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의 종횡서해

 

신앙생활이 성서의 ‘세속’과 만날 때

-《성서의 에로티시즘》의 저자 차정식 교수 인터뷰-

 

 

편집자 주/ 이 기사는 도서출판 <짓다>의 김성민 대표께서 SFC 편집장 시절 인터뷰하여 <뉴스앤조이>에 실은 내용입니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를 차정식 교수만큼 적절하게 풀어낼 사람은 드물다. 그의 문장들은 깊이 있는 신학적 해석에 텍스트를 바라보는 에로틱한 상상력이 함께 공명한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날카로운 분석은 혀를 차며 감탄할 정도고, 끊임없이 쏟아 내는 화려한 수사학은 짧은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이롭다. 냉랭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이렇게도 한 문장에 함께 들어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에로티시즘에 대한 선입견을 관능적 육체의 미학으로 바뀌어내는 일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이런 주제는 기독교 역사에서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지거나 오해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서 텍스트의 농밀한 언어를 다시 복원하고 그 원래 풍성한 분위기를 살려내려면 그만큼 그것을 다루는 언어 사용 또한 에로틱해야 할 것이다. 차정식 교수의 글은 이 어려운 과제를 거뜬히 수행하고 있다. <성서의 에로티시즘>이 출간되었을 때, 그다운 책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출간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인터뷰 일정을 잡았던 이유이다.

 

- 우리나라 신학자 중에 에로티시즘을 다룬 사람이 잘 없는 것 같은데, 교수님의 기억에 생각나는 책이 있나요.

 

확인을 안 해 봤는데 몇 년 전 성서공회 민영진 전 총무님이 월간 <기독교사상>에 ‘성서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적이 있어요. 그걸 꾸준히 읽었는데 주로 아가서의 에로틱한 시적인 표현들 중심으로 쓴 글이었어요. 그분이 구약성서 전문가니까 구약성서에 나타난 에로틱한 이미지 위주로 살핀 글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그 글은 인문학적 사상이나 이론과는 상관없이 구약성서 맥락에서 주제에 따라 풀어낸 글이었죠. 단행본으로 출판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해요, 저작의 동기라고나 할까요. 저작의 과정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저작 동기는 간단해요. 한종호 목사님(도서출판 꽃자리 대표)이 <기독교사상> 편집주간을 할 때 친분이 있었어요. 제가 필진도 추천하고 그 잡지에 연재도 몇 번 했어요. 편집주간을 그만두고 출판사를 차렸는데 작년 3월인가 4월에 전주로 저를 만나러 왔어요. 그때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로 책을 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제가 많이 아는 분야도 아니고 당시 여러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어서 많이 바빴기 때문에, 독서하고 공부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죠. 소극적으로 한번 시도해 보겠다고 해 놓고는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나름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하고, 출판사를 돕는다는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시작했다고나 할까요.

 

처음부터 꼼꼼하게 계획하고 목차를 하나하나 챙겨야 했는데 그렇게 쓰는 책도 있지만 어느 정도 즉흥적인 영감에 의해 직관적인 순발력에 기대어 쓰는 경우가 있어요. 이 책은 그런 방식으로 썼어요. 말하자면 목차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목차를 조정하고 상합하여 하나하나 쌓아 나가는 건축술적인 책 쓰기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꼭지를 선별하고 조율하고 조정하고 탈고 직전에 끼워 넣기도 하면서 썼어요. 직관적인 순발력과 순간적인 영감이 많이 작용했어요. 장인이 건축공학적인 방식으로 하나씩 쌓아 가듯이 글을 쓰다 보니 열다섯 꼭지를 쓰게 되었어요.

 

곤혹스러웠던 건 신약성서에 에로틱한 이미지나 에피소드가 별로 없다는 점이었어요. 알다시피 오히려 구약성서에 인간의 다양한 삶의 풍경들과 실존의 모습들이 많이 나오잖아요. 거기에 에로티시즘의 주제와 연관된 것이 많아요. 그래서 구약성서에 많이 할애를 했어요. 일반적으로 에로티시즘에 대한 선입견이 있어서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 같은, 인간의 신체 미학적인 주제를 다룬 인문학 서적과 이론서 등을 개인적으로 소화하고 그것을 나의 언어로 풀어 보려고 노력했어요. 인문학적 주제를 성서 텍스트와 만나게 하는 방식으로 나름의 담론을 엮어 내려고 했어요. 이런 과정에서 공부와 쓰기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졌어요. 독서하고 글 쓰고 다시 피드백하고 하는 매우 복잡한 작업을 했던 거죠.

 

 

 

 

- 집필 과정에서 감각적으로 상황적인 영감을 많이 중시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교수님의 집필의 특징인가요. 특별히 상상력이나 영감 그리고 주어진 특정한 상황에서 생기는 새로운 통찰력을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물론 상상력만으로 책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에요. 성서라는 텍스트가 주어진 상황에서는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인 분석과 나름의 심도 있는 해석 등 성서를 표피적인 텍스트가 아닌 심층적인 텍스트로 인정해야 해요. 그런데 성서의 전후좌우 모든 입체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있었을 것이라는 전제를 깔더라도, 그것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재구성해서 제출하는 작품은 해석의 결과라는 면에선 창의성이 있을지는 몰라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그런 작업도 '주석쟁이'의 빤한 공정 같아서 성서학자로서 주석을 중시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해요. 천편일률적이기 때문에 그래요. 주석이 텍스트의 의미를 산출해 내고 무엇인가 해석의 가능성들을 우려내는 데 있어선 고유한 영역이 있겠지만 반대로 그 한계도 있는 것이 사실이죠.

 

방법론을 굳이 말하자면 김학철 교수가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문신학’이에요. 성서를 연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해 온 내부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큰 틀 속에서 기존 방법론을 무시하진 않지만, 그걸 포괄하면서 넘어서는 인문학적인 감수성과 현대 사회라는 우리의 삶의 자리를 두루 아우르면서, 외부의 시선이나 낯선 외부자의 목소리를 끌어들여 빤한 반경을 넘어서 보자는 것이에요. 넓은 의미의 인문학적인 관점과 글쓰기에서 개입하는 인문학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감수성이 객관적인 공변성을 갖추기까지는 여러 검증이 필요하지만, 저는 여전히 모험적인 창조의 순간을 중시하는 편이죠. 그래서 저의 글쓰기 전략에서는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감수성을 개입시키는 형식이 많이 나타나요.

