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으로 포장한 ‘종교 장사’

- 종교는 없고 ‘이름’만 있다 -



편집자 주/이 대담은 ‘스님 목사 신부의 대화 다섯 마당’이라는 부제가 붙은 《잡설》책에 실린 내용으로 ‘종교’를 테마로 다섯 분(김기석/청파교회 목사, 김민웅/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김인국/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대표, 도법/조계종 화쟁위원장, 오강남/종교학자)이 나눈 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신 없는 사회


오강남 미국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는 그가 스웨덴과 덴마크에 1년 간 거주하며 조사한 결과를 담은 책이에요. 그 나라들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닫힌 종교가 없어요. 결혼식이나 장례식만 해 주는 문화적인 종교만 있어요. 그런데 행복지수라든가 교육이라든가 범죄율이라든가 남녀평등이라든가 사회 복지 등 모든 면에서 종교가 있는 미국보다 월등해요. 스님 말씀은 어떤 종교가 없어야 된다는 것일까요. 우리를 옥죄고, 사회 통념에 복종케 만드는 식의 종교겠죠. 이런 종교는 없어져야 되고 없어질 것입니다.


김민웅 종교가 빨리 망하는 전략에 대해서 이야기해 봅시다.(웃음)


도법 ‘종교는 없고 이름만 있다’는 얘기를 가끔 하는데, 그렇습니다. 내가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첫째, 정직하지가 않아요. 아까 종교가 회사보다 못하다고 했는데 그래도 회사는 정직하게 돈 벌기 위해서 한다고 해요. 우리는 돈 벌기 위해서 교회나 절집을 운영한다고 말하지 않죠. 실제로 돈 벌기 위해서 하고 있는 거잖아요. 이게 어떻게 종교입니까? “나 돈 벌려고 교회해!” 이게 차라리 정직한 거죠. 우리는 온통 거룩한 것으로 포장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돈벌이 할 때가 많아요. 이렇게 맥락을 짚어보면, 이미 종교가 없다고 보죠. 이 얘기를 어떻게 공론화 시켜내고 현실화 할 것인가는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계속 볼 수 있는 것으로 얘기하자는 겁니다. 신비 얘기도, 영혼 얘기도, 기적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위대한 이야기나 거룩한 이야기도 볼 수 있는 것 가지고 설명해야 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야 구원이 가능합니다.


김민웅 앞에 김기석 목사님이 ‘밭의 한 귀퉁이를 남겨 놓아라’는 얘기가 바로 그거죠. 현실에서는 정치로, 교육으로, 사회로 표현되는 다양한 언어 세계가 있는데 이런 걸 다 잘라버리고 ‘이것만 종교야’라고 해버린 것도 큰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런 부분을 같이 복원을 해야겠죠.


김기석 고트홀트 레싱이 쓴 상당히 흥미로운 《현자 나탄》이라는 책이 있어요.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세계 3대 성서 종교라는 유대교, 이슬람, 기독교인이 모여서 얘기하는 내용이죠. 중간쯤에 반지 비유가 있어요. 그 반지를 소유하는 사람이 신과 인간에게 사랑을 받게 된다는 신통력이 있는 반지입니다. 아들 셋을 둔 아버지가 아들들이 다 귀해서 ‘너한테 반지를 줄 게’라고 약속합니다. 그런데 정작 떠날 때가 되니까 누구한테 줘야 될지를 몰라서 세공사한테 똑같이 만들라고 해서 나눠줍니다.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아들들이 재판관에게 갑니다. 재판관은 흥미롭게도 ‘아버지가 반지를 물려준 뜻은 형제들이 분명 관용하고 사랑하고 포용하라는 것일 텐데 너희들이 싸우고 있으니 그 반지는 모두 가짜’라고 말합니다. 재판장은 누가 진짜인지를 가리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겠다는 겁니다. 신과 인간에게 사랑 받는 그가 진짜라는 이야기입니다. 레싱이 이 얘기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어느 것이 참인지 가리려하지 말고 진짜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상황에서는 불교가 되었든 가톨릭이 되었든 또는 뭐가 되었든 어느 것이 참이냐를 말할 때 기독교인은 ‘예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검증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이건 검증의 문제가 아니라 확신의 문제라면서 대화하지 않죠. 이처럼 사는 모습을 보면 대다수 개신교인들은 전혀 예수와 관계없이 살고 있어요. 예수가 참이라는 사실은 삶을 통하지 않고는 드러낼 방법이 없어요.


