’ 또는 ‘왕’의 풍모를 지닌 인물임을 보여준다. 전통사회에서 전리품을 나눠주는 권한은 군사령관이 아니라 왕에게 있었다. 따라서 이 얘기는 왕이 되기 전에 이미 다윗은 전리품을 분배하는 왕의 역할을 했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왕이었던 거다.

 

둘째, 그는 모세 전통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브솔 시냇가에 남은 2백 명은 “브솔 시내를 건너가지 못할 만큼 지친 사람”들이었다(10절). 그들은 지쳐서 낙오했다. 관습에 따르면 이들에겐 전리품을 나눠주지 말아야 하지만 다윗은 일부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들에게도 전리품을 똑같이 나눠줬다. 그는 왜 이렇게 했을까? ‘휴머니스트’였기 때문에? 가끔이라도 그가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그렇게 보겠지만 그게 아니므로 그를 자비와 긍휼이 넘치는 휴머니스트로 보기는 어렵다. 다윗은 어디서 배워서 이렇게 행동했을까?

 

브뤼그만은 답을 모세의 출애굽과 광야 전승에서 찾는다(W. Brueggemann, First and Second Samuel, 204-5). 권력자가 부의 관리와 분배에 대한 전권을 소유하는 것이 전통적 방식이지만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전승은 다른 방식을 도입했다. 이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이다. 거기서는 모두 평등했다. 출애굽 공동체는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지파별로 공평하게 땅을 분배했다. 설화자는 다윗이 출애굽과 광야 전승을 작은 단위에서마나 실천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실제로 다윗이 이렇게 행동했든 아니든, 설화자가 그를 출애굽 및 광야 전승 실천자로 그리고 싶었든, 좌우간 다윗은 모세 전통을 실천한 자로 그려졌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격을 갖췄다는 얘기다.

 

새로운 일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저항을 뚫고 나갈 과감함과 자신에 대한 신뢰도 필요하다. 실수를 범할 수 있지만 그걸 두려워하면 안 된다. 다윗은 이런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기 과업을 성취하는 걸 야훼도 원한다는 믿음도 갖고 있었다. 다윗이 이런 자질들을 갖췄으므로 그가 취한 새로운 조치가 ‘오늘날까지’ 지속될 수 있었다. 야훼도 그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적어도 이스라엘은 그렇게 믿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좌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광야에서의 다윗 얘기는 여기까지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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