 

- 에로티시즘이라는 주제가 과제로 주어진 거지만, 교수님 개인적인 삶에서 내용을 촉발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감수성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성에 대한 개인적인 이해라든지, 에로티시즘 주제나 여성에 대한 이해 등에 대해 어느 정도 교감과 접속이 이루어져 이 책에서 우러나오고 있는지요.

 

에로티시즘 주제가 참신하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은 기독교 문화의 전통 그리고 신앙 전통이 영적인 것을 늘 강조한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어요. 영적인 것이 중요하고 저도 강조하기는 하지만 이런 배타적 강조들이 우리 일상생활의 감각적인 경험과는 많이 동떨어진 것 같아요. 신령한 걸 추구하는 기독교 전통의 감각 속에서는 반대로 육체적이고 신체적인 부분도 중요하거든요. 신체를 매개로 작동하는 욕망의 세계를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 과연 기독교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내는 것일까 하는 문제의식을 늘 갖고 있었어요.

 

우리 삶의 내용을 주도하고 우리의 정신적인 사유를 촉발하는 것이 우리의 신체 기관이나 뇌의 작용, 그리고 욕망의 발현 방식과 무관하지 않거든요. 하나님의 선한 창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타락한 실존이라는 죄의 문제를 비켜갈 순 없지만, 하나님이 지은 인간의 아름다움의 유산이 우리의 신체를 통해서도 발현되고, 신체를 매개로 한 감각적인 욕망들이 수렴되는 부분집합이라면, 감각적인 욕망을 외면하거나 매도하거나 정죄하고 억압하는 게 과연 선한 하나님의 창조의 뜻에 부합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어요. 신체와 욕망에 대해 부정적인 신앙교육을 하다보니까, 인간들에게 쓸데없는 금기와 죄의식을 심어왔지 않나 생각해요. 그것이 욕망을 억압하면서 악순환되는 정서적인 부작용들을 양산했다고 보는 거죠.

 

이런 욕망들이 눌려져 있다가 폭력적으로 나타나 우리 사회에 성과 관련한 온갖 범죄와 부정적인 현상들을 만들어 낸다 생각해요.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중요한 성령의 자유 부분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성령의 자유를 누려야 하는데 그저 표방되는 자유에 국한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몸으로 성령의 자유를 누리는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겠어요.

 

신적 창조의 아름다움을 배제한 신학의 구도는 기형적이에요. 인간의 신체적인 아름다움과 욕망, 그 심연을 발견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외면한 채 성서를 읽으면 그 메시지가 많이 반감된다는 겁니다. 저에게 이런 모든 문제가 에로티시즘이라는 꼭짓점으로 수렴이 되었던 거에요. 그리고 같은 학교에 재직하면서 오래전 함께 친분을 나눠 온 김영민 교수님과도 자주 대화하면서 사회에 범람하는 섹슈얼리티 코드와 성 담론에서 실천적 대안을 모색해야 할 출구가 무엇인지 토론한 적이 있는데, 그때 우리가 공감했던 게 바로 '일상적 에로티시즘'이었어요. 일상에서의 만남과 마주침, 서로 말을 섞고 눈을 마주치며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창의적 모험의 결핍, 그리고 이것을 존중하고 예찬하는 언어를 상실한 것이 우리의 성적인 욕구가 왜곡되어 폭력적으로 표출되는 배경이지 않느냐는 나름의 문제의식에 공감했던 것이지요.

 

- 성서 안에 있는 성 문제나 에로티시즘의 주제에 국한하셨다고 했는데, 성서에서 이러한 주제를 뽑아낼 때 특별한 선별 기준이 있었는지요.

 

주로 남녀가 나와야 하는데, 에로티즘 또는 에로티시즘 주제를 공부해 보니 섹슈얼리티 이슈보다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신체 감각적이거나 성욕을 매개로 해서 남녀가 교합하고 교접하는 차원의 관심사를 넘어서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이슈였다는 것이죠.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금기와 위반 같은 주제, 인간이 성을 매개로 생존을 도모하고자 하는 매춘의 문제, 룻의 경우 드러나는 구애와 연애의 문제, 에스더의 경우가 그렇듯 섹슈얼리티가 정치적으로 쟁점화되는 영역도 있었어요. 공부하면서 남녀가 부대끼면서 생기는 성과 연결된 부분을 탐색하다 보니 신약성서보다 구약성서에 더 많았어요. 구약성서가 인간의 복잡다단한 욕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까발리면서 과감하게 스토리텔링을 한 데 성경의 위대한 점이 있다고 봐요. 구약성서에 이런 게 누락돼 있다면 신약성서만으로 얼마나 빈약했을까 생각해요. 제가 신약성서 학자이면서도 구약성서의 위대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죠.

 

구약성서를 살피면서 몇몇 인물들을 발견했고, 인물과 관련한 사건을 발견하고, 또 이야기와 사건과 결부된 쟁점들, 그러니까 인문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이론을 조명해서 의미화할 수 있는 쟁점들을 발굴했어요. 또 현대문학에서 <은교>라는 소설이나 영화의 내용들을 이런 쪽과 연결할 수 있는 주제들이 있잖아요. 성서에 나오는 남녀의 만남 이야기를 위주로 엮긴 했지만, 이걸 뒷받침하는 정치 사회적인 콘텍스트나 인문학에서 제공하는 이론적인 통찰과 해석학적인 모델을 함께 접목시키려 노력했어요. 거기에 저의 실존이나 동시대적인 사람들이 까발리기 어려운 욕망의 저변, 그리고 감각의 문제나 감각적인 삶의 향유 문제를 함께 버무렸죠.

 

오늘날 사회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강 미인 이슈라든지,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강박시키는 왜곡된 아름다움의 실상에 대한 비판도 빠트리지 않았지요. 가령 여성의 경우 쭉쭉빵빵, 남자는 식스팩 등으로 성욕을 북돋우거나 성적 판타지를 부추기는 게 과연 욕망의 진정성에 순종하는 부분인지, 가짜 욕망의 거품에 휘말려 소모되는 부분인지, 문명 비판적인 관점도 개입시켰어요. 나중에는 더 추가해야 할 내용을 찾다가 성서에 나타나는 음녀와 성녀 등 여성의 성을 이원화해서 성적 판타지를 대리 충족하는 해석학적 틈새도 발견하게 되었죠.

