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톺아보기(23)


교회는 자동세탁기가 아니다



손석춘 선생님, 뵌 지 오래되었습니다. 경칩에서 춘분을 향해가는 이즈음 봄기운을 잘 타고 계신지요? 며칠 전 저는 겨우내 입었던 내복을 벗었는데, 그 때문인지 몸에 한기가 들어 잔뜩 옹송그린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부실하기 이를 데 없는 저의 몸이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도 매일 물이 오르고 있는 산수유나무와 개나리와 눈맞춤하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흘낏흘낏 창밖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잠포록한 날씨 탓인지 제가 늘 눈길을 주고 말을 건네는 삼각산이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높은 빌딩과 거대한 크레인만이 제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있음’과 ‘없음’의 경계가 무엇인가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요 며칠 만나는 사람마다 일본 동북부에서 일어난 지진과 해일에 대해 말했습니다. 누구라도 그 압도적인 재해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식탁머리에서 제 딸이 혼잣소리처럼 말하더군요. “이런 일을 겪고 보면 사람이 아득바득 용을 쓰며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아직 젊은 딸의 그런 처연한 깨달음에 살짝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공포’를 말하지만, 우리가 실은 흔들리는 터전 위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과욕의 부질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를 보면서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춘추천국시대의 현인 노자가 쓴 말로 하늘과 땅은 사사로운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재해 앞에 선 사람들은 이 말에서 자연의 맹목적 폭력을 보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이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복음 5:45b)고 말했습니다. 이런 판단은 잘났건 못났건 모두가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근본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어찌 하나님이 기독교인만의 하나님이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가 막한 그분의 자식인 걸요. 저는 이 말씀이야말로 종교적,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 라오서(老舍)의 소설 《루어투어 시앙쯔》를 읽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비가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이야기합니다.


“비가 개인 후에, 시인들은 연잎의 구슬과 쌍무지개를 읊조리지만; 가난뱅이들은 어른이 병이 나면 온 식구가 굶는다. 한 차례의 비는 기녀나 좀도둑을 몇명이나 더 보태주는지, 감옥에 들어가는 사람을 얼마나 내는지 모른다. 어른이 병들면, 아이들에게는 도둑질이나 몸을 파는 것이 굶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비는 부자에게도 가난뱅이에게도 내린다. 의로운 사람에게도, 의롭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린다. 그러나 실은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기 때문이다.”(라오서, 《루어투어 시앙쯔》, 1986, 통나무, 495쪽)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 내리는 비는 결코 공평하지 않다는 말은 정의의 문제에 민감했던 80년 대 중반의 제게 쇠북소리처럼 쟁쟁하게 울려왔습니다. 어쩌면 성경을 보는 새로운 관점 하나를 얻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야기가 곁길로 갔습니다만 저는 지진과 쓰나미가 일본의 동쪽 해안지대를 초토화시켰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드리기도 전에 먼저 떠오른 것이 있습니다. ‘큰 종을 자처하는 목사들의 망언이 터져나오는 것은 아닐까?’ 2004년에 쓰나미가 남아시아를 휩쓸었을 때, 2005년에 허리케인 카타리나가 미국의 뉴 올리온스를 덮쳤을 때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서울의 어느 유력한 교회 목사는 그 두 사건을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심판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저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고, 너무나 분노하여 그를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괴물로 변한 영혼이라고 질타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같은 해석이 나오는 것을 보고 저는 깊은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에게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인물로 여겨지는 한 원로목사는 이 사건을 보며 마음이 아프다고 말하면서도, 신앙적으로 보면 일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멀리 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지나치게 물질주의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내신 경고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의 말속에 담긴 무지와 정신적 오만함에 소스라쳐 놀랄 수밖에 없었고, 그릇된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도 절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 혹은 이웃에게 닥쳐온 불행에 대해 해석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해석이 가능할 때 사람은 그 문제를 처리하고 또 대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겁니다.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일을 겪을 때면 사람들은 해석을 위한 아르키메데스의 입각점으로 하나님을 동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세상의 모든 난제들을 푸는 열쇠어가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은 함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그 말의 내포와 외연은 늘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돌리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욥의 이야기를 꺼내곤 합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도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고통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길흉화복의 인과관계로는 풀리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허다합니다. 자신이 겪어야 했던 불행한 운명도 욥을 괴롭혔지만, 그의 고통을 가중시킨 것은 가까운 친구들의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변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욥을 몰아붙입니다. 욥이 겪는 고통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의 확신에는 인간적 연민이 끼어들 틈조차 없습니다. 그릇된 신학은 우정에 바탕을 둔 세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욥은 가장 가까웠던 이들도 낯선 사람이 되어 버린 현실을 견딜 수 없습니다.


