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33)

 

‘염려’없는 노동

- 전집 4권 『성서 연구』 「기독신자의 처세 원리」 -

 

 

임금피크제를 놓고 노사정간 의견조율이 안된다고 한참 시끄러웠다. 극적 타결을 보았다하지만 내용을 들어보니 결국 앞으로 차차 의논하며 적합한 제도를 만들어가자는 데‘만’ 합의를 한 모양이다. 그럴 일이다. 서로 “네가 양보해라”라고 주장하는 협상테이블에서 무슨 실질적인 합의가 나오겠나. 직업안정성이 있는 정규직이 날로 줄어드는 이 마당에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정규직 ‘부모’ 세대에게 ‘자녀’ 세대인 청년들의 고용창출을 위해 봉급을 깎자는 정부와 기업의 감성팔이는 생계형 노동현장을 살아가는 일반 시민정서에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그만큼 ‘깎아서’ 청년들에게 ‘미래가 보장되는’ 어엿한 직장을 마련해준다면 모를까, 결국 더 싼 값에 유동적으로 대체가능한 임시계약직을 늘려놓고 ‘청년일자리창출’이라고 ‘아웅’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실은 그간의 진행방향을 볼 때 그 가능성은 ‘농후하다’).

 

더구나 함께 논의되는 ‘일반해고 규정’은 임의대로 마음껏 해고하는 수퍼갑질을 행사할 법적 권한을 기업 경영진들의 손에 쥐어주기 십상이다. 화가 난 서민들의 댓글은 한결같다. 우선 국회의원부터 임금피크제 하자, 일반해고규정은 공무원부터 적용하자는 주장부터, 일 안하고 월세로 펑펑 쓰고 사는 건물주들에게는 왜 고통분담을 요구하지 않느냐는 주장까지! 결국 성실한 노동으로 제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서민들과 노동형 중산층들의 분노가 고스란히 읽혔다.

 

 

 

 

노동이 더 이상 정당하고 합당한 대가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세상! 숨 쉴 시간조차 없이 달려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청년들은 이제 자조적으로 자신들의 처지를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로 서열화한다. 바야흐로 신(新)신분제의 도래다. 부모가 누구인지, 아니 할아버지가 어떤 경제적·정치적 ‘신분’인지가 나의 미래를 보장한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적으로 떳떳하게 ‘세월호의 진실을 규명하라’고 외치던 양심적 청년들에게는 구금과 수천 만 원의 벌금형이 행사되고, 분명히 ‘불법’인 상습마약복용은 힘 있는 기득권층의 자제라는 이유로 ‘집행유예’가 선포된다. 마치 오래전 봉건제 사회처럼 이제 ‘꿈과 희망’이라는 미래보장형의 단어들은 ‘잘난 부모’ 만나 금수저 입에 물고 태어난 아이들에게만 주어져있을 뿐이다.

 

이런 마당에, 성실히 살아보겠다고 200만원~300만원 남짓한 월급을 받으며 밤낮없이 뛰는 서민 가장들의 노동의 대가를 이리저리 융통하여 경기를 살려보겠다니... 그야말로 벽돌 밑장 빼서 위에 얹는 꼴이지 뭔가. 결국은 ‘기득권’을 놓지 않겠다는 말이다. 무노동, 혹은 과대평가된 노동의 금전적 대가에 대한 합리적 세금 부과가 먼저라는 것은 너무나 ‘합리적’인 생각인데, 하필 의사결정권자들이 대부분 ‘무노동과 과대평가된 노동임에도 천문학적 대가를 받는’ 경우에 해당하다보니 그쪽 영역은 건드릴 생각들을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농담이 나올까. 강남 몫 좋은 곳에 건물 몇 채 가지고 있는 집안 자손이면 그걸로 이번 생은 ‘할렐루야~’다.

 

이런 시절을 살아가면서, 성서적 가치를 이 땅에서 살아내고자 모인 공동체인 교회가 ‘대안’을 외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노동 없는 부, 아니 노동의 윤리성조차 묻지 않은 채 무조건 ‘헌금 많이 내는 교인이 경건한 교인’이라는 획일적인 메시지가 선포되는 교회 강단이 여전히 많다.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입히시거늘,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예수의 산상수훈은 이렇게 ‘교회헌금을 많이 하라’로 등치되며 애용되는 설교의 본문으로 등장한다. 부자들에게만 하는 소리가 아니다. 구조조정을 당하여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한 신자들에게조차 ‘걱정말라’고, ‘믿음의 분량으로 헌금을 하면 결국은 잘 살게 된다’고 설득하는 설교에는 여지없이 이 본문이 등장한다.

