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들에게 주는 편지(1)

 

유언(遺言)

 

 

 

나는 지난 6월 메르스에 감염되어 서울대병원 격리병동에서 1주일간 투병했다. 내게는 팔순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세 딸이 있다.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3학년이다. 아이들의 외할아버지는 앞서 메르스에 감염되어 국립중앙의료원에서 돌아가셨다. (주께서 그분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할아버지와 아빠의 감염으로 아이들은 40여 일간을 집에서 격리된 채 보냈다. 아이들은 한 집에서도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방에서 지내야 했다. 학교에 가는 것은 물론, 제 엄마조차 유리창 너머로 바라볼 뿐 가까이 다가 갈 수 없었다.

 

내가 한밤중에 구급차에 실려 격리 병동에 들어가야 했을 때, 어머니와 아내와 아이들은 마당에 나와 집을 떠나는 나를 전송했다. 나는 그 때 그들에게 거의 아무 말도 못했다. 어머니께 너무 걱정 마시라 했던가. 아내에게 굳건히 잘 있으라 했던가. 아이들에겐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 애들에게 입을 맞출 수도 품에 안을 수도 손을 잡아 볼 수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가장 가슴 아팠다. 아이들은 떠나는 나에게 용기를 낸 인사도 변변히 못했다.

 

격리병동에서 나는 내가 언제든 이렇게 죽을 수 있으리라는 현실에 직면했다. 실제로 죽음 비슷한 경험도 했다. 나에게 내가 죽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러나 남아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내가 죽은 다음에 누가 나의 아이들을 보살펴 줄까? 물론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어떡하든 그 애들이 계속해서 살아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 나만이 해 줄 수 있는 그것은 나 이외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살아서 이 병실을 나간다면 언젠가 나 없이 살아가야할 딸들을 위해 내가 부재할 때도 언제나 나의 음성이 되어줄 유언을 쓰기로 마음먹었었다.

 

퇴원한 후 다행히 몸도 회복되었고 할아버지의 뒤늦은 장례도 치렀다.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누가 알랴. 장인은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신 채 돌아가셨다. 그리고 나는 살아남았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함인가? 나는 이젠 미루지 않으려 한다. 언제까지 쓰게 될 진 모르겠다. 가급적 한권의 책이 될 때까지 쓰고 싶다. 그리하여 딸들에게 한 권의 유언을 물려주고 싶다. 돌아가시니 알겠다. 그분의 한마디 한마디는 곧 세상과 우리에게 남기는 유언이었음을. 그 마음으로 살고 그 마음으로 사랑하리라 

 

 

 

 

영적인(참된) 삶에 관하여

 

(, 혹은 영혼)이란 다른 게 아니라 본질을 말한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영혼 없는 사람이 없고 영의 작용에 의해 존재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이 영을 생명존재의 빛이라 한다. 어느 한 순간도 이 빛과 생명이 발현되지 않는 때는 없다. 그러나 그것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긴 어렵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사람의 인식작용, 곧 육체와 혼(정신)의 쉬지 않는 주인노릇(자기증식) 때문이다. 생각해 보아라. 육체로부터 생각이 순간순간 얼마나 속력이 빠르게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낳는지. 이것을 다 헤아려본다면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정신없는 생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본래 영혼의 생명이란 무색무취(無色無臭), 생명 그 자체이다. 그에겐 걸림도 없고 슬픔도 없고 고통이나 괴로움도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인간이 나고 자라나면서 인식의 작용이 무한대로 팽창하고 증식하여 자아(自我)’라는 거대한 망상이 생겨난다. (그것이 자랑이든 열등감이든 자기가 자기를 생각하는 관념은 망상(妄想)이다) 영혼의 생명과 상관없이 자기(自己)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곧 처음 영혼에 의거했던 생명이 망상에 의해 이제부터 자아에 의거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은 본래 무색무취하여 아무 것에도 구애를 받지 않지만, 인식을 이루는 자아는 자기가 경험하는 온갖 무늬와 얼룩과 맛과 호불호의 감정과 기억에 좌우된다. 따라서 영혼은 본래 고요한 것이지만 자아는 본래 자극이고 불안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일을 보지만 자아는 자기의 망상을 본다. 영혼은 본래 다 이룬 것이고 완성된 안식일이지만 자아는 끝없이 요구하며 쉬지 못하게 자기를 수탈한다. 누가 어려서부터 이점을 분명히 알게 해 주어 영에 기초한 삶과 자아에 기초한 삶의 차이를 분별하게 할까. 누가 최고의 지혜를 다해 자아의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고요하고 평안하고 자유로운 영혼과 관계를 맺도록 이끌어 줄 것인가.