“나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너희는 내 친구들이니, 나를 너무 구박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다오. 하나님이 손으로 나를 치셨는데, 어찌하여 너희마저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나를 핍박하느냐? 내 몸이 이 꼴인데도, 아직도 성에 차지 않느냐?”(욥기 19:20-22)


욥의 이 탄식이 제 귀에 절절하게 들려옵니다. 큰 불행을 겪을 때마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습적인 사고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는가?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엘리 비젤(Elie Wiesel)은 하나님이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간 첫날 밤 자신의 어머니와 누나의 몸이 소각되는 화장장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의 신과 나의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재로 만들어버린 그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는 희곡 <하나님에 대한 공판 The Trial of God>에서 놀랍고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찌의 수용소에 갇혀 있던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신을 재판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상상도 못할 고통 앞에서 신에 대한 기존의 논증들은 아무 설득력이 없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이 전능하다면 분명 쇼아(Shoah, ‘절멸’을 뜻하는 히브리어)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고, 만약 막을 수 없었다면 신은 무능하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막을 수 있었는데도 막지 않았다면 신은 괴물이었습니다. 치열한 논의 끝에 그들은 결국 신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경건한 이들에게는 충격이겠지만, 절망의 심연에 처한 이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놀란 것은 그 다음 대목입니다. 재판을 주재한 랍비는 판결을 내린 뒤 저녁 기도 시간이 되었음을 사람들에게 태연하게 알렸습니다. 신에 대한 생각은 변해도 가장 암울한 상황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몸부림을 그만 둘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여러 일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작음과 유한함이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불가해한 삶의 곤경에 직면한 이들에게서 터져 나오는 ‘왜’라는 질문은 사실은 신의 정의를 구하는 외침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것이 구조적 악에 속한 문제라고 한다면 사태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치열한 인식 투쟁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왜'라는 질문에는 대답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런 현실과 상황을 바꾸기는 어렵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이번 지진과 쓰나미에 대처하는 일본인들의 의연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며 저는 참 많이 놀랐습니다. 그 극도의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지키고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며 만일 우리에게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땠을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메이와쿠 카케루迷惑はかける’라는 말로 설명하더군요. 그들은 어릴 때부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 교육을 받는다고 하지요? 재해를 당한 일본인들이 크게 흐느끼거나 울부짖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은 '내가 그런 행동을 하면 나보다 더 큰 피해를 당한 이들에게 폐가 된다'는 극도의 배려 정신 때문이랍니다. 그런 배려심이 부럽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합니다. ‘남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국가주의와 결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우리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일본의 심장은 일본의 노래가 말하는 것처럼 벚꽃이 아니라면서 일본의 심장은 후지산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꺼질 줄 모르는 불, 절제된 방식으로 순결한 눈에 덮인 후지산 말입니다. 후지산이야말로 일본의 진짜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저의 의구심이 지나치게 과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혼돈 속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질서 의식이 경이로웠습니다. 배고픈 다른 이를 위해 음식을 양보하고, 생필품을 살 때도 뒤에 있는 이들을 의식해 적절하게 욕망을 통제하는 모습에서 저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수없이 듣고 또 말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기의 울타리 밖을 사유하지 못합니다. 이게 한국 기독교의 실상입니다. 남의 큰 불행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경고 운운하는 수준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저는 명시적으로 하나님을 고백하지 않으면서도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을 더 잘 이해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경을 통해 만난 하나님은 땅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사회 밑바닥에서 신음하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이 땅에 정의를 세워달라’는 기도로 들으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우리가 땅에서 들려오는 기도의 응답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일에 협력할 이들을 찾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출애굽기 3:10)당황한 모세는 자기는 그럴만한 그릇이 되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단 한마디 말씀으로 모세의 망설임을 가라앉힙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이고 또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력함을 느낄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이념, 인종, 피부색, 종교를 묻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구체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입니다.