 

- 이 책은 하나의 큰 주제를 감안하고 각 장의 내용을 엮었다고 할 수 있나요? 예를 들어 가부장적 여성성을 비판하는 정치적인 문제의식 같은 것이 모든 장에 있는지, 아니면 각 장은 하나의 창을 열듯이 각각 다양한 주제를 갖고 있나요.

 

굳이 말하자면, 한 꼭지마다 조명하는 주제의 특수성과 고유성, 다양성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맥이 있다면 그것은 에로티시즘을 창발적으로 재해석하고 재적용하면서 성경이라는 텍스트 속에 되먹인 것이죠. 텍스트를 해석하면서 의미를 좀 더 증폭하려는 해석학적인 작업을 시도했어요. 책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통일성이 있다면, 우리 시대에서 이런 감각적인 욕망의 자연스러운 향유를 방해하는 가부장체제의 권위주의적인 억압의 족쇄와 이것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를 혁파하고 해체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인간이 자연스럽게 자기의 욕망을 드러내고 조율하도록 돕고, 상충하는 경우 욕망이 탐욕으로 빠지지 않게 절제의 필요성도 진작시키려 했어요. 욕망을 감각적으로 누리면서 우리가 서로 긴장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담아낸 것이죠.

 

오늘날 이게 너무나 어려운 이유는 사회적으로 성추행과 성폭력이 만연하니, '아름답다'라는 말을 하기가 조심스러워져요. 너도 나도 섹슈얼리티와 관련하여 사회적으로 지독한 억압을 느끼는 것이죠. 사소한 실수를 해도 언어적인 성추행이나 성폭력으로 증폭되기 쉬운 게 우리 현실이니까요. 그렇지만 사회적인 금기에 눌려서 말 한마디, 시선 하나에도 정치적인 긴장이 흐르는 사회가 행복한 사회는 아니잖아요. 남남, 남녀 관계뿐 아니라 세대 간 장벽을 넘어 인간의 타락한 욕망을 순화해서 지금보다는 순전하고 천진하게 만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의 예비자로서 좀 진중한 연습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 이런 연습에 욕망을 조율하는 연습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제 신념이 이 책 전체에 바탕으로 깔려 있어요.

 

- 우리가 성이나 욕망의 문제 그리고 신체의 이슈에 대해 자유를 느끼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현대 한국 사회는 자유로운 언어나 시선이 오히려 폭력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요. 자유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폭력적이 되는 현실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이런 부분에서 성서학자로서 성서 텍스트가 에로티시즘이나 신체에 대해 인문학적 관점과는 다른 어떤 차별적인 독특성이나 통찰을 던져 줄까요.

 

저는 성서 역시 신구약을 막론하고 가부장적 시대의 제약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역사비평적 관점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나 성서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감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고 경외할 만한 측면이 분명히 있어요. 2500년도 더 된 구약성서 텍스트나 2000년 가까이 된 신약 텍스트 속에 인간의 복잡 미묘한 실존을 단순화하거나 굉장히 역동적인 욕망의 세계를 얼마든지 제거해 버리거나 아름답게 미화하고, 이상형만 뽑아서 모범 답안을 제시하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수많은 스토리텔링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역사가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함과 악함 등 모든 파노라마적인 현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거에요. 이야기나 시적인 표현 외에도 아가서와 같이 농밀한 언어 등으로 묘사하기도 하죠. 표현의 풍요함, 스토리텔링의 무제한성, 모든 인간의 금기에 터부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적나라한 인간 욕망의 끝자리를 보여 주고 있어요.

 

가령, 롯과 두 딸이 동굴에서 고립된 상황에서 성적인 교섭을 통해 자손을 보급하는 건 오늘날 관점에선 근친상간인데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잖아요. 유다와 다말의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성서 배후의 가부장적인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관을 넘어서는 성서의 창조적인 관점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이 있단 말이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날 우리가 다루는 에로티시즘의 이슈에서 성서를 해석학적인 거울로 삼아 여기에 투사해서 재해석하고 얻어 낼 수 있는 풍성한 영감이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오늘날 부대끼며 씨름하는 사회 정치적인 이슈, 신학적인 이슈, 신앙적인 이슈를 모두 포함해서 우리가 암시받고 영감의 출처로서 성경에서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풍요로운 세계가 있다고 봐요.

 

인문신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성서를 고전으로 대하고 해석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교조적인 틀 속에서 성경을 보는 그런 관점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굉장히 풍요롭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이걸 저는 '인문신학'이라고 말해요. 실제로 전혀 성서학자가 아닌 사람도 성서를 통해 참신한 접근을 하는 이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발터 벤야민, 알랭 바디우, 자끄 데리다, 조르조 아감벤, 슬라보예 지젝 등 좌파 철학자들이 성서를 가지고 인문학적인 전유의 작업을 통해 참신한 해석을 많이 했어요. 성서학적인 관점에서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저는 바깥의 목소리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해요. 신학이 인문학과 만나야 한다고 보는 것이죠. 우리의 신앙생활이 '세속'을 알아야 해요. 이것을 매개하고 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성서에 있다고 보는 것이고요.

 

- 이 책이 상대적으로 구약성서에서 나타난 에로티시즘 주제를 많이 다루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신약성서에서 인간성 내지 동물적 신체를 가진 인간 자체에 대한 묘사가 드물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자주 등장하는데 우리가 잘 못 보는 것인지, 신약성서 학자로서 견해를 말씀해 주세요.

 

신약성서에서 대표적으로 다룬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거예요. 여기서 제가 추출한 핵심 주제가 일종의 '향유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이야기에서도 에로틱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충분히 의미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이 구약성서는 온갖 천연 원료를 달여서 만든 한약과 같고 신약성서는 양약과 같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 비유가 상당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히브리적인 세계관과 헬레니즘적인 세계관의 차이가 이와 같지 않나 싶어요. 왜냐하면 신약성서가 희랍어로 기록되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하듯이, 헤브라이즘(유대교의 토라 신학적인 전통)과 헬레니즘 전통이 만나면서 소용돌이치는 국면이 1세기 팔레스타인과 지중해 연안의 디아스포라 세계의 문화적이고 사상적인 환경이라고 볼 수 있어요. 헬레니즘이 세계화된 사상으로서 그들의 일상생활과 문화와 사상,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어요. 헬레니즘 전통은 플라톤까지 올라가면 인간을 다양하게 창조한 신화 이야기 등 풍성하게 나오는 게 사실인데, 그때 헬레니즘은 오리지널한 플라톤 사상이 아니라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근거해 유대교와 기독교에 나름대로 영향을 주었어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플라톤주의 전통을 태반으로 깔고 있었던 신약성서의 세계에 이원론, 즉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 빛과 어둠의 이원론 등등의 이원론적인 사고가 나타나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이 선교하면서 교회를 개척했지만, 1세기 말까지 지속된 '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종말론적 분위기가 팽배했죠. 이 땅에서의 생존과 삶의 여정은 오로지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리는 내세 천당을 향해 떠나기 위해 대합실에 잠시 체류하는 삶의 기대치를 가지고 살았다고 볼 수 있어요.