김민웅 하나님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면 그럴 수 있다고 봐요.


오강남 실제적인 무신론이에요. 돈 벌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나 그런 게 없는 거죠.


김민웅 정직하지 않은 거예요. 스님 말씀대로.


도법 거룩함으로 일단 다 포장하고 있잖아요.


김기석 사람 심리란 처음에는 그런 것이 있는지 몰라도 스스로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확신을 갖습니다.


도법 자기 설득도 하고 자기 합리화도 하죠.





심각하게 병든 교회와 절, 성당


김인국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심층이든 표층이든, 해석의 투쟁이든 출가든, 모두 목사님과 스님과 신부님이 깨달은 결론을 말씀하셨다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에겐 어떻게, 라는 방법과 과정이 중요하거든요. 진리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를 두고 전통적인 방식은 수행이나 기도나 실천을 강조합니다. 표층 종교인들이 심층으로 가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민웅 제가 말문을 열죠. 개신교로만 한정시켜서 얘기한다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봐요. 현실에 끊임없이 노출시켜야 되는 거죠. 그래서 충격을 받고 “어떻게 할 거야?”라고 묻게 만들어야 해요. 이 질문 앞에서 텍스트와 만나게 해야 하겠죠. 지금은 현실과 텍스트를 딱 분리시켜 놓고 현실에 아프게 노출시키지 않은 채 텍스트하고만 만나게 합니다. 제가 <남영동1985>란 영화에 출연을 한 적이 있어요. 김근태 고문사건을 영화로 만든 거예요. 당시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갈라 쇼가 끝나고 나서 무대에 오른 정지영 감독에게 “이 이야기는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을 왜 봐야 하는지 설명해 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파하라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는 거예요. 이 영화 진짜 아파요. 영화가 끝나고 나서 김근태 전 의원의 부인 인재근 의원이 무대에 올라와서 펑펑 울었어요. 이제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고맙데요. 기술적으로 고문을 해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죠. 너무 역설 아닙니까. 이근안을 연기한 배우 이경영 씨는 계속 울먹울먹 하면서 서 있었어요. 너무 뜨겁게 현실과 영화가 겹친 거죠. 아파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겠어요. 종교인들이 아파해야 할 현실에 아파하지 않는 것 같아요. 자기의 아픈 것은 무지 생각하면서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힘든지를 잘 몰라요. 그래서 저는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리의 아픈 현실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여리고에서 강도 만난 사람 얼굴을 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지나갔어요. 사마리아 사람은 가까이 다가가서 얼굴을 보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아 그건 정치이고 경제야. 그것을 왜 교회까지 와서 들어야 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마땅히 해야죠. 흔히들 교인끼리 서로 돈 빌려주면 안 된다고 그래요. 교인들끼리 괜히 돈 빌려주었다가는 의가 상한다고 하는 거죠. 그럼 누구한테 빌려야 해요? 다 안 빌려주는데. 교인들이야말로 형제와 자매의 심정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교우들에게 돈을 빌려줘야 하거든요. 이렇게 틀을 바꿔야 해요. 아픈 현실에 노출시키고, 다음으로는 현실의 상식을 깨서 아픈 것을 끌어안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를 함께 고민해야 합니다. 위로 받고 싶은데 아픈 것을 보라니 딜레마죠. 그러나 그 작업을 포기하면 그 다음부터 가는 길은 뻔해요.


