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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너의 목소리가 들려

by 한종호 2016. 4. 1.

구약성서의 대량학살(2)


너의 목소리가 들려

- 출애굽기 34:1-9 -


성서에도 토론과 논쟁이 있을까?


제가 고국에서 처음 선거권을 가졌을 때는 TV 토론이란 게 없었습니다. 그때는 후보자가 TV 시청자가 아니라 광장에 모여 있는(또는 동원된) 인파 앞에서 연설했습니다. 1980년대 초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 때 어느 학교에서 열린 유세에 구경 갔던 게 기억납니다. 야당 총재였던 분이 당시 대통령이던 사람 이름을 존칭도 없이 부르면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해내던 걸 직접 제 눈으로 봤습니다. 그 후에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대규모 청중유세가 아니라 TV 토론이 대세가 됐습니다.


그런데 아직 제 눈에는 토론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것은 제가 여기 미국에 오래 살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일찍부터 TV 토론방식을 정착시킨 미국의 토론은 매끄럽고 신사적이고 내용도 좋습니다. 그런데 고국의 TV 토론은 이에 비하면 매끄럽지도 않고 인신공격성 발언도 많고 내용도 상대적으로 부실합니다. 물론 TV 토론의 역사가 짧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토론에 나서는 후보자들의 기본자세에도 고쳐야 할 점이 많다고 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토론하는 교육을 하는 것도 필요하겠습니다.




                                         일러스트/고은비



성서에도 이와 같은 토론과 논쟁이 있습니다. 성서에 일방적으로 한편의 의사를 전달하는 경우만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도 토론이 있고 치열한 논쟁이 있습니다. 우선 떠오르는 경우는 소돔 성을 두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벌인 토론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싹쓸이 멸절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거기 살고 있는 조카 롯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감히’ 하나님과 논쟁을 벌입니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는 게 정의냐고 하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의인에게는 상을 주고 악인에게는 벌을 주는 게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약한’ 한 사람인 아브라함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향해서 시시비비를 가리자고 감히 논쟁을 벌인 겁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에 의인이 오십 명이 있다면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돌이키시겠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그 제안에 동의하자 그는 숫자를 열 명까지 낮춰놓습니다. 논쟁의 결과는 알다시피 하나님의 승리로 끝났지만 아브라함이 감히 하나님과 정의의 문제를 두고 토론을 벌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에피소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셨을 때의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모세를 오랜 설득 끝에 내려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강제로 모세를 보내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갖 핑계를 대면서 할 수만 있다면 내려가지 않으려는 모세를 끈질기게 설득하셔서 내려 보내신 겁니다. 이 에피소드 역시 성서에 등장하는 토론과 논쟁의 예라고 하겠습니다.


책 한 권 전체가 토론과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욥기가 바로 그런 책이지요. 욥기는 책 전체가 토론이고 논쟁입니다. 욥은 자기가 당하는 고통에 걸맞은 이유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자기에게 전혀 죄가 없지는 않지만 이토록 극심한 고통을 겪을만한 죄는 저지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런 태도를 보고 본래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먼 길을 온 친구들은 격노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문제 삼는 그가 불경스럽다는 거지요.


그래서 그들은 결국 욥과 뜨거운 논쟁을 벌입니다. 욥이 그럴만한 죄를 저질렀으니까 그와 같은 고통을 겪는 게 아니냐는 게 친구들의 주장입니다. 위로고 뭐고 없습니다. 그들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욥의 마음을 후벼 팝니다. 그러자 욥도 하고 싶은 말을 격정적으로 토해냅니다. 쌍방의 논쟁은 결론내리지 못하고 평행선을 긋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데 거기서 하나님은 욥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욥이 옳았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젠 하나님과 욥 사이에 논쟁이 벌어집니다.