 

정말 그럴까? 새들도 먹이시고 백합화도 입히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신 예수의 설교(마태복음 6장, 누가복음 12장)는 있는 돈 탈탈 털어 교회에 헌금을 하면 앞으로 살아갈 염려는 붙들어놓아도 된다는 메시지인가? 이 본문에 대한 김교신의 묵상을 나누어 본다.

 

… 염려라는 원어 merimnao는 분파, 분배 등의 뜻으로부터(고린도 전서 1. 12-13 및 동 7. 34 참조) 염려, 초려 등의 뜻이 되었다. 땅과 하늘, 재물과 하나님 사이에 마음을 이분(二分)하는 일이 곧 가장 증오할 일이요, 헛된 일이기 때문이다. 제22절에 네 눈이 “성하면”이란 희랍어의 haplous 즉 ‘단일(單一)’이란 뜻이므로, 이 구는 ‘네 눈이 단일한 목적을 향하면 전신이 밝을 것이요’라고 번역할 수 있다. … 2개 이상의 목적을 관망하는 눈은 ‘흐린 눈’이요, 하나님이 꺼려하시는 것 중에 ‘두 마음’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음은 십계명의 제 1절을 보아도 잘 알 것이다. … 요컨대 믿으려거든 단일하게 믿으라. 마음이 이분(二分)하는 거기서부터 벌써 신앙이 아니요 헛된 일이요, 하나님 앞에 가증한 일이다.

 

사람이 어찌 먹고 사는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요즘같이 아사(장기적비고용상태) 아니면 과로사(1인3역이 요구받는 노동혹사상태)를 할 경쟁적 직업 환경에서 어찌 ‘염려’가 없을까? 김교신은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의 이 말씀이, 하늘만 쳐다보면 다 해결된다는 맹목적 신앙도, 있는 돈을 다 털어 교회에 헌금하면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하신다는 투자성 신앙도 아님을 분명히 한다. 성실한 노동은 게으르면 안 될 일이다. 다만 ‘두 가지 마음’을 품는 ‘염려’가 헛된 일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괘씸한 일이라는 거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그것에 궁극적 마음을 두고 신자의 마음을 양분하고 눈을 ‘흐리게’하지 말라는 권고이다. 결과에 대한 염려는 불신앙이라는 말이다. 의롭고 성실하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는 이 세상에서, ‘그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마음으로 성실히 제 일을 해낸 뒤라면,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다. 행여 ‘먹고 살지 못하게 될까봐’(소위 ‘잘릴까봐’) 일하면서 불의와 타협하고 억울한 사람들 짓밟지 말라는 말이다. 신자의 마음을 양분하여 더 많은 물질적 축복을 바라는데 비중을 두고 투자하듯 헌금하지 말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노동 없는 부가 양산되고 ‘금수저’라고 찬양받는 이 시절에 대한 신앙적 물음 없이 먹고 입고 마시는 일에 신자의 눈을 ‘흐리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사도바울도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하였다. …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것과 ‘근로 절검하라’는 교훈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요, 참으로 신종의 생활에 있어서 그날그날에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자는 받은바 천직에서 분골쇄신으로 자자근로하여 ‘아버지가 지금도 노작하시니 나도 노작하노라’(요한복음 5장 17절)는 그 아버지를 초사한 자녀의 생활이 자연히 있을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통장에 돈이 들어오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리고 하필 당신이 크리스천이라면 두려워해야 한다.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는데” “솔로몬의 지극한 영광”같은 삶이라고 여호와를 찬양할 일이 아니다. 목숨을 일각도 더할 수 없는, 하는 만큼 해 보았자 들의 꽃만큼도 아름답거나 영화롭지 못할 옷과 음식을 위한 ‘염려’(두 마음을 품음)는 하지 말라는 말씀이 이 본문의 핵심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노동은 ‘성스럽다.’ 성(聖)이 무엇인가?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거룩한 영역이다. 힘 있고 돈 있는 특정한 권력층이라 해도 인간이 마음대로 소유선포를 할 수 없는 거룩한 것이 ‘성’스러운 것이다. 성서는 그 처음부터 노동하시는 신(神)을 고백한 텍스트다. 이 성스러운 노동은 모든 인간이 누려할 권리이며 의무이다. 많은 이들에게 성실하게 노동할 기회를 박탈하는 자, 또한 일하지 않고 입고 먹고 마시려는 자, 심지어 그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다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는 두려움으로 마태복음 6장을 다시 읽어볼 일이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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