김기석 어떤 사람이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목사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는데 제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자기 성찰이 잘 되는 진지한 사람이죠. 제 입에서 나온 말은 “당연하지”였어요. 이 사람이 좀 놀라며 왜냐고 물어요. 그래서 “고난의 현장에 가 있지 않은데 어떻게 믿음이 자라겠어?”라고 했어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의 자리와 직면하지 않고는 믿음이 자랄 방법은 없어요.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에요. 마태복음에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오라’ 해놓고는 역설적으로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고 하거든요. 힘들어 죽겠는데 멍에를 메라는 거예요. 그게 풀려나는 방법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 역설을 받아들이지 못하죠. 내 믿음이 자랐다는 것은 아파하는 마음이 내 속에 생기고 커졌다는 의미에요. 하지만 이렇게 현실에 직면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김민웅 맹자의 인(仁)도 그런 것이죠. 전란이 계속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시체가 길에 버려진 채 벌레들이 들끓고 있는데 그것을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땀을 흘리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 그런 거 말이죠.


오강남 컴패션(compassion)이란 말이 같이 아파한다는 말이잖아요.


도법 우리는 절에 속하기도 하고 교회에 속하기도 하고 성당에 속하기도 한 종교인들이잖아요. 그럼 현재 종교인들이 가져야 할 가장 큰 아픔이 뭘까. 김근태의 고문 문제인가, 아니면 쌍용자동차의 노동자 자살의 문제인가. 물론 그것도 중요하겠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교회나 절이나 성당도 심각하게 병든 거잖아요. 여기에 대해 우리가 아파해야 하지 않나요. 아파하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거냐? 수술이 필요하면 수술하고, 치료가 치료해야 할 텐데, 누가 어떻게 수술하느냐는 겁니다. 내가 수술하려면 절을 떠나야 돼. 나는 이게 정직한 태도라고 봅니다. 김근태 씨의 아픔을 아파하는 것보다도 오늘날 종교인들은 심각하게 병든 자기 종교를 보며 아파해야 합니다.


김민웅 김근태 고문 사건을 다시 상기해보고, 쌍용자동차 등의 문제를 아파하면 종교도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그 아픔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타락하고 병든 거잖아요.


도법 문제는 고문이나 해고 노동자들의 자살을 아파하다가 병든 교회 문제로부터 피해갈 수가 있다는 거예요. 교회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서기 어려워지는 거죠. 너무 부담스럽기도 하고 골치가 아파서 저쪽으로 가게 되죠. 그러면서 이 부분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되죠.


김민웅 쌍용자동차나 고문 등의 현실을 아파하는 사람이 교회와 절과 성당에 있다고 한다면 이들은 끊임없이 병든 자기 종교에 대해 가시처럼 박혀서 “너 정말 이렇게 병들었는데 모르냐!”고 깨우는 역할을 하지 않을까요. 교회와 절이 병든 이유도 이런 아픔을 아파하지 않았고, 이런 현실에 직면하지 않고 외면하기 때문이니까요.


오강남 절은 사람들한테 많은 위로를 줘요. 자녀들 합격할 수 있도록 기도로 위로를 주는 거 아니에요? 그런 값싼 위로가 오늘날 필요 없진 않겠지만 그게 궁극적인 필요가 될까요?


도법 그건 위로가 아니라 기만이죠.


오강남 몇몇 스님들을 만났는데 그런 위로를 주는 종교는 앞으로 없어질 것이라고 하더군요. 합격시키려면 좋은 과외 선생을 찾지 무슨 절을 찾아가서 절을 하느냐는 겁니다. 물론 절에 가서 절하면 조금 효과는 있어요. 엄마가 옆방에서 신경질 부리지 않고 절에 갈 테니까.(일동 웃음) 아무튼 아프면 의사한테 가는 그런 식의 종교는 앞으로 없어질 것이란 얘기였어요. 월운 스님의 말씀이에요. 만났더니 옳은 말씀 다 하시더군요. 세상적인 천박한 위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종교로써의 불교는 곧 운명이 다 할 것이라는 거예요. 시골 할머니나 농부 할아버지한테 물어봐도 절에 가면 돈 생기는 거 안 믿는다는 거죠. 불교는 그래도 뭐라도 한 개 걸어주고 돈을 받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걸어주지도 않고 돈을 받아요.(일동웃음)


