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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

나는 싫다!

by 한종호 2015. 9. 3.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21)

 

나는 싫다!

 

 

“시바에서 유향(乳香)과 원방(遠方)에서 향품(香品)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요 나는 그들의 번제(燔祭)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犧牲)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예레미야 6:20).

 

언젠가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본 짤막한 유머 한 토막이 있다.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재료가 무엇이겠는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대뜸 떠올랐던 것이 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뻔한 대답이라면 유머 코너에 올라오진 않았을 것이다. 역시 정답은 의외였다. 진짜 휘발유였다.

 

정답을 대하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가짜 휘발유를 만들 때 가장 많이 들어가는 재료가 진짜 휘발유라는 말은 생각해보면 지당하다. 돈 벌 욕심에 물을 가장 많이 넣으면 대번 들통이 나고 말 것이다. 차는 시동도 걸리지 않고 불은 금방 꺼지고 말 것이다. 가짜를 만들 때에도 가짜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진짜를 가장 많이 넣어야 한다는 말은 기가 막힌 역설로 다가왔다.

 

뜻밖의 이야기에 기분 좋게 웃으며 이야기가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해보니 마음에 닿는 것이 있었다. 역시 진짜와 가짜에 대한 생각이었다. 아무리 가짜라고 여기는 것들 속에도 실은 진짜가 더 많다. 내가 쉽게 무시하는 사람 안에도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진짜가 더 많을 것이다. 누군가를 함부로 부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나를 향해서는 의미가 달라진다. 내 안에 아무리 진짜가 많다 하여도 방심은 금물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가짜가 내 안에 들어있다면 나는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 나를 가짜로 만드는 것은 내가 무시하기 쉬운 적은 양의 가짜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속에는 유향과 향품, 번제와 희생제물 등의 단어가 나온다. 모두가 매우 훌륭한 믿음을 표현하는 말들이다.

 

유향은 시바라는 나라에서 왔다. 시바는 남서 아라비아에 있는 나라로서 향과 향료 무역의 중심지였다. 향품도 가까운 곳에서 구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인데 어찌 흔한 것을 드릴까, 먼 나라에서 들여온 것을 바쳤다. 그런 점에서 유향과 향품은 여간해선 구하기 힘든, 매우 귀한 예물이라 할 수 있겠다.

 

번제는 희생제물인 동물 전체를 제단 위에서 불태워 바치는 이른바 전번제(全燔祭)였고, 희생제는 선택된 부분만 제단에 바치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제사였다.

 

제물도 제사도 모두가 지극한 정성으로 드린다. 그만한 정성도 드물겠다 싶은데 뭔가 이상하다. 그 귀한 제물과 제사를 두고 하나님은 싫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역겹다고, 전혀 즐겁지 않다고,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니 말이다.

 

스바에서 들여오는 향과 먼 땅에서 가져오는 향료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너희가 바치는 온갖 번제물도 싫고 온갖 희생제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새번역>

 

세바에서 들여온 향가루, 먼 나라에서 들여온 향료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너희가 바치는 번제가 나는 싫다. 너희의 친교제도 역겹다. <공동번역 개정판>

 

스바에서 들여온 향료와 먼 지방에서 가져온 향초 줄기가 나에게 무슨 소용이냐? 너희 번제물이 마음에 들지 않고 너희 제사가 나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다. <성경>

 

너희가 스바에서 들여오는 향과 이국에서 가져오는 진귀한 향료 같은 것들을 내가 좋아할 것 같으냐? 너희가 바치는 번제물, 나는 전혀 즐겁지 않다. 너희가 행하는 종교 의식들,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메시지>

 

무엇 때문일까? 그토록 귀한 제물과 제사를 하나님은 왜 싫다고 하시는 것일까? 오늘 우리도 수많은 제물을 드린다. 주일헌금, 십일조, 감사헌금, 선교헌금, 장학헌금, 건축헌금, 심방헌금, 일천번제헌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또 얼마나 많은가? 주일낮예배, 주일오후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 심야기도회, 철야기도회, 수련회, 부흥회, 영성집회, 은사집회, 찬양집회, 열린예배…, 우리 생각에도 이만하면 부족할 것이 없다 싶을 만큼 다양한 헌금과 예배를 드린다. 그런데, 그런데도 왜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이 싫다고, 역겹다고 하시는 것일까?

 

예물과 예배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가리는 도구나 수단이 아니다. 죄와 허물을 덮거나 감추는 보자기도 아니고 포장지도 아니다. 더더군다나 하나님은 그런 꾸밈과 포장에 속아 넘어가는 분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큰 액수의 헌금이 큰 허물을 가린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큰 죄를 속죄하기 위해 기도원에서 보내는 날 수를 흥정하듯 계산을 할까?)

 

지금 백성들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을 가지 않고 있다. 아예 그리로는 가지 않겠다고 한다.(6:16) 파수꾼의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지만 듣지 않고 있다. 아예 듣지 않겠다고 한다.(6:17)

 

하나님의 말씀은 듣지 않고 지시하는 길은 걷지 않은 채 값비싼 예물을 가져오고 번지르르한 예배를 드리고 있으니 어찌 그것을 기쁘게 받으실 수가 있을까. 그 모든 것들이 역겨울 수밖에.

 

예배와 예물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바른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이 빠지면 아무리 귀한 예물을 드리고 아무리 많은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은 받지 않으신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지면, 그 부분을 가짜로 채우면 아무리 진짜가 많아도 우리의 믿음은 가짜가 되고 만다. 가짜 휘발유가 그런 것처럼!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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