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38)

 

타르튀프적 존재를 넘어

 

 

안녕하세요?

 

백로가 지나서인지 조석 기운이 제법 시원합니다. 이맘 때면 병처럼 가을 들녘에 나가 그 황홀한 노란 빛 속에 머물고 싶어집니다. 이상하지요? 바람에 조용히 흔들리는 벼포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으면 어떤 충만함이 느껴집니다. 종교체험과는 다른 묘한 느낌입니다. 바람과 햇빛과 달빛이 만들어낸 적요한 장관 앞에서 한껏 겸허해집니다.

 

어제는 초면이었지만 마치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비교적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인데, 처음부터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것은 너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언어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소 지친 듯 보이긴 했지만 말 속에 담겨 있는 진실과 열정 또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도종환은 <동안거>라는 시에서 “장군죽비로 얻어맞고 싶다/눈 하나 제대로 뜨지 못하고 어둡게 앉아 있는/내 영혼의 등짝이 갈라지도록”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가끔 진실한 이들의 말은 장군죽비가 되기도 합니다.

 

십년 이상을 이 땅에서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사셨더군요. 사실 ‘~을 위해’라는 단어의 사용이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하구요. 직업적 필요에 따라 수행하는 일을 ‘~을 위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그 행위가 자발적일 때에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누구를 위한다는 생각은 자칫하면 우리 마음에 그늘을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기대했던 반응을 얻지 못할 때 원망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을 위하여’라는 말 속에 담긴 실팍한 자의식이 느껴질 때면 불편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닦달하며 ‘다 너를 위해서야’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일면 진실이지만, 다른 일면 거짓이기도 합니다. 그 속에는 나를 위하는 숨은 욕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가 병자들을 고쳐줄 때,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을 때, 정상성의 울타리 밖으로 떠밀린 사람들을 위로할 때 그들을 위한다는 생각이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하셨겠지요. 당연히 대가를 바라거나 찬사를 바라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들을 추종자로 만들지 않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었던 것은 자아 강화의 욕망이 아예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언제부터인지 ‘~을 위하여’ 일한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허위의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 ‘이주 노동자를 위하여’ 사셨다고 말하는 것을 용서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딱히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등록이주노동자(불법체류자)들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서 그들과 동고동락했던 시간을 회상하실 때 선생님은 참 행복해보였습니다.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체불된 임금을 받아주기 위해 고용주들과 만나 싸우고, 몸이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데려가고, 해고되어 갈 곳이 없으면 그들의 안식처를 마련해주기 위해 애쓰고….

 

그러다가 훌쩍 이주노동자의 삶을 살아보아야겠다는 생각에 먼 타국으로 떠나셨다고 했지요.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여러 가지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저는 그것을 꼬치꼬치 묻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짐작하기로는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받았던 상처가 깊으셨던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낯설 수밖에 없던 타국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 참 어렵더라고 하셨지요. 고용 허가를 받지 못한 처지였기에 신분은 늘 불안정하고, 매년 비자를 갱신하는 것 또한 번거로운 일이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한국인 고용주들에게 받았던 상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2년 이상 한 직장에서 일한 후 고용주의 추천서가 있어야 안정적 신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악용하여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덜미를 꽉 죄는 이들이 많았다고 하셨지요. 마땅히 주어야 할 임금이나 수당을 주지 않았고, 그것을 요구하면 거칠게 위협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선생님은 좀 환멸을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그 고용주들이 대개 교인들이었고, 교회에서는 아주 신실한 신자 행세를 하더라면서 그들의 믿음이 왜 구체적 일상 속에서는 작동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하실 때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백과 삶의 불일치, 일상적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의 문제는 교회와 신자들이 심각하게 반성해보아야 할 과제입니다.