김기석 내적으로 강화되지 않으면 외부에서 오는 위로 가지고는 강해질 수 없어요. 군목으로 전방에서 근무를 했어요. GOP부대였는데, 북쪽에서 잘 보이게 한다고 언덕 위에 교회를 세웠어요. 문제는 물이 안 나와서 운전병들이 죽어나는 거예요. 밑에서부터 물지게를 지고 50m 언덕을 가파르게 올라가야 하는데 다 올라가면 물을 반쯤 흘리는 거죠. 한 번은 전방에 갔다 왔더니 우물을 파고 있어요. 아무리 봐도 물 나올 장소가 아니야. 그래서 헛수고하는 것이니 두고 보라고 했어요. 비가 오니까 물이 고여서 그 물로 며칠 청소를 하더라고요. 사나흘 지나니 물이 말랐죠. 그때 그랬어요. “속에서 솟아나오지 않으면 겉에서 흘러드는 물로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이 교회 와서 위로받기를 원하니까 교회들이 자꾸 부흥회하고 뭐도 하고 그래요. 이러다 보니까 성숙이 더 안 되죠. 이런 방식은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교회에서는 수험생들을 위한 기도회 같은 건 절대 안 해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내적으로 강화될 수 있을까요. 다른 거 없다고 봐요.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살아온 게 기막혀져요. 그런데 똑같은 현실을 봐도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나더군요. ‘나는 저렇게 구질구질 하지 않아서 참 감사하다’는 태도가 하나 있고, ‘내가 이렇게 뿐이 살지 못했구나’ 하면서 펑펑 우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서 현실에 직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어떻게 현장으로 이끌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김인국 사실 어느 누구에게나 표층에서 심층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그가 인간인 한 말입니다. 모든 종교는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놀랍고 신비로운 존재라고 가르칩니다. 신성이 되었든 불성이 되었든 그 씨앗만 잘 키우면 부처가 되고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고 봅니다. 이 점을 알게 해주고, 깨닫게 해주고, 그 싹을 틔우도록 해 주는 게 종교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신성(성령), 혹은 불성을 현실을 정의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일과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매우 이기적인 자기만족에 그치고 말지요. 예전에 성령 기도모임에 가서 용산 남일당 철거민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4대강 그리고 해군기지가 들어서는 제주 강정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더니 기도회 참석자들의 호응이 대단해요. 그걸 보고 시민운동과 결합되는 성령운동이라면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야 종교는 건강해진다고 봅니다.


김민웅 대단하네요! 교회서 그렇게 이야기하면 은혜 없다고 할 텐데.


김인국 강의가 끝나니까 사람들 여럿이 찾아왔어요. 한 분은 자기는 공무원인데 간접적이긴 하지만 4대강을 파괴하는 일에 가담했다며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이런 즉각적인 반응만 보더라도 사람들은 타인을 아프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괴롭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고 있어요. 표층종교가 자기가 차지하는 이기적인 즐거움을 강조한다면 심층종교는 남에게 주는 기쁨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표층에서 심층으로 나아가는 일을 가로막고 있어요.


김민웅 아, 불온한 세력들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김인국 저는 개인적으로는 정의구현사제단 총무(현재는 대표)를 하기 때문에 요만큼이라도 시민다운 얘기를 할 여지가 좀 있어요. 가톨릭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지 않습니까? 사회 정의를 위한 헌신을 문헌적으로 요구를 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삼성 때 나섰다고 불이익을 당하고, 광우병 쇠고기 수입 기도회를 한다고 제제가 날라 와요. 사제들과 교우들이 하는 운동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 못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을 당하죠. 그런 교회를 보면서 개인적 좌절의 고백과 미래에 대한 암울한 전망들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표층에서 심층으로 들어가는 작업은 별로 복잡한 것이 아니에요.