 

이왕이면 상급을 많이 받기 위해서 이 땅에서 많은 덕행을 쌓아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중에 하나가 고린도전서 7장에 나오는 금욕주의 신앙이에요. 이것은 우리의 '프뉴마(영혼)'뿐만 아니라 우리의 '소마' 즉 육신까지도 흠 없이 보존해야 한다는 신앙이죠. 영혼과 육신이 욕망에 감염되는 죄악의 세상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 보존하여 순결하게 지키면 내세에 보상이 클 것이라는 금욕주의와 결부된 종말 신앙이 소개되고 있죠. 이러한 긴박한 종말론적 신앙 패턴 그리고 헬레니즘의 이원화된 세계관을 반영하는 내용들이 요한복음에도 나오고 신약성서 여기저기에 등장해요. 신약성서의 인간관에 히브리적인 통전적 전통이 일부 잔재로 박혀 있지만, 신약성서의 인간론적 용어로 사용된 사륵스(육체), 프뉴마(영혼), 프쉬케(목숨) 등 개념 분할 자체가 인간을 쪼개서 본 것이죠.

 

신플라톤주의에 기초한 인간론의 빈곤, 종말론적인 긴박한 생활 스타일과 핍박받는 상황에서, 생성기 기독교인의 삶의 자리는 금욕주의와 결부된 내세의 보상 신앙이라는 특수 여건 속에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의 일상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론적인 복락의 증거가 되고 우리의 신체적 감각을 누리는 향유의 삶 자체가 죄악시되거나 그것을 발견하고 체감할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게 아닌가 생각해요. 우리가 여전히 21세기에 살면서 1세기 감각과 세계관, 사유의 반경에 머물러 있으면 과연 정상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면, 우리가 신약성서의 기독교 신앙에 끼친 영향을 존중하면서도 그 한계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측면이 있어요.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수많은 원천들이 구약성서에 있는 거고요. 그런 차원에서 구약성서는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긴장과 교리적 명쾌함과는 또 다른 미학적인 효용성이 있다고 보는 거죠.

 

- 예수님과 마리아의 관계 문제를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만, 초기 기독교 문헌들 중에 에로티시즘에 기초하고 있는 문헌들이 존재하잖아요. ‘예수의 여자들’이라는 주제는 보수 신학의 입장에서는 금기시되는 영역인데 이 부분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아주 민감한 주제에요.(웃음) 일단 어떤 욕망의 존재로서 인간을 논할 때 예수님도 욕망의 존재로서 인간이었다면, 인간론의 기본을 밑바탕에 깔고서 예수님의 인간관계나 인간에 대한 그분의 감정적인 판단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영지주의 문헌을 보면 예수와 여자 제자들이 입맞춤을 한다든지 하는 이른바 ‘신혼방(bridal chamber) 모티프’에 기초해서 기록된 내용들이 나와요. 영지주의 문헌에서 이런 모티프를 신적인 존재와의 영적인 연합이란 관점에서 발전시킨 게 사실이에요. 칼 융이 자기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구축하기 위해 분석한 많은 영지주의 문헌들이 있고, 그런 문헌들에서 에로틱하고 섹슈얼한 이미지들이 많이 등장하는 게 사실이긴 해요.

 

하지만 이런 것들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많은 무리가 있어요. 영지주의 신학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생산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죠. 복음서에 나오는 향유를 깨뜨린 여인과의 관계는 네 개의 버전으로 나오는데, 역사 비평적, 전승사 비평적 관점에서 네 개가 어떻게 연관되는지 조명해 보았어요.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굴절되었는지 다루었죠. 제가 쓴 또 다른 책 《예수는 어떻게 죽었는가》에서 언급하고, 《묵시의 하늘과 지혜의 땅》이라는, 예수신학을 비평적 관점에서 다룬 또 다른 책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어요.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개인의 욕망의 번뇌와는 전혀 무관하게,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해 마땅히 기계적으로 ‘죽어 줘야’ 하는, 죽음의 수동적인 객체가 아니었단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자기 죽음의 현실 앞에서 실존적으로 직면한 인간의 고뇌와 슬픔과 두려움과 부대끼면서 씨름한 죽음의 능동적인 주체로서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 발에 부은 사건을 단순히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었다고 편리하게 해석하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부분이 많죠.

 

문화사적으로 연구를 해 보면 알 수 있어요(이 주제는 사실 저의 박사 학위 논문과도 관련이 있어요). 그리스 로마 시대 많은 영웅호걸들, 유대교 전통의 현자들, 랍비들, 동양의 도인이나 고승들이 죽기 전 남긴 많은 에피소드들을 예수님의 경우와 비교 분석해 봤어요.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죽음과 연관된 문학적 모티프는 사람은 자기의 욕망에 어느 정도 충족을 받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충족받지 못했다면 죽음 직전에라도 자기의 마지막을 호사스럽게 향유할 수 있는 자기에의 배려가 필요하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필요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죠.

 

고대 영웅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보면, 대개 죽기 전 목욕재계하고 거울 앞에서 자신의 일생을 성찰하거나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 식사를 나누거나 하거든요. 예수님의 경우도 복음서에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잖아요. 자기의 죽음을 내면화하고 의미화하는 과정, 인간적으로 고뇌하며 마무리하는 모습이 계속 나오는데 겟세마네에서의 모습과 그에 앞서 제자들과의 식사 장면, 향유 이야기 등이 전형적인 요소들이라 할 수 있어요. 식사도 일종의 향유 방식이지만, 예수님처럼 평생 가난한 자로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섬기면서 고생한 분이면서 또 한참 ‘총각’으로 살아오신 분을 한 여인이 사치스러운 기름을 몸에 붓고 닦아드리는 과정에 드러난 물심양면의 정성과 신체적인 접촉에는 분명 에로틱한 측면이 있는 거죠.