 

문제는 신앙생활이 존재의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방편적인 신앙에 머물 뿐, 그 믿음을 통해 새로운 삶으로 이행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예언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비록 비루할지언정 안락했던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존재의 광야로 들어가기를 꺼리지 않았습니다. 갈릴리의 어부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따르기 위해서는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떠날 엄두조차 내지 않습니다. 언제나 자기 동일성 속에 머물려 합니다. 그러면서 믿음을 통해 육신의 평안, 마음의 평안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자기 삶이나 존재에 대한 반성적 성찰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순례자라는 사실은 망각된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일상성 속에 뿌리 내리지 못한 신앙은 우리가 필요에 따라 걸쳤다 벗기도 하는 망토에 지나지 않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17세기의 프랑스 작가 몰리에르(1622-1673)의 희곡 <타르튀프>가 떠올랐습니다. 몰리에르는 그 작품에서 종교인의 위선을 신랄하게 폭로합니다. 타르튀프는 경건한 신앙인인 척하면서 실은 돈과 음식과 여자를 탐하는 사람입니다. 타르튀프는 몰리에르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입니다만 프랑스어에서 ‘타르튀프’는 ‘위선자’를 뜻하는 일반명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파리의 부유한 시민인 오르공의 식객이 되어 그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타르튀프가 타락한 인물임을 알아본 손위 처남 클레앙트가 오르공에게 그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자 오르공은 타르튀프를 변호합니다. 그는 정말 경건한 사람이라는 거지요. 그는 아무 것에도 애착하지 말라고 가르칠 뿐 아니라, 교회에서는 온화한 얼굴로 두 무릎을 꿇고 앉아 열렬하게 기도를 바치기도 하고, 신앙의 기쁨에 충만해서 한숨을 내쉬며 수시로 바닥에 입을 맞추어 신에 대한 경외감을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궁색한 것 같아 선물을 보내면 일부를 돌려보내고, 그걸 되돌려 받지 않으려고 다시 보내면 기어이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곤 한다는 것입니다. 이만 하면 정말 경건한 사람 같지요? 하지만 클레앙트는 오르공이 위선과 신앙, 가면과 얼굴, 유령과 사람, 가짜 돈과 진짜 돈을 구별할 줄 모른다면서 오르공을 책망합니다. 그는 억지 신앙을 처바른 사기꾼, 사람들의 눈길을 끌려는 신자들처럼 가증스러운 것이 없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자들은 이해타산을 밝히는 음험한 영혼으로 신앙을 장사와 상품으로 생각하고 거짓된 눈짓과 꾸민 믿음으로 신용과 위엄을 사려고 들지. 그런 자들은 남다른 열성을 보이며, 하늘의 길을 이용해 저네들 재산을 만들고 있다네. 그들은 열망하며 기도를 바치고, 매일같이 뭔가를 구하고, 속세의 집착을 버리라고 설교하며, 자신들의 악덕에다 열렬한 신앙을 꿰맞추지. 그자들은 성질이 급하고, 복수심이 강하며, 성실하지 못하고, 약삭빨라 남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라면 뻔뻔스럽게도 하늘을 위하는 양 내세워 저네들의 뻔뻔스런 원한을 감춘다구.”(J.B.P 몰리에르, 《타르튀프 · 서민귀족》, 극예술비교연구회 옮김, 동문선, 2000년 4월 10일, p.32)

 

예나 지금이나 위선적 신앙인의 양태는 비슷한 모양입니다. 클레앙트는 진정한 신자들은 자신들의 덕을 허풍스레 과장하지도 않고, 허영을 부리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인간적인 동시에 까탈스럽지도 않습니다. 남을 뜯어고치려 들지도 않고 잘난 체 떠들어대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삶으로 우리를 나무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 자체가 거울이 되어 우리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든다는 말일 겁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참 멀기만 합니다. 옛날에 권투 중계를 하던 이의 멘트가 떠오릅니다. 승부가 어느 한편으로 얼추 기울면 그는 황혼녘 서해바다를 닮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 길은 멀고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는 격이네요.” 꼭 이런 마음입니다. 지금을 기독교의 황혼이라 말하면 화낼 분들이 많겠지요? 하지만 지금 타르튀프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황혼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얼마 동안이나 더 나그네로 사실지 모르겠지만 부디 자중자애하며 진실한 길 꼿꼿하게 걸으시면 좋겠습니다. 어둡고 낙심되는 일들이 많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가끔은 먹장구름 너머에서 밝은 빛이 새어나오기도 하니 다행이지요. 언제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서로의 모습을 감사함으로 재확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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