손석춘 선생님,


굉장히 먼 우회로를 거쳐 마침내 선생님이 제게 던지신 질문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주의 기도에서 ‘죄의 용서’라고 번역된 단어가 사실은 ‘빚의 탕감’을 의미할 수 있다는 제 지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빚의 탕감’이 ‘죄의 용서’로 뒤바뀌게 된 소이연을 물으셨습니다. 정확하게 그 때를 지적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변형 혹은 왜곡의 과정이 왜 일어나는지는 짚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등장하는 ‘죄의 용서’를 토라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공동체와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그런 소명을 이루기 위해 주어진 구체적인 지침입니다.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지만 저는 율법의 핵심은 안식일, 안식년, 희년으로 이어지는 절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바트는 바빌로니아에서 정결례를 하는 날을 지칭하는 샤파투(sappattu 또는 sabattu)에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은 그 날을 ‘신의 심장이 쉬는 날’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신도 쉬어야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히브리어로 샤밧shavat도 ‘그가 쉬었다’는 뜻입니다. 거기서 나온 단어가 바로 샤바트인 것이지요. 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생각의 흔적이 보입니다.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라는 말끝에 성서 기자는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이는, 주가 엿새 동안 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이렛날에는 쉬면서 숨을 돌리셨기 때문이다.”(출애굽기 31:17b) 이 마지막 부분을 우리말은 밋밋하게 번역해 놓았지만 그 문자적인 뜻은 ‘그는 자기 영혼을 되찾았다’입니다. 하나님도 좀 쉬셔야 한다면 우리야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사실 안식일이 십계명 안에 들어간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세상에 ‘쉬라’는 것을 아주 엄중한 종교적 계명으로 삼은 종교가 성서종교 말고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쉼’이 그들에게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제국주의 치하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쓰라린 경험 때문일 겁니다. 제국의 질서 속에서 그들은 사람다운 삶을 영위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의 시간과 몸에 대한 통제권을 갖기 못한 것이 바로 노예살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자기들이 들어가 살게 될 새 땅에서는 몸과 시간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안식일 규정을 보면 이 마음이 더욱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엿새 동안 일을 하고, 이렛날에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의 소와 나귀도 쉴 수 있을 것이며, 너희 여종의 아들과 몸붙여 사는 나그네도 숨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출애굽기 23:12)


안식일 규정은 자유민들만이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가축이나 종살이 하는 사람까지도 하나님의 깊은 관심의 대상임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율법주의적으로 규정하면서 그 깊은 뜻을 잃어 그렇지 안식일 법은 인권법, 아니 생명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식년 규정은 안식일에 비해 훨씬 더 깊은 사회적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앞에서 라오서를 인용하며 말씀드린 바와 마찬가지로 공평함이 없는 세상에서 사회적 약자들의 생존권은 늘 위협받게 마련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빚을 얻고 이자조차 갚지 못해 결국 땅과 재산을 채권자에게 넘겨주고, 나중에는 종으로 전락하는 것이 가난한 이들의 운명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주기적으로 그런 세상 현실을 갱신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요즘 들어 이익 공유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 재벌가의 총수가 그런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더군요. 정말 뻔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누려야 할 공공재를 사유화하고 노동자들의 몫을 가로채 부를 얻은 사람의 말이었기에 더욱 화가 났습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에 대한 부정입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에 나오는 안식년 규정은 땅의 휴경을 강조합니다.