 

여성에게 가장 소중하면서도 아름다운 신체적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카락의 터치를 생각해 보세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 기호에 의하면 발은 남성의 성기를 나타내는데, 머리카락과 발이 만나고 그것이 입맞춤의 방식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매우 환상적인 상상을 증폭시키지요. 이런 에로틱한 이미지들이 결합하는데 예수님이 과연 그 순간에 영적인 황홀감에 빠졌을 뿐, 인간의 신체적 감각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기계와 같은 존재였을까…. 당연히 아니었겠죠. 평생 고생만 하고 산 사람에게 마지막을 잘 마무리하도록 하는, 불우한 육체를 죽음 직전에 달래며 호강시키는 방식의 일환으로 공동의 식사나 여인의 향유 공궤의 행동을 해석할 수 있어요. 마치 병원에서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게 의사들이 보고 싶은 데 여행도 다니고 먹고 싶은 음식 실컷 먹게 하라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 향유의 공궤는 감각적이고 신체적인 에로티시즘의 이미지가 총동원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화하는 동시에, 자신의 살아 있음을 실감하면서 제 생명의 고유한 가치를 누리는 하나의 방식이었어요. 제자들과의 마지막 식사도 마찬가지고요.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의 향유 공궤는 ‘거룩한 사치’나 ‘창조적 낭비’의 인문신학적 의미가 있다고 본 것이죠.

 

이런 사건이 진일보하면서 ‘마지막 식사(the last meal)’의 자리로 서사화되고 그것이 다시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의 형식으로 의미가 증폭되어, 나중에 ‘성만찬 예식(the Holy Sacrament)’의 제의적인 틀로 진화되지 않았을까 나름대로 해석하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버전에 따라서 막달라 마리아로, 베다니 마리아로 나타나긴 하지만)은 에로티시즘의 변용과 굴절을 드러내는 중요한 에피소드가 되죠. 마가복음의 가장 오래된 전승에 보면 복음이 전수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갸륵한 행실이 기념되리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향유 신학적인 전통의 계승에 대한 암시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면에서 예수 복음의 전승이 반쪽 전승으로 전락된 게 이 여인과의 중요한 에피소드를 과감하게 적극적으로 해석하지 못한 것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도 있어요. 예수님의 죽음을 마땅히 '죽어 줘야' 하는 대속론적 관점으로만 본 우리의 교리신학적 한계가 이런 반쪽 전승으로 귀착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요. 이제 신학도 많이 발전하고 당시와 역사적인 성찰의 거리가 이 정도로 있으면 부족한 반쪽을 보완할 수 있는 신학적 통찰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 한국 개신교 신학의 약점 중 하나가 ‘몸의 신학’에 대한 부족한 이해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런 신학적인 맥락에서 개신교가 '몸의 신학'에 대해 좀 더 풍성한 논의를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흔히 개신교에서도 교회의 지표 중 성찬과 세례를 넣고 있는데 이것은 몸, 즉 신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신학적 배경을 깔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국 개신교의 신학은 몸이나 몸과 관련된 여러 요소들에 대해 매우 소극적인 해석을 하잖아요. 말씀하신 향유 신학적 측면에서 볼 때 한국 개신교가 고민하고 발전시켜야 할 부분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제가 성만찬의 신학적 전통에 대해서 신학교에서 배운 건 교회의 신앙고백 문서를 담아 놓은 리마문서(또는 BEM문서)를 통해서에요. 창조신학적, 종말신학적, 선교신학적, 구원론적 관점에서 성만찬 교육을 받았어요. 성만찬 신학을 미국 신학교에서 매주 한 번씩 채플에서 제 몸으로 배웠어요. 성만찬이 끝나면 아침을 못 챙겨 먹는 학생들이 와서 남은 빵을 먹었지요. 창조적인 관점에서 성만찬은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을 의미하니까요. 물론 예수의 몸과 피라는 상징적인 장치가 있지만, 우리가 이걸 같이 나누고 누리는 데 의미가 있어요. 여기에 ‘예수님의 몸’이다, ‘예수님의 피다’는 말은 몸에서 피와 땀을 흘려 노동하고 번 돈으로 양식을 사서 함께 나누는 그런 삶을 긍정하는 거죠. 이런 일상생활의 경험을 거기에 농축시켜 보면 빵 한 덩어리와 포도주 한 잔의 상징 속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선물, 생태적인 공정, 우리의 노동, 또 그것이 예수의 몸과 피라는 면에서 우리의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신앙의 정체성까지 모두 담겨있다고 할 수 있죠. 여기에 종말이 오기 전 우리가 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전파하는 선교적 사명까지 매우 다양한 의미가 들어 있어요.

 

그중에 우리가 충분히 오리엔테이션이 안 되어 있는 부분이 신체의 미학적인 측면이라고 봐요. 빵에 담겨 있는 창조론적인 의미와 예수님의 몸과 피라고 했을 때의 신체 미학적이고 신앙 미학적 측면이 누락돼 있는 거죠. 성만찬 부분만 제대로 공부해도 우리의 몸에 대해 신학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고 봐요.

 

이와 별도로 몸의 신학이 개신교 신학의 결핍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몸을 다각적으로 이해하고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몸은 욕망의 존재잖아요. 우리가 욕망에 대해 너무 표피적이거나 나이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의 욕망에는 착하고 악한 욕망만 있는 게 아니에요. 신약성서에 욕망을 대표하는 용어가 ‘에피투미아(epithymia)’인데, 이것은 중립적인 의미의 욕망일 수도 있고, 선한 에너지로 발동하면 의욕이 되고, 내 욕심을 위해 부정적으로 발현되면 탐욕이 돼요. 탐욕과 욕망과 의욕의 삼각구도에서 서로의 차이는 굉장히 미세하고 개인의 스타일마다 편차가 심해요. 그래서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욕망이 더 많다는 걸 알아야 해요. 선하냐 악하냐, 아름다우냐 추하냐 하는 가치 판단을 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욕망의 영역이 엄청나게 넓고 깊어요. 그 욕망을 투시하면서 그것을 우리 삶의 콘텍스트에서 어떻게 배분하고 분할하고 절제하고 조율할 것인가가 중요해지죠. 이런 걸 '욕망의 경제' 또는 ‘욕망의 테크놀로지’라고 개념화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이 우리의 몸을 통해 구체적으로 경험되고 표현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성찰적인 자의식과 체계적인 공부가 너무 부족한 게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 몸과 욕망에 미지의 여백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특별히 욕망에 대해서 우리가 신앙의 이름으로 경직된 태도나 방관의 태도를 보이면서 극단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사안별로 몸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배분하고 균형을 잡아 가면서 그 가운데 '샬롬'을 이루는 게 몸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내용을 보다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요. 우리가 과연 몸으로 행복하게 숨 쉴 수 있는 상태인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몸에 대해 심도 있게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이 열리고 그런 몸이 되도록 훈련할 수 있는 거죠.