하나님과 욥의 대화를 ‘논쟁’이라고 부르기에는 적절치 않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욥을 압도하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형식은 분명히 ‘논쟁’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38:3)라고 말씀하신 데서도 확실히 드러납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어 있는 논쟁


한 걸음 더 나아가 성서에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토론과 논쟁이 분명한 경우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사람 창조’에 관한 토론이 그 보기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말씀으로 남녀를 함께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반면 2장에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아담을 지으시고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창조하셨는데 그가 홀로 있는 게 좋지 않아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갈빗대 하나를 취해서 하와를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둘은 완전히 다른 얘기입니다. 조금만 생각하면서 성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이런 불일치를 못 볼 리 없습니다. 둘을 조화시킬 방법도 없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의 최종 편집자는 두 얘기를 억지로 일치시키거나 하나를 제거하지 않고 모두 있는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얘기가 전하는 메시지가 모두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여러분 생의 의미와 목적이 뭔지 아십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자기 생에 특별한 의미나 목적이 없고 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기 생에 특별한 의미와 목적이 있다고 믿지만 구체적으로 그게 뭔지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사정이 이런데 개인 아닌 전체 인류를 하나님이 왜, 무엇 때문에 창조하셨는지, 피조물의 본질과 의미가 뭔지 확실하게 대답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 어떤 천재도, 그 어떤 뛰어난 영적 지도자도 이 물음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런 어려움이 성서에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서도 사람 창조의 의미와 목적을 콕 집어서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서도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거기엔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가 있으니 말입니다. 기원전 10세기 이스라엘의 신학자, 곧 창세기 2장을 쓴 신학자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생기가 그 안에 머무는 동안엔 만물의 영장일지 몰라도 그것이 떠나가면 흙으로 돌아가는 나약하고 허무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반면 기원전 6세기 또는 5세기 바빌론 포로기의 한 신학자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서 창조의 정점이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는데 둘 다 중요하기 때문에 편집자는 둘 다 보존했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분명 ‘토론’이요 ‘논쟁’입니다. 토론자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장소에 있었지만 그들은 시공을 초월해서 토론하고 논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쟁


성서는 이렇듯 서로 다른 의견들이 만나서 때론 뜨겁게 때론 차갑고 이성적으로 토론하고 논쟁하는 책입니다. 성서에는 하나의 일률적이고 통일된 목소리만 있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서로 다른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하는 책입니다. 그것들이 만나서 서로 협조하고 공통점을 찾아가는 경우도 있지만 평행선을 그리며 갈등을 지속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견들이 때론 너무나 달라서 ‘신사적으로’ 상대방의 견해를 인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견해에 대해 격정적으로 공격합니다. 성서의 독자들은 이런 경우를 만나면 당황하게 마련입니다. 어느 견해를 따라야 할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성서에서 전개되는 다양한 토론과 논쟁의 주제 중에서 두 가지가 두드러집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이 중대한 기로에 놓였을 때 어느 길을 택할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느냐 마느냐를 결정했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한편에는 이젠 왕을 세울 때가 됐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왕은 야훼 하나님밖에 없다면서 말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나 사람을 왕으로 세우는 행위는 야훼의 왕권을 부정하는 죄악이란 겁니다. 사무엘상을 읽어보면 그들이 이 문제를 두고 얼마나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두고 벌어진 논쟁입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알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입니다. 사람이 알 수 있다면 그 분이 무슨 하나님인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게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호주머니를 뒤집어 보여주듯이 그렇게 보여주셨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언어와 사람의 언어 사이엔 건너기 어려운 거리가 있기에 하나님이 당신을 알려줬다고 해도 사람이 그걸 다 알 수 있다고 믿진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사람의 언어와 생각이 하나님이란 신비하고 거대한 분을 담기엔 턱없이 작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가 특별히 무능해서 그런 게 아니라 본래가 그런 겁니다. 사람의 그릇이 부족해서 그런 거니까 자괴감 갖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과 얘기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는 상호일치하거나 보완적인 얘기도 있지만 갈등하고 상충되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지식이 극히 부분적이기 때문입니다. 시각장애자가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말입니다. 자기가 만진 곳이 극히 작은 일부인데 그게 전부인 줄 알고 큰소리치는 격이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 지식이 얼마나 부분적이고 보잘것 없는지를 깨닫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이 얘기를 비교적 상세하게 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성서엔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만 있는 게 아니란 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서입니다. 성서가 하나님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목소리만 내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성서는 그런 책이 아닙니다. 성서를 음악에 비유하면 독주나 독창이 아니라 오케스트라나 합창과 같습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소리들이 공존합니다. 성서를 읽을 때 우선 이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합니다.