“여섯 해 동안은 밭에 씨를 뿌려서, 그 소출을 거두어들이고, 일곱째 해에는, 땅을 놀리고 묵혀서 거기서 자라는 것은 무엇이나 가난한 사람들이 먹게 하고, 그렇게 하고도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게 해야 한다.”(출애굽기 23:11, 레위기 25:7).


여기서도 하나님의 관심사는 ‘가난한 사람들’과 ‘들짐승’입니다.


하지만 신명기서에 나오는 안식년 법은 초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빚의 면제와 종의 해방입니다. 오늘의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도무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에 성경은 매우 급진적입니다. 먼저 빚의 면제 혹은 탕감에 대한 규정을 보겠습니다.


“매 칠 년 끝에 그 해의 끝에 빚을 면제하여 주어라. 면제 규례는 이러하다. 누구든지 이웃에게 돈을 꾸어 준 사람은 그 빚을 면제하여 주어라. 주께서 면제를 선포하였기 때문에 이웃이나 친족에게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된다.”(레위기 15:1-2)


빚을 면제해주는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하여 인색한 마음으로 친족을 냉대하거나 아무것도 꾸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안을 당한 이가 주께 호소하면 그것이 그에게 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빚을 갚지 못해 결국 종으로 팔려간 사람들도 일곱 해 째 되는 해에는 자유민으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유를 주어서 내보낼 때에는 빈 손으로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너희는 주 너희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대로, 너희의 양 떼와 타작마당에서 거둔 것과 포도주 틀에서 짜낸 것을 그에게 넉넉하게 주어서 내보내야 한다.”(신명기 15:14)


부자들로서는 참 받아들이기 싫은 요구였을 겁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한 것과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기에서 구속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여라.”(신명기 15:15a)


하나님의 말씀을 금과옥조로 여긴다고 말하는 이들조차 이런 급진적인 요구를 슬그머니 외면해버리고 맙니다. 대학문을 나서는 순간 빚쟁이가 되어버리는 젊은이들, 저임금에 시달리며 언제 쫓겨날지 몰라 늘 전전긍긍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을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오늘의 교회가 얼마나 성서 정신으로부터 멀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희년법은 안식년 법의 확장입니다. 안식년 법에 나오지 않는 한 가지는 빚에 몰려 채권자에게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땅을 원주인에게 주라는 명령입니다. 희년법이 이스라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실제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하지만 안식일, 안식년, 희년을 일이관지하는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의 회복입니다. 물론 그 정의는 사법적 정의라기보다는 분배적 정의겠지요.


저는 주님의 기도에 나오는 ‘죄의 용서’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도 아시겠지만 복음사가인 누가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 나사렛의 회당에 들어가서 이사야가 들려주는 주님의 은혜의 해, 곧 희년이 바로 오늘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누가복음 4:18-21). 예수님의 사회적 비전이 희년에 맞닿아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에서 '죄의 용서'라고 번역된 대목이 ‘빚의 탕감’을 가리키고 있음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이제 선생님의 두 번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빚의 탕감’을 ‘죄의 용서’로 바꾼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셨지요? 전문 신학자가 아닌 제게 이 질문은 사실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매우 버겁습니다. 성경의 전승사나 교회사의 중요한 순간들을 샅샅이 살필 능력이 제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빚’을 뜻하는 단어 속에 이미 ‘죄’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고, 복음서 안에서 이미 그러한 의미의 뒤섞임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빚’이 ‘잘못’이 되고, ‘잘못’이 다시 ‘죄’로 바꾸는 의미의 진화과정을 우리는 성경에서 이미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사에서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의가 거듭되면서 예수의 가르침이 정신화되고 추상화된 과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또 다시 우회로를 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난 번 편지에서 선생님은 언론의 현실이 우리의 인식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그리고 언론이 권력이 될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나는지, 언론의 타락이 어떻게 자본의 욕망과 유착되어 있는지를 매우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길을 읽으면서 ‘언론’의 자리에 ‘기독교’라는 말을 대입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쩜 그리도 똑같은지요? 종교적 담론이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전위될 때, 종교가 자본의 욕망과 유착될 때, 종교의 쇠락은 시작됩니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는 많은 이들에게 걸림돌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 예수는 낯설고도 위험한 가르침을 베푸는 걸림돌이었고, 그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들에게 걸림돌이었고, 승리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제자들의 걸림돌이 되었고, 죄인과 세리를 변호하심으로써 경건하다는 사람들과 민족주의자들의 걸림돌이 되셨고, 여인들과 스스럼없이 대화하셨기에 사회적 통념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의 걸림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지금 행세깨나 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걸림돌이 아닙니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를 죄짓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맷돌을 매달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나을 것이다”(누가복음 17:2) 하셨던 예수는 교회 안에서 더 이상 그렇게 격렬하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전하도록 택함받은 목사들입니다. 그리고 성공의 사다리에 오르는 것을 하늘이 내린 복으로 여기는 성도들도 그러한 입막음의 동조자들입니다.