 

- 몸에 대하여 이해하고자 할 때 성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차지하는가요.

 

우리의 성기를 통해 성적인 충동이 발현되고 충족하고자 하는 욕망이 발동하는 2차 성장기 이후부터 청년 장년 노년까지 성적인 관심은 일관된다고 봐요. 식욕과 수면욕 등 그것 이외에 성욕과 같이 중요한 게 있을까요.

 

오늘날 모든 권력과 문화의 코드가 섹슈얼리티에 압도되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이것이 우리의 몸을 향유하고 우리의 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면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영역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식욕과 비교해 보면 식욕은 죽기 전까지 가는 것 같아요. 법정 스님도 죽기 전에 단호박죽과 생미역을 먹었고, 옥한흠 목사님도 죽기 전까지 식사에 신경을 썼다고 해요. 이에 비해 성욕은 죽기 직전까지 가는 것 같진 않아요. 40~50대 되면 청년기에 비해 직접적인 성욕이 감퇴되면서 신체적인 욕구는 줄지만 대신 판타지적인 측면은 더 강해지는 것 같아요. 요즘 장년들이나 노년들까지 인터넷으로 10대, 20대의 성을 사면서 원조 교제 등 민망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또 언론에 보도되면서 모방 욕망이 작용하여 성적인 판타지 속에서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데, 저는 이것이 에로티시즘의 퇴행 현상이라고 봐요.

 

신체적 기관이 약화되면 우리의 상상력이나 미학적인 감수성을 통해 에로틱한 에너지를 다른 방식으로, 형식을 바꾸어 표현하고 발현할 수 있는 여러 영역들이 있어요. 에로틱한 열정으로 시를 쓴다든지, 예술적인 작품에 열정을 쏟는다든지, 사물과 생명체를 대할 때 행간에서 놓친 순간적인 의미를 포착한다든지, 얼마든지 다른 방식들이 존재해요. 원조 성관계 같은 게 최선의 방식은 아니라는 것이죠.

 

- 성 문제가 우리의 육신과 관련해서 오히려 판타지가 될 정도로 우리의 삶에서 매우 강력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결국은 건강한 성에 대한 자유와 향유를 누리려면, 교수님의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 하는 창조적인 발견의 여유가 필요하잖아요. 무엇을 어떻게 예찬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고요. 이런 발견의 여유나 예찬의 언어가 어떻게 에로티시즘의 향유와 관계가 있나요.

 

우리 시대 압도적인 대세를 이루는 언어 타입이 있다면, 질투와 냉소의 언어가 합쳐진 것 같아요. 이것이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많이 흐리게 하고 어둡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봐요. 이걸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언어 코드가 발견과 예찬의 언어에요. 말을 바꾸는 작업이 중요해요. 언어를 바꾸는 것은 우리 삶의 자세와 시선과 관점을 바꾸는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 훈련이 언어의 갱신 훈련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투박하고 거칠고 뒤틀린 문체를 보면 그 이면에 도사린 그 마음의 풍경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불편하고 혐오감을 느낄 때가 있거든요.

 

언어 자체가 에로틱한 요소가 있는 것 같아요. 색기가 있는 문장이 있어요. 어떤 사람의 문장은 색을 쓰는 반면에, 어떤 사람의 문장은 밋밋하고 투박하고 고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언어와 에로티시즘 관계를 흥미롭게 조명한 사람이 롤랑 바르트에요. 그의 《텍스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보면 책을 읽는 경험이 어떤 에로틱한 감흥을 유발하는지, 인간이 텍스트 속의 문자와 언어, 그 행간의 틈새를 경험하는 세계가 얼마나 에로틱한 경험인지 잘 포착했어요. 우리의 신체 미학과 욕망 그리고 감각의 세계에서 에로티시즘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문화, 언어, 그 색깔과 리듬 속에 잠재된 에로틱한 가치를 일상 가운데 구현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어떤 사람과는 만나서 차 마시면서 대면하고 걸어가면서 어울리다 보면 생동하는 이야기의 욕망이 발동하거든요. 어떤 대상은 말을 섞고 대화할수록 깊어지고 심오해지는 경험이 있잖아요. 말에 끌려 매혹되고 더 주의 깊게 듣고 싶어지는 그런 말과 글이 있어요. 반면 어떤 사람은 말이나 글이나 교류할수록 버벅거리게 되고 대면하는 게 피곤하여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지는 만남이 있지 않나요?

사람을 어떤 이해관계, 특히 정치적 이해관계와 결부돼 만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을 갖고 있더라도 많은 피곤함과 식상함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미학적인 차원에서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즐길 수 있는 관계와 분위기, 그런 자리가 되면 서로 화학적 감흥이 발동하고 화제도 풍성하게 늘어나고 편해집니다. 우리가 본 영화나 읽은 책, 끌리는 그림이나 좋아하는 음악, 그리고 생활 세계의 아름다움과 생태적인 분위기, 만난 사람들 중 아름다운 사람의 기억과 이미지, 소통의 분위기 등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관계의 이면을 세밀하게 들추어 보면 은근히 에로틱한 측면이 있어요. 또 음식의 에로티시즘에 대해서도 말해볼 수 있겠죠.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이런 걸 나누면 인간관계 자체, 그 개별 존재와 관계의 미학 속에 얼마나 에로틱한 요소가 많은지 금방 느낌이 옵니다. 또 우리의 언어가 의미를 증폭시켜 주기도 하거든요. 술의 경우도 술을 못 마시지만 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술은 이와 같이 뜨거운 발화 작용을 통해 우리의 언어를 증폭시키지요. 반면 차(茶)는 술과 달리 쿨미디어에요. 적당히 달궜다가 서늘하게 대화를 이완시키는 매개가 되는 것인데, 이런 다채로운 일상적 미디어가 차려 주는 소박한 감각적 향유의 분위기 속에서 말을 섞는 것 자체가 에로틱한 행위라고 볼 수 있죠.