오케스트라는 다양한 악기 소리가 어울려서 화음을 이룹니다. 화음이 이뤄지지 않은 음악은 듣기가 괴롭습니다. 그런데 음악에는 불협화음이란 게 있습니다. 화음이 이루어지지 않는 음정이 불협화음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음악에는 불협화음이 있어야 합니다. 화음이 이루어지지 않는 음정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전혀 없이 모든 음정들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고 해서 좋은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불협화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아니, 불협화음은 모든 음악에 필요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좋은 음악은 불협화음을 잘 이용하는 음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약성서라는 오케스트라에도 불협화음이 있습니다. 어울리지 않는 음정을 내는 부분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불협화음이 자주 등장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구약성서에도 어울리지 않는 음정이 자주 등장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어울리지 않는 정도가 강렬해서 자칫 전체 음악의 완성도를 위협할 정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출애굽기 34장은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며 악과 허물과 죄를 용서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물론 본문은 하나님은 “죄를 벌하지 않은 채 그냥 넘기지는 아니한다. 아버지가 죄를 지으면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고 말합니다. 죄에 대해서는 처벌이 따른다는 겁니다.


이 본문만 보면 하나님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심지어 젖먹이까지 대량학살하시는 분이라고는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대량학살을 저지르거나 그걸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하나님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구약성서 연구자로서 구약성서라는 오케스트라에 불협화음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완벽하신 하나님에게 불협화음이 웬 말이냐고 말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게 있다고 해도 어떻게 그걸 그냥 놔둘 수 있겠냐고 생각했었습니다. 고쳐서 좋은 화음을 만들든지 아니면 적어도 지나치게 튀지 않을 정도로는 손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성서는 제 생각과는 달리 불협화음들을 그대로 놔뒀습니다. 자칫하면 음악 전체를 망칠 수도 있는 것들을 그대로 놔둔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와 목적을 깨닫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었습니다. 성서가 불협화음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놔둔 이유는 각각의 소리에 독특한 의미가 있고 중요한 신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없앴다가는 의미 있는 중요한 신학을 잃게 된다는 진실을 깨달은 겁니다. 성서라는 오케스트라는 화음을 포기하고 개성을 택한 겁니다.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이라고 믿는 것과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는 분으로 믿는 신앙은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둘 중에 하나는 맞고 다른 하나는 틀렸다고 보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둘 중 하나는 불협인 줄 알고 있지만 그걸 없앴다가는 중요한 신학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를 읽으면서 서로 다른 목소리를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편이 화음이고 어느 편이 불협화음일까요?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한결같은 사랑과 진실이 풍성한 분’이라고 믿는 것이 화음이고 ‘어린아이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이 불협화음일까요? 아니면 반대로 대량학살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화음이고 자비롭고 은혜로워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불협화음일까요? 이렇게 말하면 ‘대량학살을 명하시는 하나님이 화음이라니, 무슨 당치 않은 말을!’이라며 놀랄 분도 있겠지만 그것은 두고 볼 일입니다. 성서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해석을 시도한 다음에 결론 내려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오늘 얘기는 어떤 분에게는 너무도 낯설어서 혼란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인내를 갖고 계속 주의 깊게 들으면 점점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구약성서의 대량학살(1)어떤 살인http://fzari.com/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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