어느 분이 교회를 가리켜 ‘죄 경영’(Sin management)을 하는 사업장으로 표현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너무 쉽게 용서를 선언하고, 삶의 변화 없이 너무나 가뿐하게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버리는 교인들의 모습이 도무지 마뜩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최승호 시인의 <때밀이수건>이라는 시를 떠올렸습니다.


살이 얼마나 질긴지

때밀이수건에 먼저 구멍이 났다.

무명(無明)은 또 얼마나 질긴지

돌비누 같은 경(經)으로 문질러도

무명에 거품 일지 않는다.

주일(主日)이면

꿍쳐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멋진 옷차림으로 간편한 세탁기 같은 교회에

속죄하러 몰려가는 양(羊)들.

세탁비를 받으라, 성직자여

때 밀어 달라고 밀려드는 게으른 양떼에게

말하라, 너희 때를 이젠 너희가 씻고

속옷도 좀 손수 빨아 입으라고.

제 몸 씻을 새 없는 성자(聖者)들이 불쌍하다.

그들의 때 묻은 성의(聖衣)는 누가 빠는지.


-<때밀이수건> 중에서


시인의 표현에 거침이 없습니다. 불경스럽게까지 들리는 시인의 언어를 타박하기보다는 그것을 거울로 삼아 스스로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는 데도 속죄를 선언하는 교회를 가리켜 시인은 ‘간편한 세탁기’같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별다른 가책조차 없이 꿍쳐둔 속옷 같은 죄들을 안고 교회를 찾아갑니다. ‘빚의 탕감’이 ‘죄의 용서’로 환치되는 순간부터 빚어진 참상입니다. 이런 환치의 역사는 교회가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기를 포기한 때부터 시작되어, 권력과 결탁하여 성장한 콘스탄틴 대제 이후 가속화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종교 권력자들은 기독교를 탈역사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기들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욕망에 기초한 문화적 흐름을 거스르지 않을 때 기독교의 생명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 절기로 사순절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마다 아주 가끔이나마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인간을 마술적으로 구원하기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교우들에게 예수도 우리처럼 평범한 행복을 원했던 분임을 잊지 말라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 그 말은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손석춘 선생님,


저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안쓰러운 생각에 가끔은 한눈도 팔며 살라고 말합니다. 너무 몰두하다가 소진되거나 거칠어질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외람되지만 선생님께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불의한 현실에 대해 분노도 해야 하고, 바로 잡기 위해 투쟁도 해야 하지만, 그래도 더러 한눈도 좀 팔아보십시오. 벗들을 만나 더러 허튼소리도 해보고, 숲의 고요함 속에 머물기도 하십시오. 봄이 되면 꽃은 피어나듯이, 세월이 제 아무리 수상해도 선생님의 가슴에도 싱그런 꽃 한 송이 소담하게 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평화를 빕니다.


편집자 주

이글은 김기석 목사, 손석춘 선생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중의 일부이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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