 

- 책을 읽으면서 교수님이 풍성한 언어를 사용하고, 성의 향유에 대한 이야기를 충분히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책 전체에 일관적으로 성의 해방적 측면을 강조한다고 봤어요. 이와 관련하여 언어화하기 힘든 조건과 지위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에로티시즘의 향유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요? 신체적 약자(장애인)들이나 성 노동자들 그리고 성 소수자들은 그들만의 언어 표현이 외부의 주류 담론에 의해 억눌려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그들의 몸의 에로티시즘은 표현되지 않고 가려지거나 음성화되는 경우가 많다고 봐요. 교회는 이들에 대한 언어가 사실상 매우 빈약하기도 하고요. 사회적 약자의 에로티시즘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에로티시즘의 본질이 금기를 위반하고 위반한 금기의 결과를 성찰하는 것이에요. 이런 면이 우리 삶 가운데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다이내믹한 세계로 증폭시킨다고 봐요. 에로티시즘의 견지에서 우리가 성 담론은 물론이고 그밖에 금기시해 온 다양한 주제를 깨 놓고 이야기하지 못할 게 없다고 보는 거죠. 인습적 관행과 주류 인식의 장벽을 넘어서긴 쉽지 않겠지만 방법론적인 테크닉의 계발이 필요할 거에요.

 

성 노동자, 흔히 말하는 매춘을 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해요. 얼마 전에 <신동아>라는 월간지에서 성 노동자의 생존 현실을 몸으로 체험하고 싶어서 스스로 성노동을 자청해서 경험한 것을 르포로 쓰고 인터뷰한 내용을 봤어요. 직업으로서의 성이라는 명분을 옹호하는 글이었어요. 말하자면 자신들도 엄연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법적인 족쇄를 채우지 말라는 주장이었지요. 자신들이 하는 일이 먹고살 유일한 밑천이라는 것이죠. 생업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라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식기관이나 성욕을 은총의 선물로 허락했을 때, 그것을 누리고 생명을 잉태하는 것 등 나름의 고유한 목적이 있다고 봐요. 성 노동자들이 제 자신이 주체적으로 향유해야 할 성욕의 기관을 동원하여 돈을 주고 손님을 받는 매춘 행위를 하면서 얼마나 행복감을 누릴지 사실 의문이 들어요. 아무리 떳떳하게 일한다고 하더라도 노동을 할 때 자아의 존중감이 낮을 것 같아요. 사회적으로 까발려서 인정받는 것도 구차한 면이 없지 않고, 그들의 현실을 공론화하더라도, 리버럴한 사람이 봐도 그러한 성적인 실천을 얼마나 존중해줄 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의문이 생기기도 해요. 물론 제가 성소수자가 아니고 성노동자 같은 사회적인 약자도 아닌, 나름대로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계급적이고 성적인 경험의 한계 내에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만. 그런 면에서 그분들의 직업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도 일리 있지만, 그것보다 더 나은 목표가 불가능할까요? 성노동자가 되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처음부터 그렇게 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면에서 성이 먹고사는 방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원초적인 뜻에 따라 누리고 즐기는 것, 사랑의 결실로 자녀를 생산하고 이런 쪽으로 욕망의 출구를 찾는 게 더 바람직한 대안이 아닐까 싶어요.

 

성소수자 문제는 할 말은 많아요. 미국에서 신대원 다닐 때 룸메이트가 게이였거든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이지만 성소수자가 하나님이 생명으로 내신 인간이라는 면에서 권리는 존중해 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당장 동성애자에서 이성애자로 변신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면, 동성애자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적 권리를 존중하는 게 마땅해요.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성소수자 측면에서 그들이 호소하는 입장을 배려하는 게 맞는다고 봐요.

 

다만 동성애가 마치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인 양 부추긴다든지, 심지어 찬미할 정도로 대단한 미학적인 가치를 갖는 영역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문이 있어요. 최근 미국장로교회에서 동성애자 목사 안수 문제로 동성애에 대한 논쟁이 다시 또 불거졌잖아요. 제 나름대로 읽어본 관련 문서에 의하면 동성애자가 되는 경우는 어떤 사회적 경험의 충격으로 말미암는 후천적인 사례도 있고, 태생적으로 예외적인 유전자의 조합에서 동성애적인 취향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극소수의 유형이긴 하지만요. 지금까지 유전자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병리학적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의 케이스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고 할 때 그것을 박멸해야 할 무슨 전염병처럼 여기면서 두려워하고(호모포비아) 격리해야 할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봐요. 예수님이라면 과연 그렇게 하실까요. 오히려 조건 없이 용납하고 불쌍하게 여기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옳고 그름은 그 다음에 따지지 않았을까요. 동성애에 대한 호모포비아적인 태도는 크리스천으로서 극복해야 할 심각한 소수자 인권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의 인권 보존과 증진 차원에서 우리가 중시해야 할 부분을 교회적인 차원에서도 신경 쓰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성애자들이 범하는 엄청난 성추행이나 성범죄에는 그렇게 관대하면서 성소수자들에 대해서는 심히 편협한 입장을 고수하며 정죄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올바른 태도인지 의심스럽다는 거지요. 또 다른 위장된 폭력이라고 봐요.

 

동성애의 에로티시즘과 미학은 추가로 연구하고 살펴야겠지만,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든 동성애를 아름답다고 수긍하거나 미학적으로 조명한 사례가 없어요. 비록 이 방면의 저술과 연구가 일부 있지만 오늘날의 관점을 역으로 투사하여 억지로 때려 맞춘 측면이 강하고, 성서를 통해 동성애의 에로티시즘을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봐요. 헬레니즘 계통의 다른 문헌 전통을 통해서는 충분히 가능하겠죠. 그리고 저 자신이 이성애자로서 동성애 미학을 다룬다는 것도 감각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오버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철저하게 이성애자로 살아가면서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에로티시즘의 미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데에는 감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이런 한계를 인정하는 것도 지적으로 정직하다고 봐요.

 

- 책이 출간되었는데,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인지, 어떻게 읽혔으면 좋겠고, 한국 기독교에 어떤 기여를 했으면 하는지 말씀해 주세요.