오강남 지도자들은 3단계에서 사람들을 머물게 합니다. 그때가 제일 컨트롤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2단계는 문자적인 단계이고, 3단계는 종교가 주는 하나의 신앙체계로 묶어 두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자면 산타가 아이들에게 “너 선물 받기 싫어?”하는 단계죠. 지도자들이 깨어 있어서 자기들부터 4단계, 5단계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안 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못 가게 합니다.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형국입니다.


한국 불교, ‘깨달음 병’이 문제


도법 오 교수님께서 ‘이제 문제는 깨달음이다’란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이 의미 있고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한국 불교는 깨달음 때문에 문제예요. 성철 스님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한국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출가수행을 왜 합니까. 깨닫기 위해서죠. 깨닫기 위해서 선방에 들어앉아서 현장 사람들의 표정에 곁눈질하지 않고, 현장 사람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로지 깨달음만을 찾아서 심산유곡에 들어가 일생 동안 가부좌 틀고 앉아 있는 거예요. 현재 선방에서 전문 수행자라는 분들이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를 합치면 3000명 가까이 될 거예요. 그분들이 아무 것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깨달음만을 찾습니다. 저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한국 불교는 깨달음병 때문에 문제’라고 말을 합니다.


김민웅 교회는 기도병이 문제고.


도법 되든 안 되든 깨달음을 찾고,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 산 속에 들어가 가부좌 틀고 앉아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속이 건강하잖아요. 본인들 스스로도 대단한 위세를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도 그런 스님을 인정합니다. 한국 불교는 깨달음에 희망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권력을 탐하지 않거든요. 많은 주지와 포교사들이 수행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죄의식 내지 열등의식을 갖고 있죠. 주지하라고 하면 “아 내가 중이 되어서 이거 하면 안 되는데. 가서 참선해야 되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현장에 열심히 참여하다가도 “중이 되었으면 깨달아야 하는데, 깨달으려면 산 속에서 가부좌 틀고 참선해야 되는데”하는 거예요. 결국 한국 불교 구성원들, 특히 좀 더 수준 높은 불교를 해보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은 다 이 깨달음병에 걸려 있어요. 내가 가장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분이 봉암사 수좌 스님이에요. 나이가 75세이신데 50년 넘게 일관되게 참선만 하셨어요. 그런데 아직 깨달음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서울 가서 얘기 한번 하시라”고 해도 안 와요. 자기는 아직 해제(解制)가 안 되었기 때문에 나올 수 없다는 겁니다. 대단히 정직한 거죠.


오강남 깨달음에 대한 집착인 거죠.


도법 봉암사가 조계종단 제1의 선원인데 거기 조실(祖室)은 최고 지도자거든요. 조실을 모셔야 되는데 지금 제가 종정 스님에게 “봉암사 조실 합시다” 그러면 버선발로 뛰어나올 겁니다. 그런데 수좌 스님은 조실하시라고 하니까 안 해요! 왜냐? 조실이라는 자리는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 맡아야 될 자리라 절대 조실할 수 없다’고 버티는 거죠. 그렇지만 봉암사에 와서 살면서 어떤 역할이든 해야 한다고 하니까 조실 자리가 아닌 다른 직함을 갖고 와 계세요. 조금만 깊게 들여다보면 조계종단은 깨달음병 때문에 문제죠.