 

어렵다. 똑똑한 사람이면 그 똑똑함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이면 그 어리석음 때문에,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면 바로 그 이도 저도 아닌 그 점 때문에, 그들은 이 주제의 중대한 논점을 헤아리지 못한다. 때로는 종교를 안다하고 종교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 더 헤아리지 못하고 타인들까지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하여 그러한 견해와 관점과 이해력이 곧 자기와 자기 주변의 삶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악이란 바로 그러한 무지(無知, 알지 못함)와 무명(無明, 빛 없음, 깨우치지 못함)이 만들어내는 자아의 망상과 그 망상에 따르는 온갖 불필요한 일들이다. 딸들아, 너희는 불필요한 일들에 일생을 매어 사는 사람의 불행에 관하여 반드시 알기를 바란다. 너희는 어려서부터 아빠의 말과 글을 대했고 설교를 들어왔으니 아빠의 이 말이 그다지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몇 마디 말로 다 설명해 주기 어렵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도 있고, 자라면서 사모하는 사람도 있고, 자라서 깨우치는 사람도 있고, 늙어서야 겨우 알게 되는 사람도 있다. 자아의 망상이 언제나 진리를 아는 것 보다 불필요한 욕망의 일들을 더욱 중대한 것이라 여기도록 만들고 거기에 열중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절로 아는 사람도 있고, 배워서 아는 사람도 있고, 온갖 고통을 다 겪어서 아는 사람도 있고, 끝끝내 모르는 사람도 있다. 자기 삶을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을 자기가 안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 삶의 방식을 고쳐 자기의 한계를 벗어나고 자기의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의 어려움을 이로써 이해할 수 있다.

 

행복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은 진리를 알고, 그것을 사랑하고, 그에 따르려는 착한 마음, 곧 거룩한 종교심(신심,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내 딸들아, 늘 아빠가 가르쳐준 이 거룩하고 차분한 마음을 잃지 말거라.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진리의 완전한 평화를 믿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사람을 평강에 평강으로 지켜 주신다.’ (이사야26:3). 진리에 의지하는 사람은 마음의 요동에 의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다. 마음을 항상 고요하고 침착한 상태로 유지하고 지킬 수 있다. 그런 사람을 하늘이 도우신다. 도우신다기보다 하늘의 뜻을 알아 거기에 따르는 것. 곧 하늘이 그 사람에게 생명과 인생을 주신 천명(天命)을 깨달은 사람, 하나님(하늘)과 교감을 지닌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하늘)의 자녀라 부르는 것이다.

 

본래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영혼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주어진 것이니 주신 분(주체와 의지)이 계신다. 인간이 인격을 가진 것은 그것을 주신 이가 인격이시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우주와 세계가 지성적으로 유지되는 것은 그것을 만드신 이가 지성적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비록 나중에 깨우쳤어도, 못 깨우쳤어도, 그에게 아직 없거나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항상 있는(계신) 것이며 그()에 입각하고 의지해 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거스를 뿐이다. 포기하지 않고 겸손하게 배우려고만 든다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만날 수 있다. 그분이 주시는 무한한 영혼의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곧 맑음 중의 맑음이고 밝음 중의 밝음이고 진솔 가운데 진솔이고 사랑 가운데 사랑이다. 근심 걱정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벗어남이다. 관계의 얽힘, 부질없는 근심과 걱정, 음모와 모략, 말과 말들의 이어짐, 의심과 협잡, 이런 것들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날 것이다. 이제부터 시비 논쟁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난 것이 너희의 인생의 내용을 만들어 갈 것이다.

 

모두가 벗어나지 못한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존재하는 그것이 신적(하늘이 주신) 사명이다. 사명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반드시 확실하게 얻은 자, 깨우친 자, 변화된 자, 변화되어가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얼마나 다른 인생이고 얼마나 다른 내용이고 얼마나 다른 목적과 지향인가. 우리는 그것을 구원천국이라 진리라 부른다. 같은 세상을 동일하게 살면서 그런 특권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구원을 받았고 천국을 소유했고 진리를 알았다. 또 그렇게 부름 받았다. 그러니 천국을 지향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곧 진리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고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말씀이 성경에 나오지 않는가.

 

그러므로 무서워해야한다. 우리 모두 이 세상에 한 영혼으로 태어났거늘 어찌 그것을 모르고 자아의 망상 가운데 서로 앙숙이 되어 시기경쟁하며 싸워야 하는가. 혹은 본래 진리를 알지 못하여 자기의 옳고 착한 뜻으로 행동한다하면서 항상 다시 악에 빠지고 마는가. 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고 세상과 세계를 못 쓰게 하려고 애를 쓰는가. 사람들은 이런 진실도 알지 못한 채 진리의 배움과 이끎을 무한정 뒤로만 미룬다. 각자 자기를 괴롭히는 허무한 욕망으로 인생을 보낸다. 그러나 너희는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아라. 오늘 배워야할 진리를 내일로 넘기면 그만큼 자아의 망상은 독초와 같이 자라날 것이다. 밭에 풀은 날마다 뽑아야 한다. 그래야 열매를 먹는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 식물을 먹으리라.’(창세기3:16) ‘일하기 싫은 자 먹지도 마라.’(데살로니가 후서3:6) 어찌 음식과 노동에 관한 말에 그칠 것이겠느냐. 부지런함이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만이 아니다. 깨우쳐야할 때 깨우치지 못하는 일이야말로 게으름 중의 게으름이고, 무서운 일중의 무서운 일이다. (2015715.)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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