 

이 책이 크리스천들과 일반인들을 내면의 억압된 욕망과 그 심리적인 부담에서 자유롭게 해방시켜주는 데 일조했으면 좋겠어요. 좀 더 세부적으로는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서 아가페와 에로스를 대립적으로 상극적으로 이해를 하는데, 이게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사랑이 그렇게 간단하게 양분되지 않아요. 구약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보면, 인간의 탐욕적이고 정욕적인 사랑을 묘사하면서 '아가파오(agapaō)'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예들이 있거든요. 에로스라는 단어는 플라톤의 저작을 보면 이데아의 원형과 같은 매우 고상한 형이상학적 메타포지요. 분법적인 사고방식과 편협한 배타적 사고가 고착되어 하나님과 인간을 이해하는 데 구조적인 제약을 받고 있거든요. 이런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패턴을 깨는 데 이 책이 조금이라도 공헌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어떤 유형의 사랑이든 자유롭게 토론하고 대화할 수 있는 지적으로 정직한 환경과 개방된 분위기가 조성됐으면 좋겠고요.

 

우리의 정치, 사회, 종교 등 삶의 여러 분야에서 억압적인 금기가 고착되어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정서적으로 약동하는 우리의 생체 에너지가 에로틱한 기운과 결부되고 그것이 풍요롭게 충족되고 사안별로 조율되면서 행복한 개인들이 이 사회에, 우리 교회에 늘어나야 한다고 봐요. 그래야 권력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하는 신앙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해방된 정서를 양육해 나갈 수 있거든요. 자기의 욕망의 회로가 폐색된 채 시원하게 뚫리지 않으니 돈으로 장난치고, 권력으로 힘주어 큰소리치고 그러는 거예요. 교회의 권위주의도 욕망의 강박된 현실과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자세한 논리적인 규명이 필요하겠지만 교회 개혁이 안 되는 이유가 에로티시즘의 순환 회로가 막혀서 그래요.

 

어렸을 때부터 교육과 신앙 교육의 분위기가 바뀌어 우리 자신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인정하고 존중하는 분위기에서 자란다면, 그 가운데 소박한 자기 삶을 사는 '버릇'이 생기지 않겠어요? 일단 성인이 되면 생각이 고착되어 좀처럼 바뀌지가 않아요. 교회에서 60~70세가 넘어서 뭔가 휘두르고 싶어 하고, 큰 교회는 명예도 따라붙으니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 하는, 그런 구태의연한 짓을 안 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미학적인 여유를 발양하고 누리는 욕망의 조율, 삶의 향유 연습이 어렸을 때부터 필요한 거죠.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의미의 체질 훈련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게 바로 에로티시즘의 미학적 감수성에 기초하여 정서적 자기연단과 일상적 욕망을 조율하는 기술을 배우면서 삶의 자생적 동력으로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개혁도 넓은 의미에서 더 잘 될 거예요. 교회개혁도 심층적으로 인간론적 견지에서, 인간의 욕망론적 차원에서 보면 좋겠어요. 제도나 인습을 당장 바꿔도 사람 내면에 그 욕망의 코드가 변하지 않으면, 사회개혁, 정치개혁, 교회개혁도 늘 한계에 부대끼게 되어 있어요.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심층적으로 인간의 욕망의 밑자리를 성찰하는 분위기를 제공하는 데 일조한다면 바람직한 기여가 되겠죠.

 

중요한 한 가지 더, 유일한 실용적인 기대는 많이 사서 읽었으면 좋겠네요.(웃음) 밥 한 끼 먹는 마음으로 사서 우리 열악한 출판문화가 활성화되면 좋겠어요.

 

인터뷰는 전주에서 운치 있는 찻집에서 이루어졌다. 두 시간 가까이 쉼 없이 내뱉는 낱말들은 찻잔 속 녹차 향만큼이나 은은했다. 아니 차향보다 진했으리라. 미리 준비한 질문을 덮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내맡기길 잘했다 싶다. 공교롭게도 인터뷰가 있는 같은 날 오전, 나는 전주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문상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래서 내 머리엔 계속 ‘죽음’과 ‘에로스’가 함께 뒤섞여 있었다.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에로스.’ 집으로 돌아와 이 연관 주제를 잘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다시 찾아보았다. 밑줄이 그어져 있다. 역시 이 책은 에로티시즘을 ‘거룩한' 의례적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었다!

 

“알면서도 삼손이 그 치명적인 비밀을 들릴라에게 밝히고 만 것은 여인의 사랑이 덫이 되어 이내 닥칠 자신의 비극을 기꺼이 수락하고자 하는 장엄한 결단 아니었을까(103쪽).”

 

“이제 부드러운 여성의 살갗이 다가와 그의 지친 발을 애무한다. 섬세한 머리털의 간질이는 감촉도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온정어린 감각의 서비스다. 더구나 눈물까지, 입술까지 제공된 마당에 예수의 가난한 발은 이 세상에서 가장 풍요한 기관이 되는 환상적인 변화를 경험했을 법하다(264쪽).”

 

 

목  차

 

1. ‘한 몸’의 존재를 넘어 한 몸 ‘되기’

-아담과 하와에 대한 에로틱한 상상

 

2. 번식과 금기, 그 위반의 경계에서

-롯과 두 딸의 막다른 골목

 

3. 수줍은 매음과 변신의 에로티시즘

-유다와 다말의 곡진기정

 

4. 미인은 어떻게 건강할 수 있는가

-사사기의 여성전사들과 에로틱 메커니즘

 

5. 이국적인 것을 향한 동경으로서의 에로스

 

-삼손과 들릴라의 수수께끼 인연

 

6. 매력의 교육, 구애의 학습

-룻과 나오미의 연대, 보아스와 룻의 연민

 

7. 벌거벗은 육체와 시선의 에로티시즘

-다윗과 밧세바의 어긋난 시선

 

8. 침묵의 섬김과 신학적 존재론

-아비삭의 부재하는 현존

 

9. 발견과 예찬으로서의 사랑

-아가의 담대한 에로티시즘

 

10. 화대를 지불하는 창부의 틈새 진실

-에스겔의 굴절된 에로티시즘

 

11. 공동체의 전위로 나선 아름다운 몸

-에스더의 에로틱 정치 투쟁

 

12. 관능의 춤과 죽임의 에로틱

-살로메의 춤에 대한 상상

 

13. 향유(香油)와 향유(享有)의 에로티시즘

-예수와 한 여인의 신체적 교감

 

14. 음녀의 계보, 성녀의 족적

-에로틱 여성 이미지의 두 갈래 길

 

15. 처녀 남장과 단발, 또는 그리움의 승화

-바울과 테클라(저자 확인요망, 일반적으로 쓰이는 건 테클라지만...)의 인력과 척력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