김민웅 그 얘기는 현실과 긴장을 가지고 대치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죠. 끌어안을 것은 끌어안고 칠 것은 쳐야 하는데 안 하는 거죠. 저는 이런 종교 역할과 관련해서 생각해 보고 싶은 게, 정치논리로 볼 때는 사회복지 문제는 늘 재정문제가 논란이 됩니다. 그러면 저는 총지출이 줄어든 것이라고 설득을 해요. 복지가 높아지려면 북구 나라들처럼 40퍼센트 정도 세금을 내면 많이 해결되죠. 그러나 종교는 사회복지에 대한 접근이 다른 거잖아요. 계산이 안 맞아도 해야 되는 거잖아요. 바로 이런 것들, 종교가 그런 생각을 이 사회와 나누고 함께 고민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안 하는 거죠. 그리고는 구제나 자선 정도에 머물 뿐이죠. 사회복지 전체 개념에서 재정을 맞추고, 내가 누리는 혜택이라는 차원에서만 사고를 하지, 종교가 늘 부르짖어 왔던 함께 아파하면서 같이 일구어나가는 개념은 없어요. 종교가 그런 개념을 고민하면서 사회에 던지는 것이 중요한 화두나 담론이 아니겠어요? 그 역시 현실과 마주 설 때 나오죠. 그게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이 갖고 있는 현장성이나 역사성을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서 회복하지 않는다고 다 망한다고 보지는 않아요. 종교의 본질로써는 망하겠으나 기업으로서는 계속 가겠죠. 이런 질문들을 우리가 지속적으로 던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도법 이제는 종교를 어떻게 구제할 것인가와 같은 종교 구원론이 나와야겠네요.


깨달음에 대한 탐욕, 하나님에 대한 탐욕, 신비에 대한 탐욕


김민웅 도법스님께서 불교의 현주소를 말씀하셨는데 개신교와 가톨릭이 가장 중요하게 성찰해야 할 현주소는 어떤 것이라 생각하세요?


김인국 저는 가톨릭의 교계제도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0년 역사를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에요. 상명하복의 상하구조도 얼마든지 복음적 실천을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기능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다양한 공식문헌들이 가르치는 대로 사목자들은 평신도들에게 정의와 공정을 위한 투신의 필요를 각성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은 생활 속에서 이웃에게 봉사하는 시민의 의무를 수행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면 교회는 저절로 거룩해지고 세상도 건강해지는 겁니다. 문제는 교회부터 자신이 세운 원칙에서 벗어나 있다는 겁니다. 

  

도법 깨달음에 대한 탐욕, 하나님에 대한 탐욕, 신비에 대한 탐욕을 별도로 찾는 거잖아요. 거기에 일생을 걸고 있는 거예요. 그거 못하는 사람은 죄의식을 느끼고.


김민웅 이제 깨달음이 어떤 깨달음이냐를 따져야 해요.


도법 모든 종교에 그런 요소가 있다고 보는 거죠. 내용은 다르겠지만.


김인국 2007년 10월말 삼성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맞붙었을 때 이를 몹시 불편하게 여긴 주교들도 있었습니다. 


도법 따져봅시다. 왜 불편하게 여겼어요?


김인국 한국사회 최강의 자본집단을 거슬러 싸움을 벌였으니 두려웠겠지요.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이라는 생각도 들었을 테고요. 

 

도법 나는 그게 핵심이 아니라고 봐요. 만약에 삼성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서 문제를 푸는 것이 가장 거룩한 행위라는 신념이 가톨릭 지도자들에게 있었다면 달리 행동했을 겁니다. 문제는 그게 없는 거예요. 저 양반들에게 거룩함은 따로 있는 거예요.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삼성 문제를 정직하게 대면해서 푸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거룩한 행위라는 분명한 자기 확신이 있었다면 여러 가지 불편함과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전혀 다르게 접근했을 것입니다.


김인국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질서를 바로 잡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세상을 정의롭게 함으로써 사람들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만드는 것을 교회의 임무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자리와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자리에 서고 보면 슬그머니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게 됩니다. 나약한 인간본성이지요. 한편으로는 없던 욕심도 생기고 말입니다. 개인이고 교회고 돈에 대한 미련만 버리면 얼마든지 떳떳하고 용감해질 수 있어요.


posted b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